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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112/136)

<112화>

관계를 이쯤까지만 허락한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뭐? 찰떡이를 넘기라고? 제가 찰떡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데, 한순간에 빼앗기게 생겼다.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귀가 먹먹해질 만큼 심장이 빠르고 세차게 뛰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현기증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럽고, 토기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서원이 창백하게 얼굴을 물들이며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고 애썼지만, 도겸이 회장님의 말에 맞받아치는 것이 더 빨랐다.

“아이는 건드리지 마시죠. 그리고 제가 서원이를 좋아하는 건, 아버지가 다른 오메가를 만나고 다니는 것처럼 그런 단순한 마음이 아니에요.”

도겸이 단호하게 막아섰다. ‘아버지처럼’. 회장님이 사모님을 만난 것도 사랑이 아니었고, 외도에 배다른 아이까지 만들어낸 것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회장님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표정 변화도 없이 냉정하게 나오던 회장님은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삽시간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였다. 이윽고 그는 이마에 푸르스름한 핏줄을 바싹 곤두세우며 호통을 쳤다.

“이놈이……! 내가 어떻게 널 최고로 만들었는데 좋은 수를 버려! 너도 애처럼 굴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도겸을 바라보는 회장님의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싸늘했는데, 언성이 높아지자 살얼음판을 걷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살벌해졌다.

겁이 나야 당연할 상황인데, 서원은 회장님의 말에 두려움보다는 순간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만들었다고? 보통 제 자식에게 ‘만들었다’라는 표현을 쓰나?

발끈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라고 생각해 봐도, 서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이었다. 회장님이 평소에 도겸을 유용한 도구처럼 생각해 왔기에 저 표현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형은 이곳에서 어떤 사랑을 받아 온 거지?’

평소 사모님을 보면서 다른 부모님들에 비해 극성이라는 생각하긴 했었다. 그렇지만 대치동만 가도 치맛바람이 어쩌네 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에 ‘부잣집이라 더 심한가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 다들 제 아이가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탄탄한 직업을 갖고, 걱정 없는 미래를 살기를 바라니까 이해할 수 있기도 했고.

그렇지만 이건……. 자식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기 편한 도구를 잃게 될까 봐 걱정하는 거로밖에 안 보이는데.

단순히 ‘만들었다’라는 표현 하나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제가 이곳에 발을 들인 뒤로 느꼈던 집안 전반적인 분위기 또한 그렇게 느껴졌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도겸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부모님이라면 제게 작은 기회라도 주실 거였다. 제 아이가 선택한 사람이니 좋은 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관찰하실 거였다.

그러나 사모님과 회장님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예 궁금해하시지 않았다. 오직 제 형질과 돈 얘기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 도겸을 바라보니, 그도 회장님만큼이나 욱해서 당장이라도 자리를 뜰 기세였다. 서원은 이대로 자리를 피해 버리는 건 상황만 더 악화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테이블 밑으로 도겸의 손을 꽉 잡아 그를 제지했다.

서원이 말없이 손을 잡아 오자, 도겸이 멈칫하고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봤다. 서원은 가만히 도겸과 눈을 몇 초 맞추다, 다시금 맞은편에 앉은 회장님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 회장님.”

“뭔가?”

서원이 조심스레 끼어들자, 회장님은 노기를 다스리려는 듯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쉬면서 서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회장님이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서원은 겁먹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으며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왜 결혼을 반대하시는지 압니다. 두 분이 느끼기에 제가 만족스러운 상대가 아닐 것도 예상했고요.”

한때는 저 자신조차도 도겸과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생겼음에도 말하지 않고 도망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저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일단은 부딪혀 보고 싶었다.

서원은 저의 단단한 마음이 도겸, 그리고 그의 부모님에게 확실하게 닿기를 바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만 저는 그래서 더욱 형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듯한 말에,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서원에게로 꽂혔다.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놀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도겸이었다. 난데없이 청혼을 받게 된 도겸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줄곧 결혼 이야기를 해 왔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선언할 줄은 몰랐는지 마치 들어선 안 될 말을 듣기라도 한 반응을 보였다.

“나랑 결혼하겠다고?”

“네.”

“가, 갑자기 왜? 아니. 나는 너무 좋은데…….”

도겸은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단 건 안중에도 없는지, 몸을 반쯤 서원에게 돌린 채 물었다. 그에게는 오직 서원에게 결혼 허락을 받았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서원은 제가 어쩌다 마음을 바꾸게 된 건지에 대해 도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니었다.

서원이 도겸을 마주 보고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 대답하는데, 이 상황을 황당하게 보고 있던 회장님이 눈썹을 찡긋 올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래서 더욱’ 결혼하겠다니?”

“전 사실 며칠 전에 형에게서 청혼을 받았고, 그 순간은 너무 좋았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은 못 하고 있었어요. 상황을 들었으니 아시겠지만, 평범하게 각인이 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지.”

서원이 말하자, 회장님과 사모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방 각인을 하게 된 전후 상황을 자세하게 들은 건 아니어도, 워낙 특이한 사례이다 보니 이해한다는 분위기였다.

잠시 두 분의 반응을 살핀 서원은 마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도 일방 각인이 풀리면, 형이 저를 안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왜냐면, 각인 전까지만 해도 형이 절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서원은 말을 하며, 그의 페로몬 파트너로 지내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와 그가 함께하는 미래는 전혀 그릴 수가 없었다. 영원한 짝사랑으로 남을 줄 알았던 때였다.

“형은 제게 고백할 때, 이전부터 저를 좋아했었는데 여태까지 자기의 마음을 몰랐다고 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하고 믿음이 안 갔었는데……, 오늘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형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원은 말하며, 그가 제게 마음을 고백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듣고 사실 말이 되는 소리인지 의심했었다. 십여 년 동안 좋아했다면서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모를 수가 있는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서원은 뜻하지 않게, 오늘의 식사 자리에서 도겸을 이해해 버렸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열성 오메가를 이렇게나 배척하는데, 그가 어떻게 열성 오메가를 좋아하게 됐다고 인정할 수 있었을까. 저였어도 인정 못 했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자란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인정했다는 건……, 도겸이 그만큼 제게 진심이었다는 거겠지.

서원은 줄곧 회장님과 사모님을 마주하며 말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도겸을 바라봤다. 그는 조금 울 것 같기도 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떡이가 그의 아이인 걸 알았을 때도, 제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때도 저렇게 벅찬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나 좋은가 싶어서 서원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혼자 전장에 서 있는 느낌이었는데, 누구보다 든든한 제 편이 바로 옆에 있었다. 도겸의 존재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렸다. 서원은 잠시간 도겸을 바라보다 다시금 맞은편을 바라보며, 좀 전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혹여나 형의 각인이 풀리더라도 저를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러니, 형과 같이 아이도 낳고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서원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도겸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도겸의 청혼을 받아들이게도 되고, 곧바로 그의 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회장님이 결혼은 안 된다며 선을 그은 것이 삼십 분도 채 지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즘 애들이라 그런가 당돌하고, 할 말은 다 하는구나. 그런데 도겸이가 마음을 인정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건 무슨 의미지? 교육 방식이나 환경이 잘못됐다는 의미인가?”

회장님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마주했다는 듯 귀찮고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제가 자식을 잘못 키우기라도 한 거냐고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 도겸에게 들은 바로는, 회장님이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제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회장님이 묻는 것이 의외였다.

유년기에 무관심하긴 했어도 부모긴 부모라는 걸까? 서원은 제가 아이를 키워 본 것도 아니고, 그쪽으로 전문가도 아니기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제가 느꼈던 점을 회장님께 전했다.

“두 분께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기보다는 형질과 집안을 이유로 선을 그으시는 것도 그렇고, 도련님을 ‘만들었다’고 표현하신 것도 그렇고. 도련님이 이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도련님 또한 만나는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이 어떤지보다, 계급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는 걸 배웠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처럼 급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껴도 인정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의 부모님이 저를 평가할 때 따진 것은 제 외모, 학벌, 언행, 가치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형질과 집안의 문제밖에 없었다. 또한 저를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게도 ‘만들었다’는 표현을 쓰며 자신들이 만든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이 도겸과 그의 곁에 둘 반려자가 어떻기를 원하는지 너무나도 확고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도련님한테 들은 말로는, 우성 알파는 우성 오메가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고, 열성 오메가를 좋아하면 비정상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거, 재벌가 사이에서만 도는 말 아닌가요?”

서원은 도겸이 교육받았다던 말까지도 조작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런 집안이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뿐더러, 도겸에게 그 말을 듣고 혼자서 인터넷에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우성 체질이 모이는 커뮤니티에 그러한 말을 저들끼리 나누는 걸 보긴 했다만, 의견을 뒷받침해 줄 연구 결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에는 통계적으로 우성끼리 만나 가정을 이루는 케이스가 90%를 넘을 정도로 많다는 자료가 있기는 해서 ‘그런가.’하고 넘어갔는데……. 이곳에 오니까, 우성 체질이라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서원이 두 눈을 부릅뜨고 회장님을 바라봤다. 시선을 회피하면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똑바로 마주하고 있자, 그는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실망스럽구나. 결국, 네가 가진 게 없어서 기분 나빴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게 아니라, 뒷받침할 근거가…….”

“아아, 무슨 자료라도 찾아본 모양인데…….”

서원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위해 되물어 보려는데, 회장님이 마침 얘기하려고 했다는 듯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은 깔보는 시선으로 서원을 바라보다 빈정대듯 대답했다.

“열성과 결혼하면 하자품이 되니까 비정상이라는 거란다. 운 좋게 우성의 자식을 낳을 수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도박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

비정상이라는 게 그런 의미로 비정상이라고 하는 거였다니…….

교육 방식이 잘못된 거라면 바꾸려는 의도로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의도를 가지고 교육해 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

도겸도 그런 의미로 비정상이라고 하는 건 줄은 몰랐다는 듯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른한 살이 될 때까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도겸의 부모님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들이 죄다 우성 체질의 사람들이었으니 의심할 틈 없었던 눈치였다.

서원은 회장님과 사모님이 도겸을 좋은 사업 수완으로 키워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는데,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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