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9화 (19/173)

19화

“자기 전인데 뭐 이렇게까지.”

“형 머릿결이 좋아서 그런 거지 제가 따로 뭘 한 게 아니에요.”

승현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진을 내려다봤다. 왠지 승현이 저러고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장난치며 티격태격할 땐 의외로 표정이 많은 것 같았는데, 이진과 마주할 땐 항상 당황하거나 긴장한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아…….’

새삼스럽게도, 승현의 감정은 이진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의 일방적인 호의가, 서로를 관찰하며 탐색하는 시기가 지나 본격적으로 교류가 시작된다는 것이, 이진이 그어 놓은 선을 넘어 누군가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새삼 버겁고 무거웠다.

이진을 바라보던 승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승현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곧 다물렸다. 이진은 그 얼굴에서 실망을 읽었다.

승현은 몇 번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고 이진은 매번 괜찮다 답했다. 그날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점심 시간, 음료수를 사러간다던 승현과 미열이 둘 다 지갑을 놓고 갔다. 지갑도 안 들고 오다니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냐며 자판기 앞에서 서로에게 욕하며 옥신각신할 두 사람이 머릿속에 그려져, 이진은 직접 지갑을 가져다주러 나섰다.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 안에는 아무도 없길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 사람을 찾아보는데 복도 너머, 거의 사용하지 않는 창고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말소리가 더 뚜렷해졌다.

“그만할 거라고.”

“네가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다니까?”

“나랑은 말도 섞기 싫어하는 사람인데 뭘 더해?”

“걔가 벽을 좀 치긴 하지만 그렇게 까탈스럽지는 않아.”

“넌 몰라.”

지갑을 들고 따라 나온 건 계획도 흑심도 없이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진은 오랜만에 오지랖을 부린 멍청한 자신을 책망했다. 빨리 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다리가 굳어서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세월에 쓸려 지나간 옛 기억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이진을 응시했다. 정확한 상황과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때 느낀 감정만큼은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선명했다.

“상식적으로 걔가 널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이유 없이 날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말을 그따위로 하냐?”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적막해 이진을 포함한 이 공간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연극 무대의 뒷면을 훔쳐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까만 지갑이 쥔 손에서 저릿하고 이질감이 올라왔다.

승현이 잘 대해 줄 때마다 느껴졌던 작은 부유감이 이제 값을 치를 때가 왔다며 찾아왔다. 이진을 잡아 누르는 중력이 몇 배는 더 강해진 기분이었다. 뇌부터 심장, 연골, 온몸의 모든 부속품이 강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피곤해. 그만하자. “

“너 혼자 나댄다고 뭐가 될 것 같아? 지금은 같은 팀이라지만 다음 라운드에서 누가 널 대체할 줄 알고! 정하늘이랑 친하게 지낸다고 걔가 널 끼워 줄 것 같아? 뒷배 없는 우리가 비빌 구석은 유이진이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먹냐고.”

“누구처럼 그런 식으로 사람 급 나눠서 사귀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

“제발 애처럼 굴지 마.”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잘해 봐. 그 형이랑은 정말 가망 없어. 애초에 내가 다가간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무슨 기준으로 사람 갈라가면서 대하는지는 몰라도 지금 난 걸러졌으니까 니들끼리 알아서 잘해 봐.”

문이 당장에라도 열릴 것 같이 덜컹이자 이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 바로 옆 코너에 몸을 숨겼다. 대화가 몇 번 더 오고 갔지만 문에서 멀어지자 잘 들리지 않았다. 이진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선승현! 그딴 식으로 나올래?”

“너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려. 코드도 세 개밖에 못 잡는 게 기타 들고 설쳐 대던 게 엊그제야.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서 앞뒤 분간 못 하는 건 너라고!”

미열이 이렇게까지 진지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승현이 저렇게까지 흥분하는 것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진은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쿵쾅이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 승현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선승현. 넌 항상 그렇게 쉽게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죽어라 노력해야 그나마 목표치 근처라도 갈 수 있어. 뭐라도 노력하는 게 뭐가 나빠? 후회를 남긴 실패가 더 벗어나기 어려운 법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야. 네가 옆에서 지랄 발광을 하고, 망하라고 초를 쳐도 상관없어.”

미열에게서 느껴지는 열등감의 그림자가 자신의 모습과 닮아 어쩐지 서글퍼졌다.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 주길래 내심 가벼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속내를 능숙하게 감추는 법을 알뿐이었다.

“너도…… 결국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승현이 건조한 음성으로 마지막 말을 뱉었다. 한 사람의 발소리만이 복도를 울리고, 이내 미열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진은 그들의 속내를 몰래 훔쳐보게 된 죄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진은 두 사람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편히 숨을 들이켰다.

촌극을 관람하고 제일 먼저 드는 감상은 어이없게도 배신감이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알랑대다가 이진의 반응이 없으니 뒤 돌아 욕하는 사람들을 이진은 수도 없이 만났다.

네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얼굴 좀 반반하다고 뭐라도 된 것 같냐고 욕하는 이들은 바로 직전까지 이진에게 상냥히 웃으며 그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찬양해 댔다.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무의식중에 선승현은 그런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충분히 단단해지지 못한 건지, 이진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배신감에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백미열처럼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멍청하게. 내가 정말 특별해서 선승현이 잘해 준 거라고 생각한 거야?’

이래서 남의 호의를 받고 싶지 않았다. 돌아선 이들은 이진을 쉽사리 잊고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서지만 이지는 그들이 남기고 간 상처 때문에 더욱 더 몸을 웅크렸다.

“휴게실에 없길래. 너네 찾으러 건물 한 바퀴는 돈 것 같아.”

이진은 그렇게 말하며 지갑을 내밀었다. 승현은 별 대답 없이 건네받은 지갑을 외투 주머니 속에 넣었다. 무의식중에 승현의 표정을 읽으려다가 이진이 자신의 눈치를 본다던 그의 말이 떠올라 괜히 다른 곳을 바라봤다.

최소 세 명의 심기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연습은 아주 수월했다. 모난데 없이 성실한 일곱 명은 차곡차곡 발전했고, 안무의 섬세함이나 능숙한 호흡 조절 정도만이 아직 그들이 아마추어임을 보여 줬다. 하지만 방송용 카메라와 마이크를 경험한 적 없는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치에 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멘토들이 가끔 와서 연습을 구경하고 갈 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절박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하고 덧붙이는 말엔 약간의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승현이 굳이 말을 걸지 않으니 이진과 승현 사이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미열이 가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진은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넘어갔다. 매일 몸을 한계까지 움직이고 나면 깊은 생각을 할 기력이 그다지 남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건이 터지니 마냥 우중충한 기분으로 지낼 형편도 안 되었다.

“하늘이 파파라치 찍혔대.”

“파파라치?”

“응. 한두 명도 아니고 작정했다던데? 그 회사 연습생 애들이 갑자기 2주째 출근을 안 하니까 누가 냄새 맡은 거지. 데뷔도 전에 사생 붙은 거 아니야?”

그날 오후 스태프가 방마다 찾아와 경비 인원을 추가하긴 했지만 웬만하면 외출을 삼가고 가급적 창문에 커튼을 칠 것을 당부했다.

“이진아, 하늘이 괜찮은지 보고 오자. 어린애가 얼마나 놀랐겠어.”

“불편하지 않을까?”

“에이. 이럴 땐 딴 생각 못하게 옆에서 난리를 피워 줘야 덜 우울하고 좋지. 우리가 마침 방도 가까우니까.”

하늘은 이진과 같은 층 1호에 같은 소속사 멤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지만 한 번도 가볼 생각을 않았다. 남의 생활공간을 침범한다는 건 이진의 상식에서 몹시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방문에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아.”

“어? 웬일이에요. 연습하러 가려고?”

“하늘, 너 괜찮은지 보러 왔지!”

하늘은 걱정했던 것보다 멀쩡해 보였다. 스킨십이 잦은 찬우가 하늘을 위로해 주겠답시고 끌어안으려는 것도 질색하며 뿌리쳤다. 방 안에는 하늘과 같은 소속사인 나봄과 박준현, 윤기현이 함께였는데 그들도 오늘의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하늘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래도 불시에 사진 찍히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뭘요. 누구는 찍어 달라고 사정을 해도 안 찍어 주는데. 야, 정하늘. 네 덕분에 나도 기사 좀 나와 보겠다.”

“말 가려서 해, 박준현.”

서로를 향해 내뱉는 말끝에 날이 섰다. 하늘과 룸메이트들은 서로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시비에 한 명은 방관. 그나마 하늘을 위로해 주려는 건 같은 침대를 쓰는 나봄뿐이었다.

“네가 강한 애라 다행이다. 나였으면 울면서 고향 내려갔을 거야.”

찬우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진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아까 편의점에서 산 초콜릿을 침대 위에 올려놨다.

“저 주는 거예요?”

“어? 먹고 힘내라고. 그…… 단거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고 하잖아.”

그냥 고맙다고 인사나 할 줄 알았는데 하늘은 굉장히 의외의 눈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알겠다는 듯한 감탄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잘 먹겠다고 말했다.

방문을 닫고 나갈때, “너 쟤네랑 꽤 친해졌나 보다?” 하고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렸다. 찬우가 요상한 눈빛을 교환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진은 그게 무슨 뉘앙스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했다.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 찬우가 대뜸 진상이라는 단어를 툭 내뱉었다.

“진상!”

“뭐가?”

“걔. 그 박준현인가 하는 애. 걔 완전 진상. 개진상!”

“왜 뭔데?”

주인 없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던 미열이 물었다. 승현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금 하늘이 괜찮나 보러 갔다 왔는데, 걔 룸메 열등감 장난 없어. 우리 있는데도 비꼬고 난리더라.”

“와. 사실상 정하늘 서포트하라고 보낸 애들 아닌가? 거기서 보낸 애들 하늘이 빼고 2군이지 않아?”

“그걸 지들도 아니까 저딴 식으로 구는 거겠지. 연습생 애들 기 싸움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도 소속사 있잖아.”

“나 말고 연습생이 없잖아.”

이진도 하늘의 룸메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는 데엔 동의했지만 어쩐지 이렇게 뒤에서 욕을 하는 상황은 조금 거북했다. 도덕심보다는 평소에 뒷담을 까는 입장이 아니라 당하는 입장이었기에 역지사지가 과하게 되어 버리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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