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나는 잽싸게 그의 몸 뒤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의 등 뒤에서 몇몇 요혈을 빠르게 짚어 기의 흐름을 강제로 느리게 바꾸었다. 양 장심을 천종혈(*날개뼈 어림의 혈도)에 대고 내 기운을 불어넣었다. 제멋대로 뻗대는 마나를 삼켜 내 몸으로 끌어당겼다.
정순한 기운이 다친 혈맥에 스몄다.
빠른 조치에 더글라스의 기도가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다친 혈맥을 따라 소주천을 하고 손을 떼자마자, 그의 머리 위로 초록 기운이 스몄다. 리커버리였다.
볼더의 마나가 더글라스에게 충분히 스미기를 기다린 다음, 힘없이 가부좌를 푼 더글라스의 맥문을 끌어다가 한 번 더 확인했다.
무리하여 다치고 긁힌 세맥들이 조금 부어있었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화입마에 걸리기 전에 막아 큰 상처가 없었다.
더글라스가 쓰게 웃었다.
“쉽지 않네요.”
“쉬워 보였습니까?”
“아니요. 그렇지만, 할 만해요.”
씩 웃는 그의 입에 여전히 핏물이 묻어 있었다. 절로 한숨이 샜다.
하여간 무인이란 고집스러워서 저들이 작정한 것을 좀처럼 바꾸는 일이 없었다. 나 또한 그런 무인이었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당분간 피로하실 겁니다. 피부터 닦으십시오.”
“아, 고마워요.”
민망하게 입가를 닦는 더글라스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볼더가 왜 나는 저렇게 못 하냐 떼를 쓰기 시작하기에, 검사와 마법사가 어디 같으냐 흰소리를 한 번 했다가 귀가 저리도록 떼떼거리기에 듣지 않았다.
이 다음번에는 다시 메이지 볼더의 차례라 하였다. 그 전에 더글라스에게 많이 배워왔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 * *
빌을 안아주고, 루베르를 안아 도닥여주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학년이 올라와서 루베르 이 아이와 지나치게 자주 보는 것이 아닌가?
지난해에는 기껏해야 고급 검술 시간과 주말에나 보았던 것을, 이제는 매일 보고 있었다. 쉐이든보다 루베르와 더 가까워진 것이 떨떠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이가 날 보며 순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또 흐뭇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터라, 조금 이상하긴 해도 그냥 두었다.
비도술을 배운 것과 같이 제국검법의 기초부터 다시 다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후의 수업은, 몬스터에 대한 것이었다.
나도 꼭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었지만, 루베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지도자들이 몬스터에 대해 알고 대응해야 함이 당연했다.
루베르와 둘이 오크 가죽으로 된 장정을 펼쳐두고 스티븐 맥클리프의 강연을 들었다.
스티븐 교수는 추위를 많이 타는 모양인지, 실내인데도 꽤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
교수가 긴 팔을 뻗어 판서를 할 때마다 무릎 아래에서 나풀거리는 코트가 눈에 걸렸다. 때문에 멀쩡히 서 있어도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 시간에는 진화론과, 마력 변이 생명체인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요. 오늘은 각 몬스터를 분류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울 거예요.”
옛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조곤조곤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모든 몬스터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어요. 진화라고 봐야 옳겠죠. 몬스터를 분류하는 일은 사람을 분류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판서를 마친 교수가 학생들을 돌아보며 살포시 웃었다.
“이 수업에 들어 온 학생들은 큰 부류로 따지면 인간이죠. 거기에서 성별로 따지면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고, 학부로 나누면 여섯 학부로 나눌 수 있을 거예요. 초콜릿을 좋아하는 학생과 싫어하는 학생으로 나눌 수도 있겠죠.”
교수의 긴 손가락이 책을 간지럽히듯 쓸어내리는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몬스터를 분류하는 법도 이와 같이, 목적과 용도에 따라 각기 달라요. 학술적으로는 몬스터를 생물학적 종과 형태로 분류하지만, 이 수업에는 유난히 검술부 학생이 많기 때문에 크기로 분류하는 것을 메인으로 할게요.”
흐린 청안이 반짝 빛났다. 나는 순간 그에게 경도되었다.
“사냥 가능한 몬스터를 분류하는 방법이죠.”
스티븐 교수가 다시 몸을 돌렸다. 칠판 위에 크게 그려 둔 도표에 소형, 중형, 대형, 초대형. 크게 세 가지 항목을 적은 뒤 그 옆에 숫자를 적었다. 0~2m, 2m~8m, 8m~30m, 30m~.
“초대형 몬스터는 체고, 즉 지상에서부터 개체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가 30m 이상일 경우를 말해요. 체고가 50m에 달한다고 하는 드래곤이 초대형 몬스터의 대표로 손꼽히죠. 하지만 실제로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기록은 신화 속에서나 볼 수 있어요.”
스티븐은 또 적었다. 와이번, 오우거.
“대형 몬스터 중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와이번과 오우거예요. 이들은 본신에 지니고 있는 마력이 강하기 때문에 마법이 통하지 않아요. 이들을 상대하는 법은⋯.”
그 뒤로는 책에도 적혀 있는 설명을 풀어 해설해주는 것이었다.
날개를 가진 몬스터들의 몇 번째 날개 마디를 공격해야 쉽게 비행을 저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와이번과 오우거 등 대형 몬스터를 공격할 때에는 눈, 입, 항문처럼 여린 부분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 트롤과 미노타우르스 등의 중형 몬스터를 공격할 때에는 목을 단숨에 쳐내야 한다는 것, 고블린과 오크 등의 소형 몬스터를 처치할 때에는 포위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 등의 조언도 있었다.
지금껏 발견된 오우거의 종류만 해도 피부가 푸른 것, 붉은 것, 머리가 두 개인 것, 세 개인 것 하는 식으로 무척 다양하다고 했다.
사람들마다 성격과 태도가 다른 것처럼 몬스터들도 개체마다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외운 것을 신봉하기보다 직접 살펴보고 관찰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했다.
마엘로 샌슨이 이전에 언질해 준 이야기가 있어 이해가 쉬웠다. 깊게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에 열중했다.
뜻깊은 수업을 마치고 나니 루베르가 또 외출을 하고 싶다 졸랐다.
2월 둘째 주였다.
아직 해가 짧아 벌써 밖이 어두웠다. 지난 겨울 방학에 인사 한 번 안 하고 길을 서두른 죄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금까지 손을 잡아달라 안아달라 응석을 부리는 것을 전부 들어 준 나였다.
그러나 매번 금요일마다 놀이에 시간을 쓴다면 내게도 루베르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쉬이 대답하지 않고 버티고 섰더니 루베르가 처량한 눈을 하고 눈치를 봤다.
“안 돼?”
"예. 이번 주 내내 일이 많아 조금 피곤합니다."
"⋯내일은?"
"선배는 내일 공부하실 것이 적습니까?"
루베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가 묵묵히 말을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쓰였다.
원래 나이 든 것들이 제 아들은 엄하게 가르쳐도, 손주가 떼쓰는 것은 이길 수가 없다지 않은가. 나 또한 절로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애써 다잡았다.
손을 뻗어 보들한 뺨을 가만 쓸어주었다. 아이가 까만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굳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을 곧게 올려다보며 다정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매주 놀러다니며 이 시간을 해이하게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그때 다시 한번 식물원에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응. 그러자."
"옳지."
그래도 말을 하면 곧잘 듣는 것이 마음에 들어찼다. 착하다 하고 머리를 가만 쓸어주었다.
루베르를 아이 취급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받는 아해가 꺼리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니 이래도 되는가보다 싶었다.
그 대신 주말에 루베르를 달래주기 위하여 식사 후에 산책 시간을 길게 갖기로 약속했다.
또 손가락을 걸고 싶다 하기에 그렇게 했다. 맞잡은 아해의 손이 뜨끈뜨끈한 것이 아기같고 귀여웠다.
방에 돌아와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쉐이든이 떨떠름한 티를 냈다.
"요즘 2황자와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 아니야?"
"으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한데."
제니가 지난해에 준 화분은 무럭무럭 자랐다. 초록 잎이 다섯 장이나 뻗었다. 여전히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은 쉐이든의 몫이었다.
한 뼘 크기로 자라난 식물은 아직 꽃을 틔우지 않았고, 흔한 잎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직 어떤 식물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햇볕이 가장 뜨거운 때에 물을 주면 잎이 탈 수도 있다는 핑계로, 쉐이든은 매일 밤마다 내 방에 와 화분을 돌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를 도와주고는 했다.
방학 기간 동안에는 시종에게 화분을 부탁했었으니, 굳이 그가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알아 고맙기만 했다.
나는 쉐이든을 위해 차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외숙부에게 들어보니, 1황자가 여름 즈음 옐디더스 공작가와 사돈을 맺을 것이라 하더라."
"뭐? 옐디더스랑?"
"그러면서 옐디더스가 사라스 강을 막고 서서 발렌티아와 율란이 무역하는 것에 훼방을 놓는다는 말도 들었다. 외숙부는 내가 2황자를 지지하는 것을 옳게 본다고 하시던데."
"어어⋯. 그럴 수도 있겠네. 아니, 옐디더스는 플로이드 왕국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화분의 잎을 반짝거리게 닦아준 쉐이든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다과를 꺼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또 모르지."
"그리고 또 뭐라고 하셨어?"
"나보고 얼른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어 웨슬리를 막으라고 하시지."
"와, 거의 확정인 것처럼 이야기하네. 소드 마스터들은 그게 보이나?"
"일단, 내후년까지는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걸 알 수 있어?"
"암."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내후년이면 단전도, 근골도 좀 더 준비가 될 터였다. 그즈음에는 초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다음의 일이야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것이겠지만, 소드 마스터까지의 길이야 이미 걸었던 길이었다. 때문에 크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졸업 이전에 초절정의 벽을 넘는다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했다.
쉐이든과 마주 앉으면 할 말도 들을 말도 많았다. 나는 곧 다른 화두를 꺼냈다.
"네가 보기에, 마리앤은 요즘 괜찮게 지내는 것 같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