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금요일 오전, 중급 검술 시간이었다.
오늘도 빌이 시끄럽게 난장을 피울 것을 예상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나섰건만, 어쩐 일인지 수업 내내 아이가 입 한 번 열지 않고 조용했다.
시끄럽던 아이가 얌전해지니 그것 또한 마음이 쓰여 자꾸 살펴보게 되었다.
내 따져보니, 하는 짓은 평소와 꼭 같은데 입에만 단추라도 채워 둔 사람처럼 꼭 다물고 있었다.
하도 궁금하여 아이를 불러다가 슬쩍 물어보았더니 소근소근 내 귓가에 속닥거리는 내용이 또 기가 막혔다.
“미카엘 형님은 조용한 사람을 좋아하신다면서요. 제가 다 들었어요.”
“⋯어어⋯. 옳지. 그렇지⋯.”
말을 하면 고쳐지는 것이었다고?
입이 닳도록 조용해라 얌전해라 생각해라 염불을 외워도 통하는 일이 없던 팽가 놈을 떠올리고 아이를 서운하게 대한 것이 아닌가 싶어 반성하게 되었다.
무척 미안한 마음에 속이 쓰려 아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짤뚱한 머리가 까슬하니 밤송이 같았다.
어여쁘다 착하다 칭찬하고 있으니 멀거니 보고 있던 루베르가 다가와서는, 제가 빌에게 일러두었다 하고 뽐을 냈다.
그래그래 너도 착하다 하고 보들보들한 녀석의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옆에서 벤자민이 빤히 보고 있기에, 너도 해 줄까 물었더니 아이가 크게 놀라 질색하였다.
웃음을 참는 일이 고역이었다. 한참을 참다가 점심을 먹던 중에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 곤란했다.
금요일 오후에는 루베르와 둘이 몬스터학 개론을 듣는 시간이었다.
시간표를 짤 적에는 쉐이든도 함께 수강하기로 하였던 것을, 루베르가 같이 있을 것이다 말을 했더니 몹시 꺼려하며 저는 다음 해에 듣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쉐이든이 루베르를 불편해 하는 것은 알았지만 같이 수업을 듣는 것도 못 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잠시 놀랐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싫을 일도 아니다. 쉐이든 그 아이가 루베르 앞에만 서면 격식을 차리는 말투로 샐샐거리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어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여러 차례 헤매던 나였다.
차라리 루베르와 둘이 수업을 듣게 된 일이 참 다행이다 하고 좋게 여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루베르와 나란히 교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이가 문득 내게 물었다.
“에른하르트 영식. 내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그, 어제 말이야. 아침에⋯오르겐 선배와 무슨 이야기를 했어?”
어제 오후에는 볼더 때문에 정신이 하도 없어 잊었고, 오늘 오전에는 빌을 신경 쓰느라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아이가 그새 그걸 어찌 봤을까. 발터와 있던 일을 전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루베르도 엇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더랬다. 나보고 남색을 하냐고 물었던가?
문득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이전에 우연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응.”
“남자끼리 혼인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하던데요.”
“어?”
루베르가 매우 당혹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툭 놓았다.
책과 필통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잡아 다시 그 손에 돌려놓았다.
얼이 빠진 아해가 쥐여 주는 것도 제대로 못 붙잡기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다시 책을 감싸게 하였다. 아이가 양 팔로 책을 끌어안았다.
훌쩍 큰 키에 성년을 향해 가는 소년이 하기에는 귀여운 자세였으나,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나중에 이 나라의 황제가 될 루베르였다. 해당 법안을 개정하는데 황제의 의지가 담겨있지 않다면 쉽지 않을 것이었다.
아직 해당 법안에 대해 조금도 모르는 나였다. 그저 뜻 없이 물은 말에 아이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나도⋯마침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 그래요.”
“어⋯. 어⋯. 그런데 어떻게⋯우연히 그런 이야기가 나왔어?”
루베르가 몇 번이나 말끝을 흐리며 안달을 했다. 발터의 일을 시시콜콜 떠들어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말끄럼 올려다 보았다. 나 궁금한 것이나 다시 물었다.
“왜요?”
“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이가 또다시 시뻘겋게 익었다.
오늘 오전에는 빠릿빠릿하고 귀염성 있게 굴더니만, 왜 이렇게 갑자기 아둔해져서 버벅거리는지 몰랐다.
갑자기 열이라도 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그런 적이 없었지만, 어린아이들은 원래 자주 열이 나고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 미하엘도 종종 열이 나고는 했다.
대개 무인이란 앓아눕는 일이 많지 않지만 이 아이는 워낙 시들시들하고 가여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손을 들어 아이의 뺨과 이마에 손을 대어 보았다.
아이가 어어, 하고 몇 번을 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리다가 곧 얌전해졌다.
그래도 겨울 동안 내 키가 조금 크긴 한 모양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아이의 이마에 손을 댔을 때에는 좀 더 어깨가 불편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나 했다.
“열이 좀 있으십니다.”
“아냐, 그⋯가끔 이래.”
“압니다. 건강에 유의하세요.”
“으응⋯. 조심할게.”
“꿀물이라도 타 드시고.”
“⋯꿀을?”
“그래야 기운이 나지요.”
“아, 그렇지. 당연하지. 단 걸 먹어야⋯. 그래⋯.”
중원의 귀한 집에서는 아픈 아이에게 석청을 먹였다. 가끔 꿀에 재운 인삼정과 따위를 먹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제갈 아무개가 선물해주어 나도 한 번 맛본 적이 있는데, 영기(*영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가 서려 있어 달고 맛이 좋았다.
시어런에도 비슷한 것이 있으면 구해와야겠다 생각했다.
아이는 한참을 묵묵히 말을 아끼더니, 교실에 도착해서 문을 열기 직전에 갑자기 내 팔뚝을 붙잡았다. 왈칵 쏟아내듯 내뱉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이 얘기, 이따가 다시 해도 될까?”
“그러세요.”
별일도 아닌 것을 아주 비장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하 소리 내어 웃었다.
* * *
몬스터학 개론을 가르치는 스티븐 맥클리프는 평범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밤색 머리에 흐린 청안, 곱게 생긴 턱선⋯. 저런 얼굴에 안경만 가져다 씌워놓으면 딱 마리앤 취향이 아닌가 싶을 만큼 곱상한 얼굴이었다.
하긴, 마리앤 그 아이는 번쩍번쩍거리는 것을 좋아하지. 금방 생각을 접었다.
제일 앞줄에 앉아있던 근로 장학생이 벌떡 일어나 수업에 들어온 모든 아이들에게 책을 한 권씩 나눠주었다.
두껍게 제본되어있는 책의 표지가 도톰하여 만지는 맛이 있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된 겉면 위에 금색 인장을 꾹 눌러 찍어 문양을 새겨 둔 것이 신기했다.
나만 신기한 것이 아니었는지, 아이들 모두가 책의 장정이 멋지다 예쁘다 하며 소란스러웠다.
스티븐은 아이들이 책을 모조리 배부 받기를 기다렸다가, 그 고운 얼굴에 방글방글 미소를 가득 달고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번 학기 동안 여러분들께 몬스터에 대해 가르치게 될 스티븐 맥클리프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받은 책은 오크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에요. 만져보니 어때요, 아주 매끄럽고 부드럽죠?”
“악!”
여기저기서 책 던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스티븐 교수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놀라 난장을 피우는 것을 둘러보면서도 조금도 표정이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던져도 어차피 시험 기간엔 잡아야 하는 거니까, 얼른 주워요. 3초 안에 주우면 먹어도⋯아, 지금 이건 농담입니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일단 방금 나누어 준 책의 제일 앞장을 펼쳐서 자기 이름을 적는 것부터 시작할까요? 비싼 놈이라 의외로 훔쳐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꺼림칙하긴 했으나, 그래, 그 괴기한 골렘의 얼굴도 매양 보니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몬스터의 가죽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 표지를 넘겼다.
슬쩍 루베르를 넘겨다보았는데, 의외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라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루베르가 첫 페이지를 펼쳐 목차를 훑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 얼른 이 쪽을 보았다. 그
뺨에 아직 홍조가 어려있는 것을 보고 그래그래 등이나 토닥여주고 다시 보던 것이나 보라 속삭였더니 아이는 그렇게 했다.
스티븐은 책장을 두 장 더 넘기라고 했다. 책의 목차를 건너자마자 큰 글씨가 보였다.
-몬스터란?
“여러분은 몬스터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신의 저주? 마나의 결집? 끔찍한 재앙?”
스티븐 교수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조곤조곤했다. 그 얼굴 생김새와 꼭 닮았다.
책에 한 번 크게 놀란 아이들이 매우 집중하여 실오라기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 조용한 교실이었다. 교수의 목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현재 시어런 제국의 몬스터 대응 부서는 몬스터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마력, 변이, 생명체.”
유난히 한 글자 한 글자 나누어 또렷하게 발음한 덕분인지, 그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단어가 머리에 박혔다. 나는 책에 그대로 적었다. 마력 변이 생명체.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유일 산맥 너머는 고농도 마력이 응축되어있죠. 몬스터의 주 서식지가 바로 그 곳이고. 혼돈과 질서, 마력의 충돌 사이에서도 견뎌낼 수 있도록 진화한 생명체가 바로 몬스터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몬스터는 새끼를 낳고, 새끼를 기르고, 나이가 들면 죽어요. 마법 생물이나 정령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죠.”
“⋯.”
“번식이 가능한 존재를, 우리는 생명체라고 불러요. 하지만 몬스터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매우 흉포하죠. 몬스터와 맹수는 무엇이 다를까요. 연구자들은 마경의 마력이 그들을 본래보다 흉포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스티븐은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가죽과 살, 뼈와 근육, 힘줄과 피를 가릴 것 없이 농도 짙은 마력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집요하고 끈끈한 마나의 품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태초의 생명체가 진화한 끝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이때에 진화론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여 어리둥절했다. 다행히도 나와 같은 아해들이 몇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검을 열심히 수련한 자의 자녀가 조금 더 검을 잘 쓸 수 있게 된다거나, 마법을 잘 쓰는 이의 자녀가 마법을 조금 더 잘 쓰게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늘상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피로 이어지는 것이다. 혈족에 담긴 승계였다.
혈연을 끈끈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원래 검을 익히기 좋은 핏줄이 있고, 원래가 머리가 좋은 핏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니.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고 고양이는 고양이를 낳았다. 지금껏 그렇게 알고 살았다.
어느 환경에 닥친 짐승의 깃이나 피부가 대를 이어 더 희어지거나 질겨지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저 감탄만 나왔다.
이무기가 용이 된 뒤에 낳은 자식은 이무기인가, 용인가?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첫 수업은 그렇게 몬스터가 생명체로 분류되는 이유에 대해서 내내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루베르가 할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내 손목을 잡았다.
날이 추워 아이가 감모(*감기) 들 것이 걱정이 되어, 내 방으로 가자 했더니 루베르가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널 잡아먹지 않는다 하고 몇 번을 달래어 방으로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