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콤한 패배-20화 (20/173)

20화

굳이 대화에 끼지 않고 멀뚱히 앉아 있었더니 미열이 그런 이진을 눈치채고 말을 걸었다.

“아, 괜히 욕해서 좀 불편한가?”

“아냐. 하늘이가 제일 걱정이지 뭐.”

“사실 방금 전에 기사 떴어. 프로그램 얘기는 조금밖에 없고 바비에서 나이 찬 연습생 방출 시키려고 작업 중이라는 추측성 기사긴 한데, 사실 완전 틀린 말은 또 아니라…….”

연습생 관리가 체계적인 바비 엔터는 새로운 그룹을 내는 시기와 패턴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에 그들의 행보를 예측하고자 애를 쓰는 기자들이 많았다.

“오늘 파파라치도 다음 분기 데뷔 멤버 미리 파악하려 온 거겠지.”

“그런 걸 파악해서 뭐 하지?”

“음, 글쎄…….”

이진은 바비가 조만간 발표할 그룹이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5인조 여성 밴드였던 걸로 기억했다. 아이돌 밴드도 아니고 갑자기 정통 록 스타일을 선보였기에 논란이 꽤 컸는데, 국내에선 선방하지 못했지만 의외로 해외 쪽에서 꾸준히 투어를 돌았다.

하늘이 마지막 라운드까지 진출한 기억은 있지만, 이후의 행방을 분명하지 않았다. 만약 승현과 함께 데뷔하지 않았다면 아마 원래 소속사에서 데뷔해 유명한 아이돌이 됐을 수도 있지만, 기자들의 예측처럼 이 방송이 하늘과 그 또래들을 방출 시키려는 밑 작업이라면 아마 지금이 하늘에겐 연예인이 될 마지막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근데 하늘이는 벌써부터 팬이 있는데도 방출을 논의해? 그냥 데뷔시키면 안 되나?”

“바비잖냐. 저만큼 인기 있는 게 정하늘 혼자도 아니고.”

이진 뿐 아니라 이곳에 모인 모두가 절박했다. 처음부터 마지막 기회라 털어놓던 찬우도, 속내를 숨기고 있던 미열도, 강한 척 하던 하늘도. 어쩌면 왜 이곳에 참가한 건지 동기를 알 수 없는 승현조차도.

“우리 꼭 1등 하자.”

이진이 하늘의 기사를 띄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그런 말 하는 거 왜 처음 듣는 것 같지?”

찬우가 이진의 볼을 꼬집었다. 눈을 활짝 접어 시원한 미소를 띠운 채였다. 미열도 킥킥대며 ‘유이진 씨가 원래는 각오를 입 밖으로 내는 헤픈 사람이 아니에요.’라며 농담을 했다.

“아. 근데 선승현 요즘 왜 그런대? 이진이한테 안 치대더라?”

“아…….”

방금까지 훈훈하게 의기투합하는 분위기였으나, 찬우의 말 한마디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진은 뭐라도 무난한 변명을 할지, 아님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을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찬우도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찰나의 정적이 뜻하는 바를 금방 깨달았다.

“나 방금 완전 눈치 없는 소리 한 거냐?”

“……난 선승현 대변인 은퇴할 거니까 직접 물어봐라.”

미열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쭉 뻗더니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찬우가 마이크를 든 시늉을 하고 미열을 흔들었다.

“대변인, 대변인!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선승현 씨가 뭐라고 말씀하셨죠?”

“이만 가세요! 할 말 없습니다!”

둘이 역할극을 했다, 만담을 했다, 하며 승현의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뒹굴고 놀았지만 승현은 밤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이진도 그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요 며칠 트럭이 들락날락한다 싶었더니 거대한 운동장 같던 스튜디오가 한순간에 세련된 무대로 탈바꿈되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리허설 두 번과 본 촬영 한 번씩 각 팀별로 공연을 한 뒤 심사 위원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평가 점수를 바탕으로 방송의 티저 영상으로 사용될 단체 무대에서 설 자리가 정해진다.

매일 새카만 트레이닝복만 입다가 새하얀 유니폼을 갖춰 입고 모였더니 어쩐지 어색했다. 바로 근처에서 대화하는 참가자들도 얼굴이 커 보이니 뭐니 하고 유니폼에 대한 애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감 좀 나네.”

“그러게요. 방청객도 없는데 엄청 화려하게 꾸미고.”

“방송 나가니까 뭐.”

리본이 답답하다며 결국 풀어서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버린 진영이 셔츠를 펄럭이며 말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무대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진영과 하늘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대가 얼마나 넓고 높은지조차 잘 가늠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기웃거리며 스튜디오를 구경하는 참가자들 틈을 카메라맨 한 명이 누비고 있었다.

“상자 속에 손 넣어서 공 하나 꺼내세요. 숫자 확인하고 카메라 쪽으로 들어 보이면서 읽어 주시면 됩니다.”

멤버 전원이 공을 하나씩 뽑는데, 그 공에 적힌 숫자를 더한 합이 적은 팀부터 리허설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진은 참 번거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이런 식으로 예측할 수 없는 구성이 있어야 시청자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아마추어들의 몸부림을 봐 줄 거라 납득했다. 이진이 제일 먼저 공을 뽑기는 했으나 공에 적힌 숫자의 범위와 다른 팀의 결과를 모르니 좋아하기도 애매했다.

“28입니다.”

“이진아, 발음 조심!”

미열이 유치한 농담을 하며 공을 뽑았다. 미열의 공엔 18이 적혀 있었다. 차례로 공을 뽑고 나니 승현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스태프가 오기 전에 음료수를 사 오겠다며 나갔던 게 기억났다. 퇴소한 사람들 때문에 여섯 명인 팀이 꽤 있는지라 카메라맨은 승현의 부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다른 팀으로 가려 했다. 다른 팀원들은 미열과 방송용 단어 사용 강습이니 뭐니 하며 말장난을 주고받고 있어 승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이진은 우선 카메라맨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저희 팀에 승현이가 지금 없는데 공을 제가 대신 뽑거나 아니면 도착했을 때…….”

안타깝게도 카메라맨은 멤버의 부재 상황에 대한 지시를 들은 바가 없는지, 아니면 원래 뚱한 표정인 건지 무어라 바쁘게 말하고 있는 이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카매라맨의 어깨 너머로 승현이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양손에 음료수를 잔뜩 들고 있는 게 팀원들을 위해 나름 고생고생해서 사 온 모양이었다. 묵직한 스튜디오 문을 한 어깨로 지탱하는 모습이 조금 버거워 보여 이진은 카메라맨에게 여기서 잠깐 기다려 달라고 붙들어 둔 뒤 승현을 향해 뛰어갔다.

승현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이진을 보고 조금 눈이 커졌다가 이진이 읽기 어려운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승현아, 지금 저기서 촬영……. 아, 이건 우선 내가 들어 줄게.”

“아, 괜찮…….”

이진이 황급히 음료수 캔 몇 개를 받아들려는데, 스튜디오에 내려오는 동안 팔 안에서 흘러내린 캔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었는지 이진이 손을 대자마자 우르르 떨어져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진 캔 때문에 순식간에 이진과 승현 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한창 돌아가고 있던 카메라의 까만 렌즈도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미안. 내가 주울게. 너는 가서 공 뽑아.”

허둥지둥 무릎을 굽히고 캔을 집어 들었다. 개수가 일곱 개인 걸 직접 세고 나니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힌 듯 답답해졌다. 승현의 다리가 눈앞에서 얼쩡거리긴 했지만 이진은 굳이 올려다보거나 재촉하지 않고 음료수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대학 생활 대부분을 차지한 알바 경력 덕분에 이진은 캔 일곱 개 정도는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다.

“기다리시니까, 어서 가서 공 뽑아.”

이진이 다시 한번 촬영을 언급하자 승현은 그제야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무신경한 태도로 공을 뽑아 카메라 앞에 들이밀며 이제 됐냐고 물었다. 카메라맨은 숫자를 읽어 달라고 요구했다.

“숫자…… 77이요.”

그사이 미열이 다가와 이진을 도왔다.

“에구. 이거 전부 탄산이네.”

“승현이가 생각해서 사 온 것 같은데 어쩌지. 내가 새로 사 와야겠다.”

“됐어. 얘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런대? 좀 내버려뒀다가 마시지 뭐.”

이진과 미열이 팀원들과 합류했지만 승현은 별말이 없었다. 음료수를 하나씩 받은 팀원들이 승현에게 고맙다며 말을 걸어도 자신이 사 온 게 아니라는 이상한 말만 했다. 이진은 부끄러워서 그런 건가 하고 대충 넘겼다. 방금 전 많은 사람들의 눈이 집중된 이후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고 바닥이 흔들리는 듯 어지러운 감각이 계속되서 사소한 행동들에 집중하지 못했다.

‘민망해…….’

승현과 미열의 대화를 엿들은 뒤로 거의 처음 승현과 제대로 대화하는 거였는데, 멍청한 모습만 보인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튀는 행동을 해 버리고 말아 스튜디오에 작은 소란을 가져온 것도 신경 쓰였다.

이진은 때때로 군중이 무서웠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것과는 조금 달랐다. 군중은 단 한 번도 이진의 편을 들어 준 적이 없었고 몸은 쉽사리 위기 상황을 학습했다. 공연을 하거나 발표를 할 때는 떨리기만 할 뿐이었지만 이진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선이 쏠릴 때면 곧장 몸에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그래도 이진은 이를 악물고 괜찮은 척을 했다. 리허설 전에 안 좋은 표정을 짓는 건 팀원을 향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게다가 시청자들은 이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괜히 절묘한 편집 기술로 이진이 팀원이나 리허설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없던 힘도 솟아났다. 없던 힘은 사지 말단에서 빠져나온 건지 손끝이 뻣뻣해지고 관절이 굳어 욱신거렸다.

얼마 후 아까와 다른 카메라맨이 다가와 리허설 순서를 통보하며 간단한 예능 문답을 했다.

“팀 이름이 뭐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팀명을 정하라 했던 걸 까먹고 있었다.

“인터뷰 끝나기 전까지 생각해 주세요!”

“제가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윌리엄이 대답하고 카메라 구석으로 빠졌다.

“리더가 누구죠?”

“당연히 여기 이진 님…….”

“어? 아냐, 아냐. 진영이 형이지.”

“백미열 아니었냐? 말이 제일 많아서 당연히 너인 줄.”

그 뒤로 이어진 질문들도 대체로 팀의 개성에 대해 묻는 내용이었다. 누가 제일 잘생겼는지, 누가 제일 인기가 많을 것 같은지, 누가 가장 의지가 되었는지 등. 이진으로서는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남들은 쉽게 장난으로 받는 질문들이었다.

“끝으로 시청자 분들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잖아요.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지 이진 씨가 대답해 주시겠어요?”

정황상 리더의 위치면서 대답을 피하는 이진에게 마지막 질문이 돌아왔다.

“아, 네. 그…… 여러분께 보여 드리기 위해 다들 열심히 준비한 무대입니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어…….”

“함께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njoy the show! 그지?”

단어를 찾지 못하고 막혀 버린 이진의 문장을 윌리엄이 마무리 지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붙여 오는 윌리엄이 부담스러웠지만 카메라 앞이라 피하지도 못한 이진은 살짝 몸을 기울이며 얼굴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이진이 카메라 때문에 스킨십을 피하지 못하는 걸 눈치챈 찬우가 윌리엄을 따라 이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거기에 장난기가 발동한 진영과 미열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이진은 완전히 그 사이에서 찌그러졌다. 허리가 반쯤 접혀서 떨어지라고 옆에 사람을 퍽퍽 치는데도 그에게 몸을 기댄 이들은 미동이 없었다.

“저, 저리가!”

“이진아, 사랑해애.”

찬우가 애교를 부리며 몸을 더 붙여 왔다.

“팀명은 생각하셨나요?”

“네! 저희는 이진 님과 노예 팀입니다!”

“화이팅 한번 해 주세요.”

“이진 님과 노예들, 파이팅!”

이진은 네 남자들의 장난에 희생당하는 통에 미처 팀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