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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패배-148화 (148/173)

148화

솔직히 승현이 우진에게 한소리 할 줄 알았다. 이진은 우진에게 큰 호감이 없기도 하고, 크게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사생활을 언급하는 건 불쾌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 잘 생각해 보면 승현은 지금까지 우진에게 제법 상냥했던 것 같다.

“누가 그래?”

되물어보는 목소리가 부드럽기까지 했다. 친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대개 사무적이고 건조한 태도를 유지하는 승현이다. 그런 그가 썩 내키지 않을 질문을 받고서도 호의적으로 답하다니, 어쩐지 이진은 기분이 상했다.

“응. 인터넷에 목격담 올라왔던데 진짜인가 싶어서.”

“정말이야?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진에 이어 하늘도 관심을 보였다. 지흔도 대놓고 시선을 승현에게 고정하며 관심을 드러냈다. 제이슨은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관심 없는 듯 굴었지만, 그의 모순된 언행을 대강 구분할 수 있게 된 이진의 눈에는 내심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게 분명히 보였다.

“둘이 화해했어?”

“비밀이야.”

“뭐야, 똑바로 말해.”

그러나 우진과 하늘이 추궁해도 승현은 애매모호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이렇게 물어봤다.

“어때 보이는데?”

“뭐가?”

“나랑 형이랑 사이좋아 보여?”

하늘이 황당한 질문을 들었다는 양 눈살을 찌푸리자 승현이 재차 물어봤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하늘 네 눈에는 어때 보이는데? 막 주말에 단둘이 만나서 영화 보러 갈 것 같고 그래?”

“아, 진짜. 왜 이렇게 말을 빙빙 돌려서 해? 기분 나쁘게.”

“빨리 대답해 봐.”

집요하게 묻자 하늘이 끄응 하고는 곤란한 소리를 냈다. 이진은 수준 낮은 대화라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함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승현 형이 같이 영화 보러 가 달라고 졸랐나?”

“그렇게 보여?”

“형이 평소에 이진 형을 좀 귀찮게 했어? 그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럼 이진 형은 내가 조르면 들어줄 것 같나 봐?”

“뭐? 아, 진짜!”

끝나지 않는 꼬리 물기에 기어이 하늘이 짜증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현은 실실 웃으며 얼른 대답해 보라고 재촉했다. 그때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구경하고 있던 우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그래 보여. 이진 형 다정하고 은근히 무른 사람이니까.”

말 속에 미묘한 가시가 숨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콕 집어 지적하기에는 애매한 말이라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승현이 다시 우진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도 미묘한 차이를 느꼈는지 바라보는 눈빛이 썩 곱지 않았다.

승현이 우진의 말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아 살짝 거북한 정적이 내려앉기 직전, 지흔이 다소 황당한 발언을 하며 끼어들었다.

“이진이 형이 무르다고? 완전 기계던데, 기계. 넘어지면 퍽 소리가 아니라 깡 하고 쇳소리 날 것 같잖아.”

이번에는 이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황당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난생처음 들어 보는 평가였다.

“뭐?”

“아니, 형. 근데 솔직히 연습할 때 우리 학원 쌤보다 무섭긴 하거든. 계획한 만큼 안 하면 절대 쉬는 시간도 안 주고, 조금 실수한 것도 안 봐주고…….”

“내가 언제!”

물론 빠듯한 연습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다소 빡빡하게 군 면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그조차 모자라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리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묘한 눈빛으로 이진을 쳐다보는 통에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눈에는 딱딱하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 이진 형이 엄격하긴 해도 기계까진 아니지. 강지흔 네가 체력이 너무 없는 거라니까?”

“나 수능친 지 이제 겨우 반년 지났단 말이야! 체력이 약할 수밖에 없지!”

“핑계는. 그렇게 따지면 나는 아직 고3이거든?”

“학교도 안 나가면서 무슨!”

고된 연습 일정에 익숙한 하늘이 이진을 옹호하고 나섰으나 큰 도움은 되지 않고, 어느새 동갑내기인 지흔과 티격태격하는 중이었다.

얼결에 불편한 화제가 유야무야된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추궁했다면 승현이 대체 어떻게 대답했을지 궁금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친해 보이냐고 물어본 것일까? 그리고 우진은 왜 승현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진이 누구에게나 무르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 준 것이라는 듯이 말한 걸까?

한동안 더 시답잖은 대화가 오고 갔다. 전화를 마친 찬우까지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을 무렵, 서넛의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바삐 돌아다니며 장비와 세트를 철거하는 스태프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우선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활동성보다는 격식을 중시한 세미 정장을 입고 있었고, 몇 달 동안 고된 노동에 시달려 죽어가는 스태프들에 비하면 표정도 훨씬 밝았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인터뷰어 연예 온 타임 편집자 김예슬입니다.”

경쾌한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온 사람들은 4라운드의 부상인 웹 매거진 인터뷰를 진행할 잡지사의 편집부였다. 자신을 김예슬이라 소개한 여자의 뒤로 선 사람들은 DSLR 카메라나 삼각대 같은 장비들을 들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진과 승현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더 좋은 곳으로 모시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현장감을 살리고 싶어서 이곳에서 인사드리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니 긴장은 덜 하시겠죠? 아니, 반대인가? 하하하! 피곤하실 테니 바로 인터뷰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단 몇 마디 만에 대화의 흐름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엉거주춤 서있는 틈에 동료들에게 손짓해 의자의 위치를 잡고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어디 보자, 이게 인터뷰 용지니 촬영 전에 미리 읽어 보세요. 인터뷰 시작부터 끝까지 영상 촬영을 하긴 할 건데, 여러분 모두 매력적으로 나오도록 편집할 거예요. 인터뷰는 글로도 한번 정리될 거고요. 아참, 자유롭게 앉으셔도 돼요. 이번만큼은 순위나 인기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친한 분들과 앉으세요.”

그러자 승현이 망설이지 않고 가장 오른쪽 끝으로 가서 앉았다. 1위를 위해 가운데 자리를 비워 둘까 봐 눈치껏 배려한 것이다. 이진은 슬쩍 승현의 눈치를 보며 그 옆에 가서 앉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승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제 옆에 앉으면 우리 너무 사이 좋아보이는거 아니에요?”

“……인터뷰에서 시비 걸든지.”

이진이 고개를 돌리며 샐쭉하게 답하자 승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진이 옆자리 내 거! 하늘이 부럽지?”

“어이구. 애야, 애?”

털썩, 이진의 남은 옆자리는 찬우가 차지하고, 하늘이 찬우를 장난스럽게 타박하며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지흔, 우진, 제이슨이 순서대로 착석했다. 카메라와 조명이 설치되자 곧장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 그럼 첫 번째 질문 갑니다. 참가자들 중 방송과 실제 모습이 가장 차이나는 사람은?”

인터뷰는 윈올 촬영장의 비하인드 일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질문 하나에 팀원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짧게 답하고 그중 흥미로운 답에 대해서 몇 마디 추가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었다.

“여기 있는 멤버들만 지목하는 건 아니죠? 그럼 전 희영 형이요. 방송에선 엄청 밝게 나오는데 실제로 보면 조용하고 속도 깊어요. 저랑 고작 한살 차이 나면서 엄청 의젓한 느낌?”

“저는 찬우 형이요. 방송에서 너무 어른스럽게 나와요!”

“얌마, 그게 내 진정한 모습이야!”

“이 형 완전 또라…… 괴짜예요!”

왼쪽부터 순서대로 답을 했기에 이진의 차례는 다소 늦게 찾아왔다. 이진은 그동안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재미있는 답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어, 음. 죄송합니다. 제가 방송을 잘 안 봐서요.”

“그러시군요. 사실 팬분들은 이미 이진 씨가 디지털 생활과 거리가 멀다는 추측을 하고 계세요. 이것도 모르시겠죠?”

“그런가요? 네, 몰랐어요.”

살짝 장난기가 묻어난 말에 이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인터뷰어는 그런 점이 매력 포인트라며 좋게 넘어가 주었다.

다음 차례는 승현이었다. 승현은 원체 말을 길게 하지 않는 성격이고 그동안 진행됐던 인터뷰에서 썩 재치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기에 이번에도 그의 대답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는데, 불현듯 예상외의 답변이 들려왔다.

“전 이진 형이요.”

“어? 제가 보기엔 방송이나 실제 모습이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형은 방송에서 굉장히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아니거든요.”

갑자기 이진의 실체를 폭로할 것처럼 운을 뗀 것이다. 여기저기서 호기심에 찬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진이 고개를 홱 돌려 무슨 말을 할 작정이냐 눈으로 물었지만 승현은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형은 엄청 자주 발끈하거든요. 맘에 안 드는 일 있으면 투덜대기도 엄청 투덜대고, 저번에는 어땠냐면…….”

“선승현! 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이진은 화들짝 놀라서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승현은 방금까지 하던 말을 번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형은 보이는 모습 그대로예요.”

“방금 모습은 의외였던 것 같기도 하네요. 이진 씨랑 승현 씨 두 분 다요.”

그 후로도 승현은 여러 질문에 이진을 언급했다. 그때마다 이진은 승현이 충동적인 발언이라도 할까 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그가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인 건 알지만, 지금 이런 까불대는 행동도 평소에 본 적 없었던지라 여기서 어디까지 무모하게 굴지 걱정됐다. 그런 마음을 담아 하지 말라고 팔뚝을 퍽퍽 때려 봐도 승현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릴 뿐 이진을 괴롭히듯 들먹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진 씨랑 승현 씨는 사이가 굉장히 좋으신 것 같아요.”

결국 승현의 꾸준한 헛소리에 대한 이유를 묻듯 질문지에 없던 질문이 돌아왔다. 다행히 인터뷰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 것 같지는 않았다. 인터뷰어의 얼굴에는 세상에 꺼내 놓으면 괜찮을, 관심이 끌릴 법한 새로운 화젯거리를 캐내기 직전의 기대가 묻어 있었다.

“원래 선승현이 이진이를 좀 많이 좋아하긴 해요.”

질문에 대한 답은 찬우에게서 먼저 나왔다. 승현은 첨언하지 않고 비죽이 입꼬리만 올렸다.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모습이었다. 인터뷰어의 시선을 받은 이진은 결국 이 상황에 대해 해명할 수 밖에 없었다.

“승현이가 가끔, 제 관심을 필요로 하는 건 맞아요. 처음에는 좀 황당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요.”

“아, 그럼 승현 씨가 이진 씨를 굉장히 특별하게 여기나 봐요.”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노골적인 질문에 간신히 답하고 나니 양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둘러대도 되었을 걸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 기분이었다.

‘나도 참 답이 없다.’

합의되지 않은 돌발 행동에 화가 나는 게 순서 아니었을까, 이진은 생각했다. 적어도 안전한 방식을 추구해 왔던 그의 본능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콩콩 두근거리는 심장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방금까지 곤란하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승현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힌 데에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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