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18화 (18/173)

18화

이렇게 솔직한 얘기를 들어도 되나 싶었지만 스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힘내서 그 잠재력을 좀 발휘해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비록 연습생이나 화제의 인물 이런 사람들은 타 프로에 비해 좀 뒤질지 모르지만, 대신 멘토나 이런 쪽에서 빵빵하잖아. 조엘이나 홍서나 뭐 이런 애들. 원래 이런 프로 거들떠도 안 본다던 애들인데 어렵게 꼬셔서 데려온 거거든요. 그만큼 기대가 크다고.”

“네, 저도 멘토 분들 보고 많이 놀랐어요.”

“그렇지? 아, 그건 그렇고. 우리 방송 컨셉이 워낙 확실해서 뭐…… 다들 대충 알고야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제일 중요한 건 최후의 승자, 개인이지 결코 팀이 아니에요.”

이진은 대답하지 않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납득했다.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고서야 이런 악의적인 기획을 내놓지 못하리라.

“하하. 그런가요? 명심할게요.”

“팀 구성이 좀 아쉬워서 그래. 뭐 다들 실력은 있는데 스타성이 좀 약해 보이긴 하거든. 굳이 다 안고 갈 생각 하지 않는 게 편해요.”

그런데 이 말은 조금 예외였다. 이진과 미열이 머리를 맞대고 찾아낸 화제의 인물들을 모아 놨더니 그들의 눈엔 스타성이 약하다고 한다. 이진과 미열은 그들의 초반 관심도에 어느 정도 이득을 보길 기대하며 팀원을 꾸렸는데, 오히려 아직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는 이진이 피해를 볼 것처럼 말한다.

‘스타성이 대체 뭐길래?’

그 의문이 들자 이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선승현, 이 프로그램에서 배출해 낸 최고의 스타. 그러나 지금의 승현은 번지르르한 외모 외엔 특출나게 튀는 부분이 없었고, 오히려 평범한 구석이 더 많았다. 이 사람들은 대체 승현에 어떤 점을 보고 프로그램을 대표할 스타감이라 여겼을까?

스태프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질겅이며 씹다가 복도에 난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이만 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가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아도 방금 전 대화가 전부 비밀이라는 걸 분위기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방금 개인 인터뷰를 빌미로 그들이 점찍어 둔 참가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줬다. 방금 선택한 팀을 버리라고.

아직 한 번도 합을 맞춰 보지 않은 팀인데, 벌써 어디선가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진은 스태프에게 들은 말을 미열에게 따로 전달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며칠이 흘렀다. 그 며칠 사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팀 선정 촬영 바로 다음 날 세 명이 퇴소했다. 경매를 하며 겪었던 굴욕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순서대로 멤버를 골라 마지막에 남는 것만 해도 수치스러울 텐데, 경매 시스템에선 낙찰받은 포인트가 곧 그 사람의 가치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지명당하지 못하고 경매 게임에 실패한 사람이 벌칙처럼 안고 가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네 명이었던 방은 세 명이 되고, 세 명이었던 방은 흩어져 다른 호실에 배정받았다. 그리고 바로 한찬우의 방이 공중분해 된 방이었다.

“오늘부터 여기서 살게 된 한찬우입니다.”

짐을 끌끌 끌고 와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인사하는 찬우는 평소와 달리 조금 우울해 보였다. 이진의 빈 위층 침대에 주인이 생기니 스물네 살이 셋이나 모인 방이 되었다.

“선승현이가 막내네, 막내.”

“자꾸 나댈래?”

미열이 놀리자 승현이 침대를 마구 흔들었다. 작은 흔들림에도 삐걱대는 이층 침대는 미열을 싣고 좌우 양옆으로 신나게 흔들렸다. 승현의 얌전한 모습만 보던 찬우는 조금 적응이 안 되는 듯했으나 이진은 거기까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한찬우는 거기에 포함이야, 아니야?’

이진은 계속 그 생각만 났다. 잘나가는 개인이 중요하지 팀원들은 중요한 게 아니니 적당히 버리라던 스태프의 말.

한찬우는 거기에 포함일지 아닐지가 신경 쓰였다. 데뷔했던 멤버이니 만큼 다시 한번 데뷔조에 오를 자격은 충분하겠지만, 사실 이진이 기억하는 그 멤버 구성은 선승현 외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인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그가 말한 ‘스타성’의 기준과 정의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진의 눈에는 오히려 반대였다. 선승현은 그저 그랬고 다른 멤버들이 훨씬 잘나 보였다.

미열은 춤이 좀 삐걱거리고 동선 이동이 있을 때 가사가 같이 나오면 호흡을 버벅거리긴 했지만, 전문적으로 연습한 기간이 극도로 짧은 걸 생각하면 놀라운 성장세를 보여 줬다. 찬우는 비록 안 좋은 회사에서 방치되긴 했어도 오랜 기간 준비한 연습생답게 어디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성격도 호쾌하니 멤버들의 연습도 잘 이끌어 주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진영은 아이돌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있었지만 래퍼 쪽에서 실력으로 진영을 이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윌리엄은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춤 하나하나에 각이 살아 있었다. 자신의 춤 실력은 미국 정통 스트리트 댄스의 위력이니 뭐니 말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진은 그런 예능감도 높게 쳐줬다.

대형 기획사 출신이라던 하늘도 실력이 정말 좋았는데, 하늘은 데뷔조에 들려면 자신의 포지션을 잘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은근히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서브 보컬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완전 잘못 생각한 거거든요. 서브 보컬이 허접하면 전체적인 퍼포먼스의 완성도나 밸런스가 망가질 텐데 ‘서브’라는 단어에 집착해서 같은 팀원을 들러리 취급하는 건 시야가 얕은 거예요. 실제로 데뷔했을 때 그런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데요. 포지션이라는 허상에 넘어가지 않는 게 중요하죠.’

하늘은 어린 나이치고 굉장히 전문적으로 의견을 어필했다. 대형 기획사의 체계적인 시스템 밑에서 연습생 생활을 오래한 만큼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많았다.

이진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스타성이 있었다. 그러나 승현은 조금 달랐다. 습득이 빠른 건 알겠지만 그는 춤도 노래도 건성이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공연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딱히 모난 부분이 없으니 지적하기에도 애매했다.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멋져 보여야 하는 아이돌 지망생으로서의 자각도 별로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가 왜 출연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정말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건 맞는 걸까?

이 시간대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선승현의 새 아버지는 재벌이었다. 차라리 돈을 주고 데뷔 그룹에 자리 하나를 받아 내는 게 더 쉽고 빠른 길일 텐데 왜 굳이 이런 방송에 나와 고생을 자처한 걸까.

또 하나,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신경까지 거슬리게 하는 변화가 있었다.

“형 물 떠다 줄까요?”

“아니, 괜찮아.”

“아, 옷 갈아입을 거면 제가…….”

“아냐, 옷장에 없어. 침대 밑에 넣어 놨어.”

“혹시 운동화 빨아 드릴까요?”

“내 손으로 할게.”

선승현이 노예 내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방에만 돌아오면 이진의 수발을 들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이다.

“쟤 또 저러네.”

“야, 인마. 주인님 귀찮아하시는 거 안보이냐? 너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앉아서 반성하고 있어.”

“백미열, 나댄다.”

이진 속의 작은 악마가 미열의 말대로 하라고 속삭였다. 그만하래도 계속 저러는 걸 보니 슬금슬금 짜증이 밀려왔다. 아주 노예 취급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진의 이성이 조금만 얇았더라도 무서운 주인님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이진의 입에선 곱고 예쁜 거절의 말만 튀어나왔다.

“승현아,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형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이진의 거절이 쌓이면 쌓일수록 승현은 어떻게든 이진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어 안달 냈다. 말실수를 무마하고 싶어서 그러나 싶었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서도 계속 저 난리를 치니 이진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설마 서열 정리를 당한 건가?’

승현이 자신에게 빌빌 기는 게 보기 싫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진은 제 아래 서열로 들어와 굽신거리는 선승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차라리 한 번 뭘 시키고 이제 그만하자고 말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이 숙소는 아이돌 지망생들의 사육을 위해 구축된 환경이므로 정말 연습과 잠 외에는 신경 쓸 것이 너무도 없었다. 빨래와 청소는 지정된 요일마다 업체에서 나오고, 밥도 식당에서 한식과 양식, 별식을 선택해 먹을 수 있었다.

언제 한 번은 차라리 안마를 받고 끝내자 싶어 어깨 좀 주물러 달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승현의 손이 어깨 죽지에 닿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버렸다.

‘미안해. 나 간지럼 타. 깜빡하고 있었어.’

승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침대로 돌아가더니 얼마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 왠지 동그란 뒷뒤수가 나 삐졌소 항의하는 것 같았다.

‘너 등, 배, 겨드랑이 조심해라.’

이진은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장난을 걸어오는 미열을 무시했다.

그 뒤로도 승현은 꾸준히 이진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어 했다. 눈 딱 감고 부담스러우니 그만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미열이 이진을 따로 불러내 조금만 봐 달라며 사정을 했다.

“걔가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놈이라서 불편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해해 주면 안 될까?”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이진은 남을 챙겨 주고 이해해 주거나 배려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곤란한 일을 마주하기 싫어 참는 편이었고 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도 이진의 그런 성격을 잘 알아 ‘이해해 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았었다.

온통 피곤한 일뿐이었다.

***

“형. 머리 말려 드릴게요.”

이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승현이 벌떡 일어나 드라이기를 들고 달려왔다.

“아니, 괜찮…….”

“크흠!”

평소처럼 거절하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찬우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감기 걸렸어?”

“크흐흠!”

“승현아, 내가 말릴게.”

찬우가 목을 긁는 거친 소리를 내며 이진을 흘끔댔다. 이진은 그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드라이기 플러그를 꽂고 있는 승현을 말리려 했는데 이번에도 찬우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계속 그러면 목 상하니까 뜨거운 물이라도 마셔.”

“에헷취!”

그러자 갑자기 미열이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 찬우와 마찬가지로 이진을 흘끔거렸다. 이진이 어리둥절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비라보는 동안 승현이 마른 수건과 드라이기를 들고 다가왔다.

“쟤네 목 건강이 걱정되면 그냥 앉아 계세요.”

승현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리를 잡았다. 미용실도 아닌데 남이 머리를 말려 주는 상황이 이렇게 어색하고 긴장될 줄은 몰랐다. 이진은 어깨를 잔뜩 굳히고 뻣뻣하게 승현의 손길을 기다렸다.

다행히 승현은 제법 손재주가 있었다. 바람이 너무 뜨겁지 않도록 팔을 멀리 뻗어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고 물을 털겠다고 머리를 마구 헤집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난 결대로 손을 여러 번 움직이니 방송을 위해 관리라도 받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스타일링이 완성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