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37)화 (137/176)

137.

제국의 계보 수업이 끝난 즉시 비도술 연습장으로 향했다.

첫 수업부터 지각하였으니 수업에 열의를 보이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집중했고, 모든 대답에 성실했으며, 단 한순간도 다른 생각을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제국의 계보 수업과 달리 실전 비도술 수업은 마치고 바로 가야 할 수업이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것을 묻기에 좋았다.

윌턴 로버츠가 수요일과 목요일 수업시간에만 아카데미에 나오기 때문에, 수업이 끝난 뒤에 질문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루베르가 미리 일러준 바 있어 거칠 것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수업이 끝난 뒤 잠시 로버츠 교수를 붙잡았을 때, 그는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재깍 돌아보았다.

“교수님.”

대답 없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스산했다. 차분히 내 할 말을 입에 담았다.

“비도술 외에도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교수님께서 숨 쉬고, 걷고, 몸을 숨기시는 방법들이 궁금합니다.”

윌턴 로버츠가 가르치는 과목은 단 한 과목뿐이었다. 실전 비도술. 그것은 지난 학기에도, 지지난 학기에도 같았다.

그가 직접 아이들에게 내주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을 탐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간절히 그를 바랐다.

윌턴 로버츠는 웃지 않았다. 그 시선이 나를 훑는 것을 알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가 지닌 음기가 그의 무공에 관련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암살자가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럼, 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은데.”

나는 바로 대답했다. 망설이지 않았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난 삶은 후회였다.

내가 이 땅에 다시 태어나 하는 모든 것들이 중원에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를 가로막은 것은 나의 태생이었고, 천성이었고, 성품이었고, 체면이었다.

내가 일찍이 보다 성실하여 어릴 적부터 수련에 몰두했다면 더 높은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면 더 많은 혈족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내 일찍이 예의를 알아 부모와 웃어른께 깍듯이 대했다면, 그들이 죽고 스러진 후에 후회가 덜했을 터였다.

체면을 차리겠다고 비도술과 은신술을 멀리 하지 않고 보다 흥미를 가졌더라면, 만약의 순간에 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내 조카 놈들에게 적에게 무작정 달려가는 법이 아니라 시체 밑에 몸을 숨기는 법을 가르칠 것을 그랬다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을 가르친 것이 나여서, 모든 죽음이 내 탓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다시 태어난 나는 성실히 훈련했고 웃어른에게 깍듯했다. 배우지 못한 모든 비전들이 탐이 났다.

내 죽는 순간에 후회로 남았던, 해보고 싶었던 것과 아쉬운 것이 짙은 화인으로 가슴에 남았다.

윌턴 로버츠의 대답이 곧장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긴장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등을 곧게 폈다.

세상 그 어떤 무인이 제 비전을 생판 남에게 쉬이 가르쳐 주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발목에 매달려 애원해서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 아카데미가 하나의 문파이고, 내가 그의 제자라면, 빌고 애원하면 어쩌면.

나를 말끄러미 보던 윌턴 로버츠가 고개를 슬쩍 기웃했다. 나는 그 비스듬한 시선이 뱀과 같다 느꼈다. 숨죽여 기다렸다. 로버츠가 얇은 입술을 열어 답을 주었다.

“시간을 많이 내줄 수는 없다.”

“⋯그럼!”

“지금처럼 수업이 끝나고⋯. 한 시간 정도씩은 봐 주마.”

“감사합니다!”

그의 입꼬리가 평소보다 약간 더, 미약하게 위를 향한 것이 보였다.

나는 기뻐 함박 웃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슬쩍 숙여 치르는 예의는 시어런에 와서 배운 것 중에 가장 극한의 공경을 담은 태도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치자, 그가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감사는 무슨.”

가슴속 깊이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말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끝까지 짜릿했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한 윌턴 로버츠가 바로 시작하자며 나를 연무장으로 이끌었다. 검게 어둠이 내려앉은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에, 그가 또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만약 누굴 죽이고 싶다면 흰옷을 입어라.”

“그건 또 어째서입니까?”

“피 묻지 않은 흰옷이 네 결백을 증명해 줄 테니까.”

나는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윌턴 로버츠는 제가 농담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보다, 자신의 말을 고지식하게 믿는 것을 좋아하는 사내라고 루베르가 언질해 준 바 있었다.

과연 내가 곱게 수긍하자 그가 흐뭇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검은 옷 얘기를 할 적에도 그랬지만, 그는 의외로 의복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가 싶었다. 그림자처럼 희끗하니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법을 잘 아는 사내이니 그런가 싶었다.

축골공(*몸의 뼈마디 사이를 좁혀 체구가 작아보이게 하는 무공)도 그에게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나 했다.

연무장에 도착했다.

안 그래도 사람이 적은 소연무장 중에서도 가장 인적 드문 곳이라, 연무장 중간중간에 잡초가 자라 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던 나는 오는 길을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내가 주변을 살피는 것을 보고 윌턴이 한 번 더 웃었다.

그에게 가장 처음 배운 것은 호흡이었다.

나는 창궁대연신공의 구결에 따라 호흡하였다. 그러나 윌턴은 내 호흡법이 정도를 따르기 때문에 은밀하고 조용한 것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어런에는 내공심법이 없었다. 대신에 그가 가르친 것은 숨을 오래 참고 얕게 쉬는 법이었다.

“호흡은 욕망이지. 욕망을 버리고 네가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원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명상으로 이를 수 있는 경지입니까?”

“가만히 앉아서 숨을 참는 것을 못한다면 무인이 아니지. 숨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 경공에 대한 것을 그에게 알렸다.

무한보와 무영보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걷는 모습을 모두 한 차례 선보이느라 약속된 한 시간이 훨씬 지나고 달이 머리 꼭지에 높이 떠서도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윌턴 로버츠는 그 중 몇 가지를 짚어 몇 번 더 시연을 보더니, 다음 번 수업 시간이 끝난 뒤에 좋은 것을 알려주겠다 말했다.

무척 기대가 되어 가슴이 뛰었다.

* * *

다음날 고급 검술 시간. 루베르에게 윌턴과의 일이 잘되었다, 네 덕분이다 하고 크게 칭찬을 해 주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루베르도 함박 웃으며 잘되었다며 제 머리를 숙여 왔다. 그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자니 언제 이 아이가 이리 살가워졌나 싶었다.

그러나 시나브로 물에 젖어들 듯 가까워진 아이였다. 어느 시점을 헤아리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어여쁜 뺨이나 한 번 더 꼬집어주고 말았다.

이날에는 나와 루실라가 대련하는 날이었다.

루실라가 주로 쓰는 검법이 세이렌 검법이라고 했던가. 흐르고 흐르는 유검이었다. 강물을 닮고 파도를 닮은 검이었다. 루베르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강자였다. 직선적인 것과 유하게 휘어지는 것 모두가 각자의 장점이 크기 때문에 무엇이 더 낫다 말할 수 없었다.

언뜻언뜻 오러가 불티처럼 튀었다 떨어져 나갔다.

따져보지 않아도 루실라의 실력도 나처럼 월등히 높아진 것을 알았다. 어린 아해들 틈에 끼어 대련을 하는데도 부족함이 읽히지 않는 것이 퍽 대단하다 여겼다.

마엘로 샌슨이 내 속엣말을 읽은 것처럼, 둘 모두 지난 학기보다 경지가 많이 올랐다며 칭찬해주었다. 나는 기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메이지 볼더가 운기조식을 시험했으니, 이번 주는 더글라스 머스탱의 차례였다.

확실히 더글라스는 무(武)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볼더와 달랐다. 가부좌를 튼 자세부터가 자로 잰 듯 정확했다. 그의 자세를 몇 번 고쳐준 일이 있긴 했으나, 혼자서도 꾸준히 연습한 것이 틀림없었다. 얼핏 보면 부처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법했다.

곧은 자세로 앉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맑고 청명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내공은 비물질계의 마나를 보다 순정하게 정화시켜서 몸에 쌓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조근조근 운기조식을 시작하기 전에 내게 해설해주는 것이, 수업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벼운 것을 무겁게 받는다는 대목이⋯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다 정제하여 순정한 것을 몸에 쌓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끌어오는 것은 마나로 끌어오되, 흐름은 오러로 잡겠습니다.”

“⋯예.”

“목표는 운기조식 후 정제된 마나를 어떤 형태로든 빚어내는 것으로.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시어런 식으로 해석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심상이 빚어내는 것이 바르기를 바랐다. 정좌한 그를 앞에 두고 개인 소파를 두 개 끌어다가 나와 볼더가 각각 앉았다.

우리의 시선 아래에 더글라스가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마나가 모였다.

내공은 아니었다.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 저를 부르는 더글라스에게 호응하여 폭풍처럼 일었다.

애초에 더글라스는 이 세계의 오러와 마나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강자였다. 이 세계의 것은 그에게 순종했다. 먼 곳에서부터 달음박질 쳐 모여든 마나가 휘몰아쳤다.

정화 술식을 다루는 구슬 속을 이동하는 것처럼, 실처럼 가늘게 뽑힌 유형화된 마나가 그의 호흡을 따라 차근차근 그의 몸속으로 밀려들어갔다.

나는 불안하여 소파 팔걸이를 꽉 쥐었다.

눈을 부릅떴다. 안력을 최대한 돋구어 제대로 보기 위해 애썼다.

더글라스의 기혈은 튼튼했으나 오러의 흐름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늘 오러를 몸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돌려 사용했다. 정제되지 않은 마나가 요혈을 건드릴 적마다 그의 손끝이 흠칫 떨렸다.

그 어깨나 손끝이 고통스럽게 튀어 오를 적마다 당장에라도 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애써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일 주천. 딱 한 바퀴, 그가 정제한 마나가 처음에 노린 모든 혈도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높은 산에서 굴린 돌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내달리기 시작한 마나의 흐름을 인지한 볼더가 서둘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큽. 꾹 닫은 더글라스의 입에서 핏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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