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 (132)화 (132/176)

132.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

나는 본래 매일 새벽 기숙사 뒤쪽의 연무장을 돌고, 운기조식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검술 수업이 시작하기 삼십 분 전에 검술 수업이 있는 대연무장에 나가 마엘로 샌슨을 기다리고는 했다.

지금까지 내내 그러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발터 오르겐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여 대연무장으로 가는 길 중간을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함께 고급 검술을 듣는 아해들이 기다릴 것을 빤히 알면서도 어제 점심에 본 것이 쉬이 잊혀지지 않아 망설이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 사람 다니는 길에서 그런 짓을 한 놈들의 잘못이니 내가 민망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어도 걸음 떼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 때, 여어. 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꼬맹아. 우리 할 얘기 있지?”

“⋯.”

나는 예, 아니오 소리도 하지 못하고 어깨에 팔을 걸치는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긴 머리를 잘 땋아 뒤통수에 올려 딱 붙인 모습이었다. 녀석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수업시간보다 일찍 나오는 나를 미리 알고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연무장 옆에 작게 서 있는 창고 뒤편으로 나를 끌고 간 발터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의외로 깍듯한 태도로 사과부터 했다.

“일단, 험한 꼴 보게 해서 미안하다.”

“예? 아니, 아니⋯ 아닙니다.”

“어젠 정신이 없어서 챙겨 줄 생각도 못 했네. 놀라서 거의 기어가던데. 길은 안 잃었어?”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발터 오르겐은 생글생글 잘도 웃었다.

그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휘어지는 것이, 이전에는 사람 좋게만 여겨졌는데 오늘 보니 꽤 야살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아이의 태도가 스스럼없기에 나 또한 당당하게 굴기로 했다.

“어제는 잠시 싸우신 겁니까?”

“뭐, 말하자면 그렇지?”

“⋯아.”

“아니, 그렇게 굳어있지 않아도 돼. 나 정말 괜찮다니까. 형은 몰라도, 나는 형이 내 거라고 사방팔방 소문내고 싶은 사람이야.”

형.

그 말에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격정적인 표정이 떠올라 당혹했다. 연인이 싫어하는 호칭을 굳이 입에 올리고 다니는 것을 보니 의외로 짓궂은 구석이 있는 놈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멀거니 서 있으니 발터가 내 어깨를 툭, 두드리며 다시 한번 웃었다. 희고 고른 이가 환한 인상을 더했다.

“수업 시작하겠다. 일단, 다음에 얘기하자. 신경 쓰지 마, 별일 아니었으니까.”

“아⋯ 예.”

무슨 얘기를 더 할 것이 있을까.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았는데.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 지금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삿된 이야기를 쉬이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오늘 고급 검술 시간에는 루베르와 루실라가 대련장에 올랐다. 어제 비도를 던지며 잠시 잊었던 장면과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뛰어노는 탓에 대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알았다.

내가 시어런에 살게 되어 그런 것인가? 겨우 남들의 연정 추이에 이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지난 수십 년을 연모와 연정이 무엇인지 모르고도 무척 잘 살았다. 편안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악적을 처단하고 혈족과 선인을 돕는 것으로도 충만한 기분을 느꼈다.

몸이 젊어졌다고 마음도 젊어진 것인가 싶다가도, 아무리 그래도 생각까지 어려져서야 되겠나 싶어 절로 혀를 끌끌 차게 되었다.

오늘 대련에서 이긴 것은 루실라였다.

루베르가 조금 시무룩한 낯으로 내게 쪼르르 와서는 대련에서 실수가 많았던 것이 마음 쓰인다 말을 꺼냈다.

그러나 내가 그 대련을 자세히 보지 못하여 해설해 줄 것이 없었다. 괜찮다 잘했다 하고 말을 말았더니, 시무룩한 아이가 더욱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다음번에는 내가 꼭 지켜보겠다 하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도 했다.

재롱잔치 하는 어린 아해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꼴인가 싶었지만, 하는 모습이 귀여워 그리 하였다.

동무들과 함께 있으니 수업이 끝나고도 발터와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남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다음을 기약했으니 가타부타 말없이 눈인사만 하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속으로는, 발터가 상식적인 인간이어서 내게 민망한 소리를 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객쩍은 소리를 했다면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달아나 버렸을 나를 알았다.

여전히 속이 시끄러웠다.

* * *

목요일 오후.

메이지 볼더 우는소리가 팽가 놈 고함 소리보다 시끄러워 귀를 막았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처음 보는 볼더였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장년인이 앵앵거리며 떼쓰듯 말하는 것이 거북했다.

“왜! 왜 그냥 두고 갔어요! 움직이지 않는 마나 결정이 생성되는 건 지금까지 다른 마나 포집 과정에서도 발견되었던 거라서, 이렇게 될 게 빤히 보였단 말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중단전을 사용하지 않고 운기조식을 하여서 마나결정이 랜덤으로 생성되는 것을 방지하거나, 고덱스메타미가 포션을 사용해서 마나결정 방지 약물에 포집한 마나가 일정한 흐름을 갖고 머무르도록 만들 수 있었는데!”

“아⋯예.”

“그렇게 즐긴 방학은 어떠셨나요! 즐거웠나요! 신나던가요! 행복했겠죠!”

“예.”

“듣는 척이라도 좀 해 주세요! 제가 지난 두 달간 영식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래서 제가 뭐부터 하면 됩니까?”

더글라스가 웃음을 삼키며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볼더가 몇 마디 더 쏘아붙이고는 냉큼 자신이 들고 온 문서 꾸러미를 열었다.

보고서 가득 쓰여진 단어의 절반은 설명을 들어도 모르는 것이었지만, 절반의 절반은 설명을 들으면 알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는 나머지가 내가 해결해 주어야 할 문제이자 숙제였다.

드디어 그 빌어먹을 골렘이 운기조식을 멈췄다.

볼더는 골렘의 손발가락에서 또각또각 마석을 빼내더니, 예리한 단검으로 골렘의 가슴팍을 단번에 갈랐다.

골렘의 중단전에 어른 주먹만 한 파란 구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봐요, 이게 지난 10월부터 약 4개월간 운기조식을 통해 생긴 마나의 결정이에요. 겨울 방학 시작 전에는 새끼손톱만한 크기였는데, 이만큼 커졌죠.”

징그럽지도 않은지 골렘의 내부를 헤집어서 기운이 흘러 처음보다 두꺼워진 통로를 자로 너비를 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금 적응이 되어 처음처럼 구역질이 나진 않았다. 그저 저 자와 더 가까워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나 했다.

그러고 보니 루베르는 매양 보지만, 에드윈 그 아이는 잘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워낙 머무르는 생활공간이 동떨어져 있다 보니 언제 한 번 얼굴을 봐야지, 해도 챙기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한 것을 눈치 챈 것인지, 볼더가 마나 결정을 쥔 손을 내 앞에 휘적거렸다. 눈을 바로 뜨고 무엇인지 모를 액체로 축축한 볼더의 손을 얼른 피했다.

골렘의 창자를 가지고 놀던 것은 다 끝이 난 모양이었다. 참 다행스러웠다.

“처음 결정이 생기기까지의 과정은 길었지만, 시드가 생긴 이후로는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어요. 일반적인 마석보다 순도가 높아요. 확실히 운기조식 과정이 마나를 포집하는 것에는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죠.”

“포집이 뭡니까?”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정한 물질 속에 있는 미량 성분을 분리하여 잡아 모으는 일을 포집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에는 대기 중에 있는 마나를 끌어모아서 몸속에 쌓는 일을 말하는 거죠.”

“아. ⋯순도가 높다는 건?”

“예전에 진기도인을 받았을 때 저와 머스탱 교수님이 피부로 노폐물을 배출했잖아요?”

“그랬죠.”

“시어런에서는 마나를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거든요. 필터나 정화 장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 없어요.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만큼 다시 내보내는 식이죠. 이건 마법사도 기사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렇죠.”

“하지만 운기조식을 할 때에는 횟수가 더해질수록 혈도와 마나 그 자체 내에 있는 순정하지 않은 것들을 배척하는 기운을 보이더라고요.”

“하늘의 선한 의지를 받드는 일이니까요.”

“그, 예. 뭐⋯. 종교인같은 소리지만, 맞는 말이긴 하죠⋯.”

종교인이라고? 그러고 보니 시어런에서는 종교인을 만나 본 일이 없었다.

아홉신 창세신화에 대해서는 그토록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그 신전이란 것들은 어디에 박혀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은 신의 힘을 사용할까, 아니면 마나를 쓸까.

볼더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서 설명해주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나는 성실히 들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말이 많다는 것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열심히 떠들어대던 볼더가 본론을 입에 올린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지금 에른하르트 영식의 아랫배에 살아있고 움직이는 마나 결정체가 있는데, 골렘이 만드는 것은 마석처럼 동결된 마나인 것이 문제잖아요. 영식은 그 원인으로 운기조식 과정에 사람의 의지가 깃들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했고.”

“예.”

“그래서 오늘부터는!”

“저와, 메이지 볼더가 교대로 운기조식을 해 보려고 합니다.”

볼더가 한참 떠들어대는 것을 방치하고 서 있던 더글라스가 끼어들었다.

네, 네! 하고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볼더를 한 번, 더글라스를 한 번 바라 본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어코 하는구나.

미리 더글라스에게 언질을 들은 바 있어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볼더가 제가 먼저 하겠다고 강력히 주장해주어 다행이었다. 허락하면서, 그가 가부좌를 틀고, 양손을 무릎 위에 얹는 것을 보았다.

“이 자세가 맞아요?”

“예. 손은 좀 더 살짝⋯계란을 쥐듯이 둥글게 말아서. 예, 입 다물고. 허리 더 펴고. 가슴 쫙 열고. 턱은 살짝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느낌으로. 눈은 감아도 좋습니다.”

나는 속으로, 창궁대연신공의 구결을 제대로 전해 듣지 못하였는데 그 모양과 방향만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과연 볼더는 삼십 분간 용을 쓰더니, 삼십 분은 서클을 풀어 돌렸고, 한 시간 동안 울고 떼를 썼다.

지켜보는 내내 무척 피로하여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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