소설리스트

<113화> (113/136)

<113화>

서원은 제가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도 아니고, 감히 도겸의 인생을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제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도겸을 봐 줄 수 있지 않을까. 저와 함께 있는 것이 도겸에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굳건하게 들었다. 분명 겁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그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그만큼 강했다.

서원이 말없이 주먹을 꽉 쥐는데, 회장님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굳이 네게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지 않는 건, 배경 탄탄한 우성 오메가 중에서도 좋은 사람은 넘치고 넘쳤으니까 그런 거란다.”

“……그렇지만 형이 그런 상대를 원했다면 선 자리를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요.”

서원은 지금 배경 탄탄한 우성 오메가 중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도겸이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데, 자꾸만 다른 오메가를 엮으려고 하는 게 문제인 거다.

서원이 차갑게 대꾸하고는 도겸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겸이 수긍하자, 회장님은 기가 찬다는 듯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아직 뭘 몰라서 그렇다. 지금은 일방 각인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렇지, 상황만 정리되면 바로 해결될 일이야.”

회장님은 마치 도겸이 제게 일방 각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원과 도겸이 만나는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듯이 대꾸했다.

이에 대해선 서원도 할 말이 있었기에 입을 벙긋거렸으나, 제 입에서 말이 나오기보다 도겸의 반박이 더 빨랐다. 그는 더는 듣고만 있기 힘들다는 듯 반론했다.

“아버지, 제가 서원이한테 각인한 건 몇 달 되지도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선 자리를 거절해온 건 배경만 보고 만나는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이런 모자란 놈…….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우성 오메가를 만나는 건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냐!”

회장님은 도겸이 서원에게 일방 각인한 지 얼마나 됐다는 건 처음 알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조금 언성을 높였다. 회장님은 여태까지 선 자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주면서도, 단 한 번도 도겸에게 거절하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에 도겸은 작게 숨을 내뱉더니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똑똑하고 집안 좋은 거? 좋죠. 그렇지만 누누이 말했듯이 전 그런 걸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잘하는데, 굳이. 그리고 두 분의 기준에 맞춰 결혼할 생각은 더더욱이 없고요.”

도겸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듯 덤덤하게 말하더니, 할 말이 있다는 듯 회장님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듣고 있자니 다른 회사와 합병하려고 그러시는 것보다는 후계자 문제가 커 보이는데……. 차라리 아버지가 정자를 얼려 놓으시죠? 아직 아버지 정정하시잖아요.”

“이놈이! 그게 부모한테 할 말이더냐!”

“백 번을 설득해도 제 답은 같을 겁니다. 저는 서원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도겸이 슬그머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회장님의 낯빛이 불그죽죽하게 물들었다. 이전에 이복동생까지 만들었던 전적이 있던 터라, 찔려서 더 크게 반응하시는 듯했다.

회장님은 언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삭이기 힘든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끓는 속을 진정시키려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겸도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컵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제가 보기 싫거든, 저에 대한 지원을 다 끊으셔도 됩니다. 제 자리도 채연이한테 넘겨도 되고요. 채연이도 열성 오메가라 부모님이 원하는 우성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도겸아! 그게 무슨 소리니! 여보, 얘가 흥분해서 그래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인 거 아시죠?”

식사 내내 가만히 계시던 사모님이 화들짝 놀라 도겸을 만류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회장님을 달래는 것도 그와 동시였다.

사모님이 그런 말 하지도 말라며 도겸을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그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그는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는 듯이 회장님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제가 전무이사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아버지의 힘이 있었다는 거 압니다. 그러니 만약 절 내치려거든, 제가 전무이사로 취임하고 낸 결과물에 대한 성과금만 챙겨 주세요. 전 그거면 됩니다.”

“허……. 네가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단단히 미치긴 했구나.”

회장님은 물을 마시며 조금 진정했는지 낯빛이 되돌아오긴 했으나, 여전히 도겸을 이해할 수 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서원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보며, 왜 도겸이 부모님의 허락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굴었는지 알 것만 같아졌다. 도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의견을 내놓아도 철통같이 안 된다고 할 거였으니까.

아무래도 하루 만에 두 분에게 허락을 받으려는 건 욕심이었던 것 같았다.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이래서는 괜히 반발심만 더 강해질 듯했다.

도겸에게 그만하라며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는데, 회장님이 땅이 꺼지라 깊게 숨을 내뱉더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아니지, 미친 게 아니라 이게 네 본 성격일 수도 있겠구나. 네 성격답지 않게 내 말을 순순히 잘 따르긴 했어.”

“…….”

“난 네 눈빛을 볼 때마다 언젠가 일을 치르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이런 아이를 만나려고 이럴 줄은 몰랐어.”

회장님은 도겸이 언제까지고 말을 잘 듣지 않고, 언젠가 반항해 오리라는 걸 예상하였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작 이러려고 호시탐탐 때를 기다렸냐는 듯이 도겸을 야망이 없는 녀석 보듯 했다.

도겸과 회장님 사이에 숨 막히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서원이 느끼기에 회피하는 게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 같아서 오늘 회장님을 최대한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 뜻과는 달리 점점 더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더는 회장님의 성질을 긁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원이 도겸을 저지하려는데, 회장님이 시선을 거실 쪽으로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오거라.”

칼처럼 날카로운 각으로 다림질한 검은 정장을 입은 거구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얼핏 보이기로 열댓 명이 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큰 저택이라고 한들, 요원처럼 생긴 거구들이 몰려오니 길이 막혔다.

갑자기 이 사람들은 어디서 나온 건지? 서원과 도겸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거구들은 도겸을 붙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이게 무슨……!”

도겸이 억지로 일으켜지다 반항한 탓에, 그가 앉아 있던 식탁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도겸이 양팔을 잡힌 채 눈을 커다랗게 뜨자, 회장님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 안에 가둬 버려.”

“아버지!”

“마음을 바꿔먹을 때까지 방에 들어가 있거라.”

“이거 놔!”

도겸이 격렬하게 반항하며 몸이 비틀자, 그를 붙잡고 있던 남자 둘이 버거운 듯 흔들렸다. 그렇게 뿌리치는 듯했지만, 곁에 있던 거구 몇이 더 도겸에게 달려들어 저지시키면서 다시 잡히고 말았다.

도겸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으르렁댔으나, 남자들은 대답도 없이 도겸을 2층으로 끌고 갔다. 사모님은 창백한 낯을 한 채로 도겸의 모습을 바라보다, 참담하다는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면 오늘따라 사모님이 유난히 조용하시길래, 회장님이 곁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어림짐작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쩌면 그녀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까지 도겸을 몰아세우면 도겸이 이렇게 반발하고 회장님이 노하실 거라는 걸 알고서…….

도겸이 억지로 끌려가는 것을 보며 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가려고 하는데, 회장님이 이번에는 서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도 이만 가거라.”

“……네?”

“네 발로 갈 테냐, 아니면 끌려 나갈 테냐.”

회장님이 선택지를 주듯 말했으나, 무얼 선택하든 결과는 똑같았다.

서원이 주먹만 꽉 말아쥔 채 둘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자, 회장님이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쫓아내.”

“네.”

짧은 명령에, 덩치 큰 남성 둘이 서원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도겸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원의 겨드랑이에 팔을 하나씩 끼워 넣고 서원을 억지로 저택에서 끌어냈다.

덩치 둘은 서원을 대문 밖까지 끌고 가서는, 커다란 철문을 쾅 닫아 버렸다. 덩그러니 바깥에 남겨진 서원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저택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제가 저택에서 끌려 나오게 된 건 그렇다 쳐도 형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이 저택에 감금당하는 걸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신고하고 밖에서 기다렸지만, 경찰이 오고 나서도 이렇다 할 시원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저택에 들어섰다가 나온 경찰은 난감하다는 목소리로 서원에게 말했다.

“그냥 가족 간에 생기는 트러블이라고 하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고 들어가시라고 하시네요.”

“그런 트러블이 아니에요. 정말로 도련님이 감금됐다니까요?”

“하아……. 그러니까. 적당한 훈계 조치한 것뿐이고, 금방 나오게 할 거라고 합니다. 저희가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일로 신고하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

아니, 가족 간에 흔히 생기는 그런 일이 아닌데…….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 같아 서원이 할 말 많은 얼굴로 경찰을 바라봤으나, 경찰은 회피하듯 경찰차에 올라타더니 금방 떠나갔다. 사모님이나 회장님이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귀찮은 일에 엮이기 전에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믿었던 경찰까지 도와주지를 않으니, 정말 방법이 없었다. 서원은 핸드폰을 꺼내 그와 이전에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력을 바라봤다. 아까 경찰을 기다리며 도겸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그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핸드폰도 압수당한 걸까.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