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요령이 생긴 덕에 뒤로 갈수록 참가자들의 점수는 점점 높아졌다. 이진이 앞에서 문어를 연상시키는 춤을 추며 한번 망가져서 그런지 이후에는 다들 몸을 던져 망가지면서까지 점수를 얻어 냈다. 덕분에 이진의 700점은 아주 작고 소박한 점수가 되어 버렸다.
‘노래에서 만회해야지.’
이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다음은 랜덤 미션을 수행하는 운 종목의 촬영이었다. 아까 촬영장은 적당한 크기의 방 하나에 운동회 소품을 가져다놓은 정도였다면 다음 촬영을 위해 이동한 곳은 실제로 운동회가 열릴 법한 커다란 강당이었다.
이번 달리기 코스에는 제각기 높낮이가 다른 허들이나 뜀틀, 철봉 같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는데 장애물 앞에 검은 커튼이 쳐져 직접 달려가 커튼을 젖히기 전까진 난이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또한 코스 마지막에는 미션 종이가 든 동그란 통이 있다. 각자 뽑은 종이에 적힌 미션을 수행한 뒤 결승점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점수를 획득하는 게임이었다.
“내가 마지막 자리 할래.”
“아까 먼저 한 애들이 그러던데 무슨 뜀틀을 12단까지 쌓아 놨대.”
“발 구름판도 없는데?”
“에이, 그 정도면 그냥 뛸 수 있지.”
참가자들은 출발선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잡으며 떠들었다. 12단이라니, 중학생 때 체육 수행 평가였던 알록달록한 스펀지 뜀틀 말고는 본 적이 없는 이진은 얼마나 높은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준비하세요. 3, 2, 1.”
휘이익, 스태프가 호루라기를 불자 다 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진은 세 번째 라인을 따라 달렸는데, 달리는 내내 양 옆에 사람과 부딪히는 게 고통스러웠다.
민서호가 가장 먼저 커튼을 젖히고 첫 번째 장애물을 확인했다. 앞에 허들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허들을 한 개씩 주춤대며 뛰어넘은 뒤 다시 달려 나갔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참가자들이 차례로 커튼을 젖히자 마찬가지로 허들이 나타났다.
이진의 앞에는 허들 한 개가 있었지만, 바로 옆 라인을 달리던 리웨이는 허들을 열 개나 뛰어넘어야 하는 바람에 순위가 한참 뒤로 밀려났다.
두 번째 커튼이 나타났을 땐 재규가 서호의 뒤를 바싹 추격해 거의 추월하기 직전이었다. 재규와 서호가 동시에 커튼을 걷자 방금까지 말하던 12단 뜀틀이 눈앞에 서 있었다.
“으아악, 하필 나한테!”
12단 뜀틀의 위용 앞에 재규가 절규했다. 뜀틀은 거의 사람만 했는데 맨바닥에서 하는 도움닫기만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이 커다래 보였다.
서호의 앞에는 평범한 5단 뜀틀이 놓여 있어 가뿐하게 뛰어넘고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진의 뜀틀은 고작 2단 짜리라 뛸 필요도 없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주춤주춤 걸어가면 되었다. 그는 재규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다시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세 번째 커튼 너머엔 과자가 달린 철봉이 있었다. 앞 라운드에서 철봉 게임을 경험한 적 있기에 다들 어렵지 않게 과자를 오물거리며 마지막 장애물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 재규도 간신히 뜀틀에서 기어 내려와 뒤를 쫓아왔다.
이번에도 민서호가 가장 먼저 미션지를 뽑았다.
“민서호 참가자, 카메라 보고 무슨 미션인지 말해 주세요.”
“윈올 첫 번째 경연곡 3배속 댄스요.”
“네, 이쪽으로 나와서 도전 외치시면 음악 나갑니다.”
그는 한쪽으로 비켜나 카메라 앞에서 격렬한 3배속 댄스를 추게 되었다. 스태프들은 예리한 눈으로 그가 제대로 춤을 추는지 지켜보다가 동작에 실수가 있으면 가차 없이 노래를 처음으로 돌렸다.
“저는 제 이름으로 삼행시 짓기입니다.”
리웨이가 카메라를 향해 종이를 팔랑이며 말했다. 다른 참가자였다면 아주 편한 미션이었겠지만 한국어에 서툰 그는 한국어에 ‘웨’로 시작하는 단어가 있기는 하냐며 울상을 지었다.
“에어 기타가 뭐에요? 코드 잡아야 해요?”
그리고 이진의 미션은 에어 기타를 치며 러브송 한 곡 완곡하기였다.
“웃으면 실패, 연기가 어색하면 실패, 눈빛에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면 실패입니다.”
까탈스런 조건이지만 군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진이 스툴에 앉아 허공을 쥐고 기타를 연주할 무렵 우진은 휘핑기를 쥐고 머랭을 쳤고, 재규는 아이돌 노래 제목을 ‘ㄱ’부터 ‘ㅎ’까지 순서대로 외웠다.
가장 먼저 결승선에 들어간 사람은 저번 종목 꼴찌였던 보원으로 그의 미션은 국민 체조 귀엽게 추기였다. 그 뒤로는 민서호가, 다음으로는 이진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간신히 3위권 안에 들기는 했지만 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었다.
‘노래에서 만회 가능한 거 맞아?’
이진이 노리는 곡은 1라운드의 경연곡, ‘choose one’이었다.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중독적인 후크송을 감성적으로 편곡하면 상징적이고도 기억에 남는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진을 포함한 모두가 같은 생각으로 이 곡을 원할 것이 분명했다. 경쟁이 불가피했다.
한 노래를 몇 사람이 공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단순히 계산해 봤을 땐 많아 봐야 한 곡에 다섯 명. 즉 이 게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못하면 선곡을 포기해야만 할 수도 있다.
마지막 무대인만큼 보여 줄 수 있는걸 다 보여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다음 게임에서 반드시 높은 점수를 획득해야만 한다. 이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콰직, 원수 같은 에어 기타가 부서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시 점심시간을 가지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이진은 투기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밥도 열정적으로 먹었다. 반드시 노래에서 만회한다, 음식을 씹을 때마다 그 생각을 한 번씩 곱씹었다.
“현재 실시간 음원 차트를 공개합니다!”
노래 종목에선 본인의 4라운드 순위와 같은 순위의 국내 음원 차트곡을 부르게 된다. 이진이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서자 현재 실시간 순위가 공개되었다. 이진과 같은 순위의 2위 곡은 거의 한 달째 차트 순위권을 지키고 있는 드라마 OST였다. 그는 씨익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준비됐습니다.”
간단하게 음정을 확인한 뒤 말하자 이진의 귀에 헤드셋이 씌워졌다. 헤드셋 안에서는 이진이 그토록 원하는 ‘choose one’이 아주 큰 음량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이 시작된 것 같은데 전주조차 들리지 않아 노래방 기계 화면의 카운트다운을 보고 첫 소절을 떼야만 했다.
서정적인 멜로디로 이별의 아픔에 대해 말하는 가사였다. 오래도록 사랑받아 온 곡이라 노랫말이 귀에 익어 부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이런 발라드는 코러스 파트가 아니면 멜로디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다행히 이진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헤드셋에서 노래 안 나오는 거 아니야? 지금 반주 다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 갓이진!”
귀를 먹먹하게 채우는 음악 소리에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참가자들이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입이 벙긋대는 모양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진은 그들의 놀란 표정에서 느껴지는 존경심과 경외감을 기분 좋게 만끽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노래는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이진은 마이크를 쥐고 열창하며 생각했다. 프로그램 특성상 발랄한 곡 위주로 공연하다 보니 막상 특기를 보여 줄 일이 적었다. 간혹 이런 기회가 있어도 보통은 한두 소절 부르고 편집되는 일이 다반사라, 이번 노래도 방송에선 적당히 잘리고 운이 좋다면 비하인드 신 클립 영상 정도에나 등장할 것이다.
새삼스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1라운드 곡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졌다. 솔로 무대를 구상하며 이진은 한 가지 고민거리를 마주했다. 아마 대부분의 참가자가 마주한 고민일 것이다.
강점을 살릴 것이냐, 약점을 보완할 것이냐.
이진은 당연히 전자라 생각했다. 준비 기간이 짧기에 더더욱 강점을 살리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닌 무대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잘하는 것만 하려고 한다.’, ‘역시 춤은 못 추나 보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했다.
특히 이진은 그룹 활동보다 솔로 활동에 더 적합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하는 아이돌은 따지자면 댄스 가수 집단이기에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인식은 독이었다.
하지만 무대에 스토리가 실린다면 그런 인식을 한 번은 상쇄할 수 있다. 이진이 굳이 춤 퍼포먼스를 일부 포기하고 보컬에만 전념한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이진을 평가하고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맞아, 첫 방송 때는 이랬었지.’ 하고 지금까지의 행보에 조금 더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환상적인 노래 실력! 완벽해요~! 100점!
노래방 기계가 발랄하게 외쳤다. 이어서 스태프가 말했다.
“유이진 참가자, 현재 스물한 명 통틀어서 노래 종목 1등입니다.”
스태프부터 참가자까지 다 같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진은 어깨가 으쓱해진 채로 자리로 돌아갔다. 남들이 하는걸 보니 확실히 모르는 노래가 걸리면 까다로운 미션이기는 했다. 첫 음정을 잘못 잡으면 그대로 끝이고, 용케 음을 잘 잡았더라도 노래가 변화하는 구간을 잘 잡아채지 못하면 멍하니 몇 소절을 날려 버리기도 했다.
확실히 선방했다. 이진은 우선 그 사실에 기뻐하기로 했다.
게임이 모두 끝나고 점수 집계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수다를 떨었다. 가장 핫한 주제는 12단 뜀틀이었다.
“한찬우가 그걸 한 번에 뛰어넘는 거야. 아, 진짜 이 자식은 미쳤다. 올림픽 나가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거지, 앞으로 작작 까불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빡 들더라니까?”
“야,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야. 하려면 다들 해.”
미열은 아직도 그때의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이진에게 열렬히 설명했다. 찬우는 진심으로 모두가 도전만 하면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다가 옆에 앉은 재규에게 말 같지도 않는 소리 말라며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곧이어 스태프가 1위부터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1위, 한찬우 참가자! 나와서 원하는 경연곡을 선택해 주세요.”
드르륵, 깃발이 꽂힌 머핀이 카트에 실려 나왔다. 깃발에는 당연하게도 곡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딱 세 개의 깃발에만 같은 곡명이 표기되어 있었다.
“Choose one! 넌 내 거야!”
그리고 당연히 찬우는 1라운드 경연곡을 선택했다. 덥석, 찬우의 큰 손이 작은 머핀을 집어갔다. 그리고 다음으로 2위인 허동규도 같은 머핀을 집어갔다.
남은 1라운드 머핀은 단 하나. 이진은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제발 나, 제발 나……!’ 마음속 간절한 외침이 하늘에 닿은 걸까, 스태프와 이진의 눈이 딱, 마주쳤다.
“3위, 선승현 참가자! 원하는 경연곡을 선택해 주세요.”
그리고 이진의 바로 뒤에서 승현이 스윽 일어났다. 이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럴 수가!’
이진은 그토록 원하던 곡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것도 하필 선승현에게.
이름이 호명된 승현은 앞으로 나가 머핀을 유심히 보다가 살짝 뒤돌아 이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손을 1라운드 머핀에 가져갔다, 옆의 머핀에 가져갔다 하며 반응을 관찰했다. 당연히 이진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장난에 휘말려서가 아니라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저 자식이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이진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순간, 한참을 고민하던 승현이 머핀을 집어 들었다.
“저는 ‘Craving Juice’를 고르겠습니다.”
이진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승현의 결정에 기쁨보다는 허탈함과 분노를 느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선승현, 그게 정말 네 최선이야?’
차라리 고민 없이 그 곡을 택했더라면 몰라도, 승현은 분명 이진 때문에 차선을 택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기분을 망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