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이진은 승현에게 순위가 한참 밀리는 부족한 라이벌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대등한 위치에서 1위를 다투게 되었다. 여러 논란과 위기를 겪은 끝에 기울어진 추는 수평을 이루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기나 비중, 개성 무엇 하나 뒤지지 않는 호각의 상대로 거듭났다.
적절한 시기에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는 과거사가 터진 덕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순위가 단숨에 이만큼이나 상승한 게 오롯이 이진의 실력 덕분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으니까.
객관적으로 PD의 전략이 먹혀 들어간 것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비록 사전 동의도 없었고 이진이 기피하던 방법으로 진행된 촬영이지만, 어쨌든 그런 극적인 연출이 그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사실이므로.
“1위 후보에 오른 두 사람은 그동안 1라운드의 룸메이트, 그리고 같은 팀 멤버로서 친분을 다졌습니다.”
아무리 숨기고 부정하려 노력해도 과거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과거까지 모두 합쳐 지금의 이진이었다.
동정받기 싫다면 감히 동정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면 된다. 동정심 때문에 투표수를 많이 얻은 것 같다면 그 사람들마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면 된다. 예전과 같은 마음가짐이라도 홀가분한 정도가 달랐다. 악에 받친 외침이 아니라 확신을 가진 다짐이었다.
이번 라운드를 전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줄곧 피해 왔던 진실들을 마주했고, 차근히 자신을 되돌아본 끝에 눈치챈 속마음도 있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 이진은 한층 명확히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늘 사이좋아 보이던 두 사람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한때의 갈등이 공개되었죠. 누군가는 배신감을, 누군가는 실망감을 느꼈지만 논란의 중심에서도 두 참가자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크린 속 승현이 슬쩍 고개를 돌려 이진을 바라봤다. 이진도 그가 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며칠 전 들은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선명히 울렸다.
‘마지막 라운드잖아요. 서로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해요. 그다음에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없이…….’
솨아아아. 큰 바람이 불어 말끝이 흐려질 때, 승현은 주위를 둘러본 뒤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이진의 이마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올 해 가장 뜨거운 라이벌입니다. 단연코 이번 여름의 주역이 될 영광의 1위는 바로…….”
흥분에 고조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크게 울려 퍼졌다. 이진의 머리를 뎅뎅 울릴 만큼 격양된 소리였다. 한순간 시야가 좁아져 한 점으로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선승현 참가자 입니다. 축하합니다!”
승현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이진은 이미 승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승현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놀란 듯 살짝 크게 뜨인 눈꺼풀, 이진을 향해 돌아오는 새까만 눈동자. 가지런한 눈썹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늘 굳게 맞물려 있던 두 입술은 살짝 벌어졌다.
멍한 표정을 짓던 승현은 이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약 올리거나 놀리려는 속셈 없이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온전한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 순수한 미소였다. 공방이 끝난 뒤 대기실 복도에서 보였던 미소와 같았다.
“두 사람의 시청자 투표수는 정말 한끝 차이로 1위와 2위를 나눈 점수 차는 대부분 팀 점수에서 나왔습니다. 유이진 참가자, 단숨에 1위의 뒤를 바짝 추격하게 되었어요.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진에게 먼저 마이크가 쥐어졌다. 앞서 찬우와 하늘의 청산유수인 소감을 보며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어떤 말을 할지 생각해 보았으나 막상 마이크를 손에 쥐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 그게…….”
“유이진, 팬 서비스는 잘만 하면서 순진한 척하지 마라!”
어디선가 악의 없는 농담조의 야유가 들려왔다. 이진은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한결 가볍게 입을 뗐다.
“4라운드 방송이 나가고 정말 많은 분들에게 걱정을 받았습니다.”
이번 소감은 오롯이 순위에 대한 감상과 각오일 수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진이 2위를 하게 된 배경에 동정표가 깔렸을 것을 예상한다. 이진도 그를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동정만 받은 채로 끝낼 생각은 없기에, 언제까지고 상처를 부여잡고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기에 담담히 자신이 느낀 사실을 이야기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신 덕분에, 꿈을 이뤄 가는 과정에 서 있습니다. 큰 행운이죠.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절 지켜봐 주셨던 분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긍정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진은 후련한 마음으로 카메라 너머, 이진을 바라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봐 오신 유이진입니다. 제게 어떤 모습을 비춰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그것은 시청자를 향한 인사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이진은 싱긋 미소 짓고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제게 2위라는 쾌거를 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하자 곳곳에서 큰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스크린 앞에 선 사회자 홍서도 마이크를 쥔 채 손을 마주쳤다.
제작진이 바라던 감동 드라마는 훌륭히 완성되었을까? 짧은 감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이진은 제작진에게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짜인 각본을 뛰어넘을 작정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연속으로 1위를 거머쥔 선승현 참가자의 소감을 들어 보겠습니다.”
승현과 함께라면 불가능하기만 한 꿈도 아니었다.
***
21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참가자는 임채일이었다. 물론 실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여러 참가자와 척을 지고 지내면서도 매번 아슬아슬한 순위로 붙어 용케도 살아남는다 싶었다.
박준현은 22위, 남주헌은 24위, 장조근은 25위로 이번 라운드를 끝으로 하차하게 되었다. 한 끗 차이로 떨어진 박준현은 스튜디오를 나가며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하늘이 네가 가서 달래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곧 촬영 시작이기도 하고, 어차피 우리 소속사 후배 연습생들이 마중 나왔을걸.”
미열이 묻자 하늘이 무심히 답했다.
“안 그래도 쟤 때문에 싸잡혀서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차가운 목소리에서 지겨움이 묻어나왔다. 이진이 눈동자만 굴려 박준현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앞으로 저 지긋지긋한 얼굴들을 안 봐도 된다고 하니 속이 시원했지만 통쾌하지 않은 퇴장에 괜스레 입이 썼다.
탈락자들이 스튜디오를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5라운드 촬영이 시작되었다. 감정을 추스를 여유는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5라운드의 컨셉은 ‘최고의 무대’입니다.”
5라운드의 미션은 1라운드부터 4라운드까지 공연했던 곡을 하나 선택한 뒤 솔로 버전으로 리메이크하여 새로운 무대를 꾸미는 것이다. 오롯이 자신의 실력만으로 하나의 곡을 완벽히 소화하여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이번 콘셉트인 것이다.
그와 별개로 21명의 참가자 전원이 함께 만드는 합동 무대의 준비도 해야 했다. 합동 무대의 경연곡은 ‘우리 또 만나’라는 제목으로 여름 방학을 앞두고 친구들과 아쉽게 헤어져야 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밝은 곡이었다.
“안타깝게도 모든 참가자가 무대에 설 기회를 얻지는 못합니다.”
이번에도 공방까지는 2주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무대를 완성시켜야 하는 시점은 딱 일주일 뒤였다. 참가자들은 일주일간 개인 무대를 준비한 뒤 라이브 무대를 촬영한다.
촬영된 무대 영상은 5일간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시청자들의 사전 투표를 받고, 그곳에서 선발된 상위 10명의 멤버만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각 참가자들의 득표율은 블라인드 처리되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남은 14명 중 공연할 3명을 참가자들간 투표로 결정하고, 또 남은 11명 중 3명을 추첨으로 결정한다.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이가 총 8명인 셈이었다.
‘이번에도 노골적이구나.’
승자를 빛내기 위해 패자의 비참함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제작진의 방식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마지막 라운드, 끝내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보이지 못한 채 긴 도전을 끝내야 한다. 그동안 자신을 지켜봐 준 시청자와 여태까지 함께해 온 동료의 손에 의해 결과가 결정된다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선심 쓰듯 추첨으로 3명을 추가로 뽑아 봤자 운마저 따르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게 될 뿐이었다.
역전을 꿈꿀 최후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참가자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미련이 남을까, 짧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졌다.
“약속대로 4라운드 1위부터 7위까지는 음악 방송 출연과 웹 매거진 인터뷰, 그리고 화보 촬영이 제공됩니다. 모든 일정은 2주간 진행됩니다.”
설명이 이어졌다. 4라운드 데뷔권 멤버들을 향한 혜택은 다시 들어도 정말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2주 안에 저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보다는 눈앞이 캄캄했다.
4라운드는 참가자마다 연습한 곡도, 포지션도 다르기 때문에 음악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선 새로이 조율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음방 무대는 1위인 승현이 공연했던 핑크반 댄스 포지션 무대일 테니 이진의 입장에선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익혀야 하는 것이다.
“가장 빛나는 별, 하늘 높이 떠오를 당신의 스타를 응원하세요. Winner takes all!”
성우의 상투적인 멘트와 함께 5라운드 오프닝 촬영이 끝났다. 대다수의 참가자는 스태프 지시하에 일제히 버스를 타러 주차장으로 내려갔지만, 4라운드 1위부터 7위까지는 곧바로 이어질 웹 매거진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남았다.
자리에 남은 7명은 인터뷰용으로 따로 빼 둔 소품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각자 핸드폰을 했다. 서로 썩 친하지 않기 때문인지 분주하게 세트를 철거하는 스태프들 틈바구니에서 그들이 모인 자리만이 유난히 조용했다.
“갈수록 빡세지네.”
“데뷔하면 이것보다 바빠질 거잖아. 예행연습이라 생각하자.”
지흔의 혼잣말이 침묵을 가르자 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나마 사교성이 좋은 이들이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지흔이 그에 무어라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 때, 찬우의 핸드폰이 지잉 진동했다.
“아, 엄마다.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찬우가 모처럼 트인 대화의 물꼬를 무참히 짓밟으며 자리를 떠났다. 제일 말이 많은 멤버가 사라지고 나니 다시 썰렁한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쓸데없는 대화라도 오고 갔겠지만 다들 정신적으로 지친 탓인지 내심 조용히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그건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하다 하더라도 이런 고요한 상황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는 부류가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바로 이우진이 그런 부류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저번 주말에 같이 영화 보러 간 거 정말이야?”
우진이 승현과 이진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진과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승현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