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46화 (146/173)

146화

끼이익, 쾅.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이진은 개어진 이불 위로 무너지듯 몸을 눕혔다.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다. 눈가는 눈물에 젖은 채 말라 따끔거렸고 먼지 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목도 아파 왔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을 만큼 피곤하고 지쳤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잠은 금방 찾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점차 또렷해지는 정신에 이진은 한참을 누워 있다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뒤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잠이 안 와.’

몸은 당장에라도 잠들고 싶어 안달인데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 누워서도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이진은 결국 가방을 뒤져 네모난 상자를 꺼내 왔다. 아까 승현과 헤어지기 전에 떼를 쓰듯 받아 낸 물건이었다.

‘네가 당장 사귀는 게 아니라 시간을 갖고 천천히 진도를 나가자고 하는 이유는 알겠어.’

‘별로 납득한 표정이 아닌데요?’

‘당연하지. 원래 연애 감정이라는 건 화르륵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사그라들기도 하는 거잖아. 어떤 감정들에는 유효 기간이 존재해. 나는 네가…… 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필요해.’

이진의 진지한 말에 승현은 멋쩍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냈다. 누가 봐도 프로포즈용 반지 케이스인 그것이었다.

‘형, 아까부터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한데. 이거 반지 아니에요.’

‘그럼? 목걸이?’

‘액세서리도 아니에요.’

승현은 제 손으로 직접 상자를 열어 이진에게 보여 줬다.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르골이었다.

‘아까 형 화장실 갔을 때 산 건데요. 형 생각나서 산 건 맞는데, 막상 주려고 보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말았거든요. 생긴 것도 반지 케이스 같고.’

오르골은 작은 크리스털 꽃이 장식된 태엽을 직접 돌리면 녹음된 노래가 흘러나오는 종류였다. 이진이 그 자리에서 태엽을 돌리려던 걸 승현이 간곡히 만류하여 우선 가방에 넣고 돌아온 것이다.

‘방송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듣지 말아요. 알았죠? 약속이에요. 형 표정 보면 들었는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절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승현이 엄포를 놓아서 그런지 차마 태엽 위에 올린 손가락을 돌릴 수가 없었다. 푸흐흐, 입술 틈으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진은 투명한 빛의 크리스털 꽃을 가만 바라봤다. 만송이의 장미보다 이 가짜 보석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시간이 흘러 감정이 희석되는 일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면 다시 태엽을 돌려 오르골을 재생시키면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도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승현을 만난 건 며칠 뒤 4라운드 최종 순위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첫 순위 발표날, 백여 명을 한데 수용하느라 비좁았던 촬영장이 이제는 널찍하게만 느껴졌다.

“지금부터 순위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다 보니 순위 발표마다 마이크를 잡게 된 홍서였다. 반복 학습이 된 탓인지 부드러운 어조임에도 바짝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덧 순위 발표도 네 번째 차례가 되었고 이제 참가자들의 앞에 남은 것은 마지막 라운드, 단 하나뿐이었다.

“20위부터 발표합니다. 이 참가자는…….”

홍서는 대본을 보며 참가자들을 하나둘씩 호명했다. 스크린에 잡히는 참가자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존했지만 순위가 떨어져 아쉬운 얼굴을 하기도, 순위가 높아질수록 희망을 잃고 얼굴에 어둠이 드리우기도 했다. 공통점이라고는 어떻게든 미소를 짓기 위해 끌어올린 입매와 그럼에도 역력히 느껴지는 긴장감이었다.

하지만 이진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낮은 순위에서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호명이 늦어질수록 순위가 안정적으로 확보되는 중이라는 뜻일 뿐 이름이 불리지 않을 걱정은 물론 예상보다 일찍 불릴 걱정도 없었다.

바로 어제, 시청자 투표가 마감하기 직전 이진은 한동안 1위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홈페이지에 공개되는 실시간 투표수는 기간 내 누적계가 아니라 10분 단위로 초기화되기 때문에 잠깐 이름이 오른 정도로는 순위를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투표 화력이 한 번에 몰리는 마감 직전, 한순간이 아니라 제법 긴 시간 1위를 지켜 냈다. 이번에 이진의 팬들이 이를 갈고 투표에 참여한 것은 불 보듯 뻔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변수는 1위와 4위의 팀 점수 차이가 최종 등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였다.

“다음은 16위입니다. 탁 트인 하늘처럼 쾌청한 목소리가 트레이드마크인 참가자죠. 이번 라운드에서는 강력한 보컬을 가진 참가자들과 한 팀이 되어 안 밖으로 고군분투했단 평을 들었습니다. 16위, 최강희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이진과 같은 팀이었던 최강희는 저번 순위보다 두 계단 상승했다. 같은 팀의 이진연도 28위에서 19위라는 쾌거를 누렸다. 반면, 마지막까지 팀을 삐걱거리게 만든 박준현은 아직도 이름이 불리지 않고 있었다.

일관성 없는 순위 차에 이진은 이번 라운드의 팀 점수가 순위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다. 고작해야 시청자 투표수가 비슷한 경우 딱 한 계단 정도 차이가 나지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탈락 위기에 놓인 참가자라면 그마저도 아쉽겠지만 상위권 참가자들에게 큰 의의는 없었다. 높아 봐야 그들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14위입니다. 5라운드에서는 최종 14위 안에 들어야 1위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5라운드 생존 커트라인의 주인공은, 바로 김보원 참가자입니다.”

13위에는 두주형, 12위에는 박희영, 11위에는 리웨이가 이름을 올렸다. 허동규는 한 계단 하락했지만 다행히 10위권 내에 머물렀고, 줄곧 10위권 밖에서 머물던 백미열이 9위로 첫 10위권 진출에 성공했다.

“축하해.”

이진이 미열을 향해 작게 벙긋댔다. 감격에 젖어 있던 미열이 이진을 보고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7명만이 데뷔할 수 있다. 대형 기획사 출신 참가자들이 자진 하차를 할 거라는 추측에 따르자면 10위권 진입자 정도가 아슬아슬하게 데뷔 커트라인이다. 하지만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데뷔를 확정짓기 위해선 최소 7위권 내에 안착하는 게 좋다.

만약 미열이 7위 안에 들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미열의 손을 놓아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6위, 제이슨 리 참가자. 래퍼 포지션을 뚝심 있게 지키는 참가자 중에서 유일하게 상위권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축하합니다.”

8위 강재규, 7위 강지흔에 이어 6위에는 제이슨이 이름을 올렸다. 폭행 논란으로 인해 저번 라운드에서 떨어진 순위가 이전 라운드를 기점으로 조금씩 상승 중이었다.

제이슨은 방송 수위를 넘나드는 독설과 정제되지 않은 거친 캐릭터성으로 제법 탄탄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었다. 만약 같은 래퍼 포지션의 김진영이 남아 있었다면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했을 수도 있지만 진영이 떠난 지금, 특정 취향을 가진 시청자들의 지지를 공고히 받고 있기에 5라운드에서도 무리 없이 상위권에 오를 거로 예상됐다.

하지만 과연 그와 함께 데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득일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감이 들었다. 그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 불같은 성정을 지녔다. 과연 그가 데뷔를 한다고 제 성질을 누르고 제대로 된 처신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진은 확신이 없었다. 부딪쳐 보니 예상외로 과하게 솔직해서 그렇지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한 번 더 문제를 일으키면 순위고 뭐고 뽑지 않는 게 맞겠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이진 자신도 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사실 멀찍이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내면의 변화는 사소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이처럼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뼈저린 자기 성찰을 한 이진의 변화조차 사소할진데 아직 제 행동에 대한 반성을 보이지 않는 제이슨에게 희망을 걸어 무엇할까.

‘논란은 최대한 피하는 게 맞아.’

이진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제이슨을 바라보며 냉정히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은 5위입니다. 저번 라운드에서 비약적인 순위 상승을 보여 주었죠. 5위, 이우진 참가자.”

우진은 이진이 올라간 만큼 한 계단 내려왔다. 우진은 이진의 추월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좌우를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그와도 눈을 맞추며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정말 쟁쟁한 참가자들만 남았네요. 1위 후보들의 얼굴, 보여 주세요!”

홍서가 카메라를 향해 손짓하자 4분할 된 스크린위로 하늘, 찬우, 승현, 이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 사람 모두 얼굴에 긴장감보다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눈빛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이진은 처음 오르는 자리지만 이 세 사람은 늘 TOP3 소리를 들으며 이 자리를 공고히 지켜 왔다.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자신할 만했다. 그리고 굳이 4위를 발표를 뒤로 미루고 넷의 얼굴을 띄웠다는 것은 그 의미가 명백했다.

“네 후보들 모두 1위를 거머쥘 자격이 충분하단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시청자분들이 이들 중 누구의 손을 들어 주었는가가 되겠죠.”

엄숙한 목소리에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정면으로 비췄다.

“4위입니다. 준비된 아이돌, 완성된 아이돌, 누구보다 아이돌다운 아이돌이죠. 그러나 이번엔 안타깝게 순위 방어에 실패했습니다. 4위, 정하늘 참가자!”

지켜보던 참가자들의 경악한 숨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정작 이름을 불린 하늘은 초연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짧게 소감을 말할 뿐이었다.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 드렸어야 했는데, 제 자리에 만족하여 안주했던 것 같습니다. 보내 주신 사랑에 힘입어 이번에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소감에선 갖은 고생과 경험 속에서 싹튼 노련함과 성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스무 살, 갓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온 학생의 입을 통해 듣기에는 씁쓸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진은 하늘을 존경할지언정 동정하지는 않았다. 하늘은 이진의 아픈 가정사를 듣고 눈물을 훌쩍일 만큼 여린 면모도 있지만, 자신을 상품화 시키고 남 앞에 드러내어 평가받는 것에는 놀라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정당하게 싸워서 정당하게 결과를 얻으면 돼.’

이진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제 얼굴이 나온 스크린을 응시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이진과 찬우, 그리고 승현. 세 사람이었다.

팀 점수에서는 승현, 찬우, 이진 순으로 득점을 했기에 이진이 가장 불리한 위치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아직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찬우와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순위를 다투는 것은 선의의 경쟁일 뿐 그들은 미래에 분명 하나의 이름 아래에서 함께 활동을 하는 동료일 테니까.

“3위입니다. 매력적인 입담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으로 처음부터 눈부신 주목을 받았던 참가자입니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그에 따른 음악이 스튜디오를 가득 매웠다. 그때 스크린 속 찬우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한찬우 참가자, 수식어를 듣고 곧바로 결과를 예상한 것같이 보이네요.”

홍서가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찬우에게 말을 걸자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하하, 이게 모르고 싶어도 얘네 둘 입담이 별로인 건 누구나 다 아니까 어쩔 수 없네요.”

“그건 과연 어떨까요?”

찬우가 자조하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찬우의 얼굴이 스크린 가운데에 있어 절묘하게 승현과 이진을 손가락질하듯이 보였다. 가벼운 장난에 단단히 얼어붙어  던 분위기가 웃음으로 풀어졌다.

“네. 영광의 3위는 바로, 한찬우 참가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찬우는 결과를 듣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저를 믿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여러분 덕분이에요. 사랑합니다!”

마지막은 우렁찬 외침이었다. 아쉬운 기색 하나 없는 태도에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스크린에서 찬우의 얼굴이 사라지고, 이제는 큰 화면에 유이진과 선승현, 단둘의 얼굴만이 송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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