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54화 (154/173)

154화

승현의 양보가 무색하게도 다음 순위로 이름이 불린 것은 하늘이었다. 다행히 그는 소속사가 시키는 대로 ‘퍼플 러브’를 골랐다.

이진의 이름은 간신히 하늘 다음에 불렸다. 그다음 순위인 민서호나 박희영과 정말 근소한 차이였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주 아슬아슬했지만, 어쨌든 이진은 원하는 곡을 택할 수 있었다.

“저는 ‘Choose one’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진이 마지막 머핀을 고르자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진은 겉으로 태연함을 유지하며 머핀을 들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겨우 한끝 차이였다. 그 한끝 차이로 저들과 함께 한탄하는 처지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도 등골이 서늘했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 승현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곡을 고른 거냐고, 혹시 자신을 배려해서 그런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준 기회를 잡아 놓고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나 싶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녁 촬영 전까지 자유 시간입니다. 4라운드 1위부터 7위까지 일곱 분들은 지금 바로 화보 촬영하러 이동하겠습니다.”

생각이 더 깊어지기 전 스태프가 촬영의 끝을 알리며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연습 벌레인 이진은 4라운드와 5라운드 사이에 휴식기가 없어 예정된 외부 촬영을 위해서 연습 시간을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순위가 높은 것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배부른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라졌다.

참가자들은 스태프가 이끄는 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승합차에 올라타자 자연스럽게 승현이 이진의 옆에 앉았다. 이진은 옆자리에 앉은 승현을 의식하지 않는 척 하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뒷자리에 앉은 다른 놈들이 쓸데없는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어 앞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쓸데없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승현아, 물어볼 게 있는데. 솔로 무대 경연곡 왜 2라운드를 선택했어? 다들 1라운드 곡 노리고 있었잖아.”

“후크송이라서요. 혼자 부르기 어렵잖아요.”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진은 속내를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갸름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승현이 이진을 보고 방긋 웃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게 다야?”

“전 편곡 같은 거 할 능력이 안 돼서 그냥 원곡 그대로 살리기 좋은 걸 골랐어요. 아무래도 음역대가 맞으니까 춤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정말 그게 다야?”

집요하게 묻자 승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곤란할 때면 단어를 고르는 습관이 나왔다. 이진의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네, 그냥 그 곡이 좋아서 이유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너 정말…….”

“야, 야. 그만해라.”

이진이 다시 한번 캐물으려 할 때, 뒷자리에서 찬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안 듣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진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선승현, 너 어제 내가 물어봤을 땐 ‘Choose one’ 할 거라고 했잖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 이진이 형아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착한 승현이가 양보했어요, 하고!”

“아니, 아니거든? 그게 무슨 헛소리…….”

“역시 나 때문에 노래 바꾼 거 맞아?”

“네? 아니에요!”

룸메이트인 찬우가 어제 일을 고발하자 승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한찬우가 먼저 1라운드 곡 할 거라고 해서 그냥 약 오르라고 한 말이에요.”

“웃기시네. 내가 우리 그럼 이제부터 라이벌이냐고 하니까 그냥 같이하면 되잖아, 하고 대답했으면서.”

“선승현, 너……!”

“아니, 이진 형. 한찬우 말은 믿고 제 말은 못 믿어요?”

이진과 승현, 찬우가 입씨름을 하자 뒷자리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승현이 무어라 더 해명하려고 입을 열 때, 절묘한 타이밍에 목적지에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촬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인지 차에 올라타고 고작 20분이 흘러 있었다.

채 마무리되지 않은 갈등에 이진과 승현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차에서 내렸다.

“한찬우 적당히 끼어들어.”

“쓰읍, 승현아. 형한테 한찬우가 뭐니, 한찬우가. 이진이한테는 형 소리 꼬박꼬박 붙이고 깍듯이 존댓말까지 쓰면서 인마.”

“그러게. 전부터 궁금했어. 승현이 형 대체 왜 이진 형한테만 존댓말하는 거야?”

하늘과 찬우가 짜증스러운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놀려 댔다. 승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이진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이진아!”

“선승현, 너 말 놓기만 해 봐.”

“……저러는데 어떻게 반말을 써.”

이진이 으름장을 놓자 승현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구시렁거렸다. 동료들은 또 두 사람을 구경거리 삼아 즐겁게 웃어 댔다.

길가에 차를 대고 조금 걸어 도착한 곳은 주택형 스튜디오였다. 평범한 주택을 개조해 방마다 여러 콘셉트로 인테리어를 꾸며 놓고 일정 시간 동안 장소와 소품을 대여하는 곳인데, 화보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스튜디오에 들어가자 촬영을 함께할 젊은 직원 여럿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녀들은 윈올의 애청자인지 참가자들을 보자마자 ‘꺄아!’ 하고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중 홀로 카메라를 잡고 이리저리 배경에 셔터를 눌러 대던 여성 한 명이 고개를 돌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을 담당할 포토그래퍼 연희입니다.”

참가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다시 환호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완전 응원하고 있어요.”

“다들 힘내세요! 아, 의상은 이걸로 갈아입으시면 돼요. 탈의실은 저쪽에 있어요.”

목소리 톤부터 방송국 스태프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원래는 마케팅 팀 직원들이라는 그녀들은 밝은 분위기를 내뿜으며 다가와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한 벌씩 건네주었다.

“우리 현장 중 최고예요. 여태까지 작업했던 모델 중에서도 최고, 최고! 역대급이야, 진짜. 조명 없어도 그냥 막 빛이 나.”

“지금 온 분들이 7등까지인 거죠? 완전 스포당했어…….”

“아, 김 대리님 저번 달에 퇴사했는데 배 아파서 어떡해요.”

“누가 우리만 두고 퇴사하랬냐고! 이따 인증 샷 찍어서 보내 주자. 더 배 아프게.”

“진짜 이래서 연예인 하나 보다 싶어요. 그냥 걸을 때마다 포스가 철철 흐르는데…… 어후! 어떻게 여태까지 일반인이었지?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건지, 나였으면 거울 볼 때마다 억울해서 뒷목 잡았을 것 같아요.”

탈의실에 가서도 들뜬 목소리는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옷을 다 갈아입은 이진은 곧바로 나가지 않고 탈의실 문 앞에서 뜸을 들였다. 홀로 나갔다간 저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릴 것이라는 생각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필 선승현이랑 껄끄러울 때…….’

이곳에서 한 행동이 고스란히 목격담이 되어 인터넷에 올라가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책이 그 뒤를 따라왔다.

‘요새 너무 카메라 의식도 안 하고 편하게 지내긴 했지.’

그때, 승현이 등 뒤로 다가와 손을 쑥 뻗어 탈의실 문을 열어 버렸다.

“뭐 해요, 안 나가고.”

뻔뻔한 목소리로 덧붙인 승현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진을 툭 몸으로 밀고 유유히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쏠리는 관심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이진은 분한 얼굴을 최대한 숨기며 승현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 촬영 콘셉트는 4라운드 연장선이에요.”

모두 자리에 모이자 포토그래퍼는 간단히 촬영 콘셉트를 설명했다. 고등학교 교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에서부터 감이 왔다. 이진은 여기 모인 이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본격적으로 학창 시절의 풋풋함과 순수함, 그리고 무르익은 우정을 연기해야 한다.

이진은 설명을 듣는 내내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봤지만, 포토그래퍼가 말하는 수식어와 비슷한 기억은 한 조각도 건질 수 없었다. 사진은 협찬 브랜드의 하반기 룩 북에 실린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룩 북이 뭔지도 잘 몰랐고, 협찬사가 어떤 물건을 파는지도 잘 몰랐기에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해 지기 전에 책상이랑 창가에 앉아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찍고, 계단으로 이동했다가 다음은 정원까지 갈게요.”

포토그래퍼는 일정표와 콘티를 팔랑팔랑 넘기며 시간을 배분하는 듯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동안 참가자들은 다른 직원들의 요구에 따라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금 전까지 연예인을 처음 본 사람처럼 흥분에 겨워 있던 직원들은 어느새 프로다운 얼굴로 돌아가 진지하게 업무를 보았다. 몇몇은 직접 카메라를 손에 쥐기도 했다.

이진과 하늘은 의자에 반듯이, 그리고 승현은 이진의 책상 위에 비스듬하게 걸터앉아 달란 지시를 받았다. 찬우는 아예 창틀에 앉았고, 제이슨이 그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섰다. 지흔과 우진은 그들 틈 어딘가에 적당히 서서 대걸레와 칠판지우개 소품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자, 지금은 점심시간 끝나기 5분 전이에요. 다들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있어요. 방긋! 나는 막 재미있고, 활기차고, 옆에 있는 친구가 너무 좋아.”

포토그래퍼의 디렉팅과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이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상황 설정을 크게 읊어 주는 목소리 사이로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메인 카메라 한 대와 서브 카메라 여러 대가 각자 소리를 내며 여러 각도에서 그들을 찍어 댔다.

“자, 승현 씨랑 하늘 씨는 사이가 아주 좋은 친구예요. 그런데 승현 씨가 하늘 씨랑 떠든다고 이진 씨 책상 위에 앉은 거야. 그래서 이진 씨는 이게 좀 짜증 나. 좋아요, 그 표정 그대로 감정 살려서 살짝 노려볼게요.”

이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디렉팅을 소화하기 위해 충실히 연기에 임했다. 그런데 그와 살짝 눈이 마주친 승현이 참지 못하고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포토그래퍼는 표정이 자연스럽고 좋다며 칭찬을 했다.

“찬우 씨, 자유를 갈망하듯이 창밖을 바라볼게요. 그리고 옆에 제이슨 씨, 나는 이 교실이라는 감옥을 벗어날 거야 하는 생각을 계속해 주세요. 죄수복 이거 다 찢어 버려. 아니, 진짜 찢으라는 건 아니고 그런 기분이라고요. 감정은 아주 좋아요.”

포토그래퍼의 목소리는 마법같이 초보 모델들을 통솔했다. 그 뒤로도 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상황을 바꾸어 가며 촬영이 이어졌다. 이번 촬영에서 이진과 승현, 그리고 하늘은 한 세트로 묶인 듯했다. 마찬가지로 찬우는 제이슨과, 우진은 지흔과 붙어 다녔다.

이진은 첫 장면 이후로 창가에 기대어 하늘과 대화하는 승현을 커튼 뒤에 숨어 훔쳐보거나 계단에 주저앉아 하늘과 티격태격하며 장난을 치는 승현을 한 계단 위에서 바라보는 연기를 했다. 마치 짝사랑 상대를 몰래 지켜보는 듯한 묘한 구도였다.

정원에 나가서도 한 송이 꽃을 꺾어 등 뒤에 감춘 채 나무에 기대어 잠든 승현의 곁을 맴돌고 있으려니 이진은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 대체 무슨 이미지인 거야? 방송을 봤으면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나?’

반면 승현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그냥 이 상황을 즐기는 건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쨌든 친한 사람들과 세트로 촬영을 하니 속은 편해 보였다.

“자, 인조 잔디니까 벌레 걱정 말고 털썩 누워요.”

정원 잔디에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자유 포즈를 찍는 것이 마지막 촬영이었다. 바쁜 일상 속 찾아온 잠시의 휴식.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잠이 솔솔 찾아온다는 지시를 듣고 이진은 곧장 눈을 감았다. 해가 긴 계절, 태양은 살짝 비스듬히 기울었지만 저녁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눈을 감아도 환한 빛이 느껴졌다.

그때 눈꺼풀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이 무언가에 가려진 듯 시야가 어두워졌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했나. 이진은 태평하게 생각하며 더는 눈이 부시지 않아진 것에 기뻐했다.

“어머, 너무 좋다! 그대로 고개만 살짝, 옳지. 아주 좋아요.”

포토그래퍼는 연신 ‘좋아요’를 남발하며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기계음이 한동안 울리고 드디어 촬영 종료 사인이 떨어졌다. 이진은 기다렸다는 듯 반짝 눈을 떴다.

“아, 진짜 잠든 줄 알았네.”

파란 하늘이 아닌 누군가의 손바닥이 보였다. 이진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자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는 다정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승현이 보였다. 그제야 일련의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가 촬영 내내 이진의 눈가에 손차양을 만들어 준 것이다.

놀란 이진이 눈을 살짝 크게 뜬 순간, 셔터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죄송해요. 방금 장면 너무 근사해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며 포토그래퍼가 웃으며 사과했다. 승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진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근사한 장면 속에 담긴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차마 짐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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