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트랙을 따라 달려와서 저기 빨간 깃발을 가장 먼저 잡으신 분이 첫 타자입니다. 호루라기 불면 바로 달리시면 돼요.”
모두가 제자리에 정렬하자 스태프가 안내를 시작했다. 나름 3종 경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운동회에서 볼 법한 소품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는데, 분위기에 맞춰 스태프도 평소 의상에 운동회 진행 요원이 몸에 지니는 도구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진은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발목과 어깨를 풀며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조합에는 댄스가 특기인 참가자가 없다. 가급적 뒤 순위에 해서 다른 참가자들의 요령을 베끼는 수밖에 없어.’
삐이익, 호루라기를 불자 흰 선 앞에 나란히 서 있던 참가자들이 일제히 깃발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다들 열정적인 표정에 비해서는 속도가 썩 빠르지 않았다. 다들 이진과 같은 생각을 하며 첫 타자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미묘한 눈치 싸움 끝에 처음으로 깃발을 쥐게 된 사람은 김보원이었다.
“김보원 참가자가 안무에 넣어야 할 동작들을 공개합니다!”
보원이 방의 정중앙, 카메라 앞에 서자 기계 옆에 배치된 50인치 모니터에 다섯 가지 동작이 떠올랐다. 모니터에 등장한 동그라미와 직선으로 이뤄진 단순한 캐릭터들은 윈올의 여러 무대들 중 포인트 안무만 쏙쏙 골라 반복해서 추고 있었다.
스태프 한 명이 모두에게 규칙을 추가로 설명했다.
“화면에 나오는 동작들을 순서대로 추면 되겠습니다. 한 동작을 클리어하면 화면에 동그라미 표시가 떠오릅니다. 동작이 분명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변형이 가해지면 동그라미를 받지 못할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또한 패스는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으며, 이 페이지를 모두 클리어해야 다음 페이지에서 새로운 동작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규칙은 예상보다 까다롭고 기준을 잡기 힘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참가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중에서도 보원이 가장 좋지 않았다. 거의 절망한 듯 보였다.
“자, 그럼 준비하시고! 바로 음악 나갑니다.”
느리고 서정적인 멜로디에 규칙적인 비트가 들어간 곡이었다. 한 번씩 통통 튀는 현악기 소리가 들렸고, 그때마다 조금씩 박자가 빨라져 긴박감이 쌓였다. 하이라이트 파트로 향할 때쯤이면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을 들었다.
보원은 우선 비트에 맞춰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허공을 움켜쥐고 가슴으로 가져오는 첫 번째 동작을 반복했다. 다음 동작은 한쪽 다리를 쭉 뻗은 채 골반을 좌우로 흔드는 귀여운 안무였는데,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힘들다 생각했는지 과감히 패스하고 그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두드리는 안무였다.
‘……구리다.’
그는 차근차근 주어진 조건을 충족해 나갔지만, 완성된 춤은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아무렇게나 짜깁기된 안무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게임을 훌륭히 해내려면 동작 사이사이에 본인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 있는 안무를 첨가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독보적인 춤 실력을 뽐내는 찬우라면 마치 원래 하나의 춤이었던 것처럼 환상적인 솜씨로 꿰매어 냈겠지만, 이진이나 보원처럼 주어진 안무를 열심히 외워서 따라 추는 게 고작인 사람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보원의 민망한 춤사위가 끝이 나자 자리에 있던 참가자들은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설픈 춤으로 동작 4개를 클리어해 400점을 받았다.
곧바로 두 번째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앞선 달리기보다 속도가 한참이나 덜 나왔다. 다들 보원의 끔찍한 결과를 보고 나서 그런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달리기 싫은 티를 냈다. 장현기는 대놓고 웃긴 폼으로 달리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런 요령이 없는 참가자들은 슬픈 표정으로 선두를 달렸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두 번째 타자에 하필 이진이 걸리고 말았다. 이진 역시 요령이 없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운 이였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곁을 달리던 재규가 “형, 미안!”하고 중얼거리더니 깃발 코앞에서 신발 끈을 묶는 척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진은 손에 든 깃발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방금 전 보원이 섰던 자리로 걸어갔다. 중얼중얼, 입 속으로 딱 다섯 개만 통과하자고 읊조렸다.
“유이진 참가자가 안무에 넣어야 할 동작들을 공개합니다!”
스태프가 지시하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화면에 다섯 가지 동작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진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백짓장이 되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한 번에 추라는 거야?’
막상 자리에 서니 옆에서 지켜보던 것보다 훨씬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각 동작의 장르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부 예전에 한번쯤 춰 본 적이 있는 안무에서 가져온 걸 텐데 대체 어느 노래에서 나온 건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보원이 제법 선방한 거였구나, 뒤늦게 그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진은 우선 자리에서 콩콩 뛰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유롭고 유연한 마인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정 굳은 머리가 풀리지 않으면 몸이라도 풀자 하는 의지가 가득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몇 번 깊게 숨을 들이쉬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이 틀어지는 순간 방금 전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뻣뻣하게 굳은 통나무 하나만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진은 다급하게 스태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음악에 추라고요?”
띵가딩, 우쿨렐레가 밝고 느릿한 음을 연주했다. 대체 어디가 EDM,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인가. 그저 장르를 알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음악일 뿐이었다. 가만 귀를 기울이니 자글대는 태양과 촤아아 밀려오는 파도,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새 소리 따위도 들려왔다.
얼떨떨한 얼굴로 비트에 맞춰 스텝을 밟으니 몸짓이 절로 나긋해졌다. 스텝에 맞춰 첫 동작대로 가슴 근처에서 손가락으로 하트를 두어 번 그리자 화면에 동그라미 표시가 나타났다. 다음은 주먹 쥔 양손을 위에서 아래로 번갈아 내리지르며 다리로는 엇박을 타 앞으로 전행하는 동작이었다.
“이건 힙합 버전으로 개조한 안무 아니었나?”
뒤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 2라운드 진영과 제이슨의 공연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걸 대체 어떻게 자연스럽게 연결시키지,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갔다. 이진은 필사적으로 춤을 잘 추는 멤버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멘토가 참가자를 지도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음악이 파도라면 댄서는 파도 위에 몸을 맡긴 서퍼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하면 호흡을 잃고 흐름에 잡아먹힐 뿐이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는 안무도 하나하나 쪼개 보면 기본 동작의 변형이다. 눈으로 분석하고 귀로 흐름을 쫓으면 몸은 자연히 따라가게 되어 있다.
솔직히 처음에 들었을 때는 막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은 리듬에 맞춰 살랑살랑 몸을 흔들면서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볼 때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어색하거나 따로 놀지 않는 훌륭한 연결이었다.
“우와……. 이건 진짜 뭐랄까, 문어 같아.”
“야, 조용히 해!”
그러나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면 흐물거리는 음악에 온몸을 맡기다보니 춤도 평소의 절도를 잃고 흐느적대고 말았다는 걸까. 차마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비집고 튀어나오는 웃음들이 귓가에 선명했다.
이진은 그들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간신히 한 페이지를 클리어했다. 다섯 동작 클리어에 예술 점수 보너스를 받아서 총 700점을 획득했다. 이진은 뒤늦게 몰려온 수치심에 자리로 돌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형. 문어치고는 엄청 잘 췄어.”
“맞아, 그 노래도 있잖아. 당신은 육지 멋쟁이, 나는 바다 이쁜이! 천생연분 결혼합시다. 이거, 이거.”
“형 완전 바다 예쁜이 문어.”
“그 노래에서 문어 아저씨는 주례였을걸?”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진에게 장현기와 강재규, 이우진, 김보원이 한마디씩 건넸다. 위로보다는 놀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급기야 추억 속 동요의 가물가물한 가사를 기억해 낸다고 멜로디를 흥얼대던 그들은 스태프가 손짓하자 우르르 몰려갔다.
삐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우당탕 요란한 달음박질이 시작됐다. 이미 제 차례를 끝낸 보원과 이진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맞다, 형. 2위한 거 축하해. 인사를 못 했네.”
보원이 불쑥 말을 걸었다. 3라운드에서 한번 같은 팀이었지만 그때에도 이후로도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 이진은 어떤 톤으로 답해야 할지 조금 망설였다.
“고마워. 너도 안정권까지 올라왔지?”
“응. 이번에 잘하면 14위 안에는 들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그렇게 되면 형이 나 좀 뽑아 줘.”
“……누가 우승할지도 모르는걸.”
“농담이야. 알지?”
보원은 특유의 우직하고 무뚝뚝한 인상의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는 이진이 답하기도 전에 자백하듯 덧붙였다.
“농담이긴 한데,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게 진심이기도 해. 나, 같이 일하기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신하거든. 여태까지 인성으로 문제된 일 없고 특기는 적지만 뭐든지 무난하게 할 수 있어.”
게다가 상위권 멤버들과 캐릭터가 크게 겹치지도 않는다. 그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해 봤자 허동규, 두주형 정도가 다였다. 이진은 눈을 갸름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보원이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잠깐, 오디션 심사 위원처럼 보지 말아 줘. 슬슬 멤버 구성원을 물색할 때가 됐으니까 하는 말이지 형한테 부담주려는 건 아니야. 선승현이랑 한찬우 형한테도 말할 거고.”
“아. 알았어, 미안해. 나도 평가하려던 건 아니고…….”
“아냐, 아냐. 내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지?”
“응, 이해했어.”
그동안 데뷔 멤버의 논의는 지극히 상위권 내에서만 이뤄졌다. 순위가 뒤집히고 대형 기획사 소속 참가자들의 하차설이 돌더라도 은연중에 일정 순위 이하 참가자들은 데뷔 멤버 후보로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존재감이 약한 탓이니 불평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몇 달이고 같이 촬영을 함께하며 동고동락했던 참가자들에게마저 잊힌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데뷔 후보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순위 안에 도달했다면 적어도 시스템 내에서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옳다.
멤버를 선택할 권한을 가질 우승 후보들마저 중위권 멤버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혹시 앞 순위를 제치고 내가 뽑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없다면…… 그들은 정말 상위권 참가자를 꾸며 주기 위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보원은 그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 않기에 이진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 것이다.
‘허동규, 두주형과 비슷한 이미지. 소속사의 힘이 세지 않고, 본인도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는 만큼 절박하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조건인데…….’
시청자들에게 원성을 덜 사기 위해서는 최종 투표 순서대로 멤버를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대형 기획사에서 인지도가 절정에 달한 연습생을 쉽게 포기할 리 없다. 승현에게 들었던 미래 이야기를 종합해 본다면 아마 그룹 활동은 최소화하고, 점점 개인 활동을 늘리다가 최소 계약 기간이 끝나는 즉시 그룹을 해체하고자 할 테다.
이진은 카메라 앞에 서서 어설프게 춤을 추는 우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뒤에서 깔깔대며 웃는 재규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음은 장현기, 그다음은 리웨이. 민서호를 거쳐 마지막은 김보원에게로 향했다.
선승현을 넘어서면 이진은 그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힘을 얻게 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간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머리가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