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오르겐 가문에 대해 아느냐 하는 말이 첫머리에 나왔다.
귀족 연감 수업에서 선배의 이름자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내젓자, 하긴 네가 알 리가 없지. 하고 폭 한숨을 내쉰 쉐이든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성씨가 있는 자들은 모조리 귀족이고, 귀족들은 귀족 연감에 기록되는 것이 당연했다.
부끄러운 사건사고를 널리 공표하지 않고자 한다면 일정 비용을 내고 시중에 풀리는 귀족연감에서 해당 사건사고를 제외할 수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귀족의 성씨를 달고 있다면, 귀족 연감을 들췄을 때 누구와 누구가 결혼했고 누가 태어났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함이 마땅하고 당연했다.
그러나 발터 오르겐은, 오르겐 가문은 달랐다.
여러 세대 전의 이야기였다.
미친 황제의 편을 들어 귀족 가문들을 때려잡는데 앞장선 오르겐은 그 당시에는 무척 세가 거대한 가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도망을 친 이후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그렇게 달아난 것이 한두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르겐은 쉬이 잊혀졌다.
이제 와서는 유명무실해진 성씨였으니, 모두 내가 오르겐이다 하고 나서는 이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발터 오르겐이 제 성씨를 달고 시어런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갓 열다섯이 된 발터 오르겐이 오르겐의 작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그런 일은 귀족 연감 관리감찰 부서에서 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당시에도 해당 부서의 업무와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발터 오르겐이 아카데미 학생이기 때문에, 오르겐에 대해 조사하는 것은 칼립스의 업무였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수업을 듣고 있는 듯 차분해져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과, 둘이 연인이 된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
“원래 사랑은 갑자기, 불현듯,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피어나게 되는 거잖아.”
“⋯.”
그래서 그 둘이 그렇게 싸우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엉뚱한 소리로만 들렸다.
“⋯그래서?”
“칼립스 교수님이 오르겐 선배를 관찰하는 도중에⋯. 아무래도, 선배는 검술부 학생이잖아. 미행을 쉽게 눈치챈 모양이야. 그런데, 선배가.”
“어.”
“⋯칼립스 교수님이 계속 오르겐 선배를 신경 쓰고 바라보는 게, 자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거야.”
“뭐?”
나는 아연해졌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내가 아는 발터 오르겐은 쾌활하고 다정한 성미의 사내였다. 없는 말을 지어낼 놈이 아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지나치게 당혹한 것으로 보였는지, 쉐이든이 내 어깨를 도닥이며 차를 권했다.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들어 봐, 그⋯ 오르겐 선배 입장에서도 그런 말이 나올 만 했대. 가문이 그렇게 되고, 발터 오르겐 선배는 좀 힘들게 자랐다나 봐. 부모님이 서로 바람을 피우고, 이부형제랑 이복형제가 많아서 물려받을 것은 이름과 허울뿐인 작위밖에 없었다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냥 칼립스 교수님이 계속 자길 바라보고 따라다니는 게 너무 이상해서 친한 친구한테 물어봤대. 도대체 저 교수가 왜 나를 보고 있는 거냐고. 그랬더니 친구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라고 말했다고.”
“아니.”
“그래서 선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칼립스 교수님이 동안이니까 나이 차이는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대. 직장도 탄탄하고 생긴 것도 취향이고 무엇보다 이렇게나 나를 사랑해주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나 봐. 그래서 어필했더니 고백할 거면 졸업부터 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아니⋯!”
“그런데, 졸업하고 고백을 했을 때, 교수님이 안 받아줬대. 교수님 입장에선 당연하지, 이제 막 졸업한 아카데미 학생이기도 했고⋯. 애초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를 않았었나 봐. 오르겐 가문에 대해 조사하는 업무도 거의 다 끝난 시점이었어서.”
나는 다시 차를 들이켰다. 속이 탔다. 쉐이든은 허허 웃었다.
“그러고 나서 오르겐 선배가 졸업을 유예한 거야.”
“⋯네가, 아니, 그, 로건 그 아이는 이런 일을 어찌 알았다고 하더냐.”
“아무래도⋯. 둘 사이의 문제가 커지니까, 작게 청문회를 열었었나 봐⋯. 교수와 학생 사이의 일이니까 아카데미가 개입해서⋯. 그래서 알음알음 이야기가 새어 나왔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라고 하더라.”
나는 발터 오르겐이 대련에서 지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아주 미약한 속도로 엇나가는 검을 마엘로 샌슨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 그는 이미 일류의 수준을 벗어난 지 오래인 것인가? 적어도 절정 이상의 경지에는 올랐을 것이었다.
이번에 싸운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교수는 계속해서 졸업을 종용하고, 아이는 계속해서 내 마음을 받아 달라 뻗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접문은 한다고? 그것은 또 강제된 행동이 아닌 것인가?
머릿속이 한참 복잡했다. 쉐이든이 뭔가 어물거리길래 어서 말하라 재촉했다.
“나는 오르겐 선배를 응원하는 입장이거든?”
“⋯왜?”
“그 청문회에 칼립스 교수님을 포함한 교수님들 몇 분이랑, 교장, 교감, 그리고 오르겐 선배랑 그 친구들 몇몇이 참석을 했다고 해. 그런데 오르겐 선배가 거기 연단에 서서, 눈물을 이렇게 뚝뚝 흘리면서 교수님에게 물었다는 거야.”
“뭐라고?”
“정말 조금도, 아주 조금도 날 사랑하지 않은 거냐고.”
“허어어어어⋯.”
“그런데 칼립스 교수님이 대답을 못 했다는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럼 안 좋아했다는 말이 아니냐?”
“아니지! 본인도 본인 마음을 모르겠다는 거 아니겠어?”
“아니, 대체 왜 그런 자리에 사람들을 모아두고 그런 난장을 피운단 말이냐?”
“내가 알아?”
⋯그도 그랬다. 나는 입을 닫았다.
“어쨌든 칼립스 교수님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공표했고, 오르겐 선배는 미리 졸업 유예를 신청한 것이 허가가 나서 다시 일 년 더 학교를 다니게 되었거든.”
“그래.”
“그런데, 그 뒤로 선배가 대놓고 칼립스 교수님을 쫓아다녔대. 교수님이 오르겐 선배를 안 좋아해도, 오르겐 선배가 교수님을 좋아하니까 상관없다고. ⋯2년 동안, 졸업을 유예해가면서.”
“그런 미친놈을 다 봤나.”
쉐이든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는 평소에 욕설을 하는 일이 없었다. 헛기침하여 목을 가다듬고 계속 말하라 했다.
쉐이든은 서먹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세기의 사랑이지⋯. 어쨌든, 내가 아는 건 이 정도야. 지금은 거의 공식 커플 취급 받는대.”
결국 오르겐이 열심히 쫓아다니다가 구애에 성공했다는 말이었다.
그럼 아까는 왜 그런 꼴을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런 마음에 심란해져 있었더니, 쉐이든이 이번에는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냥 그 둘이 건물 뒤에서.”
“응, 건물 뒤에서?”
“⋯크게 싸우고 있기에.”
“아아⋯. 아무래도 오르겐 선배가 이번에도 졸업 유예를 한 것 때문이 아닐까? 그, 어쨌든 아카데미는 지나가야 할 관문일 뿐이잖아. 칼립스 교수님 측에서는 본의 아니게 계속 오르겐 선배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졸업해서 황궁에서 일하는 기사가 되면 되는 것 아니야?”
“글쎄⋯. 가문 뒷배 없이 황궁에서 일하려면 일단 유일 산맥에서 몇 년 복무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들었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실전으로 단련한 뒤, 실력이 좋아지면 황궁기사단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루트니까.”
“⋯.”
“그렇게 갑자기 멀리 떨어지게 되면⋯. 내가 오르겐 선배라면 불안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우리 나이면 몰라, 이십 대가 넘어가면 장거리 연애는 피하는 편이거든. 앞으로 생활반경이 어느 정도 겹쳐야 혼인도 할 수 있는 거고.”
“⋯그 둘은 둘 다 남성인데, 혼인을 할 수가 없지 않아?”
“그래서 더 그럴걸. 지금 둘이 헤어지면 성씨를 공유할 수 없잖아. 제국법도 슬슬 바뀌어야 된다는 여론이 있기는 한데, 아직은 멀었지.”
“⋯.”
나는 남자끼리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내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은 탓이었다. 아니, 중원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던 탓이었다. 내가 생각해 본 적 없던 분야의 것이어서 그랬다.
쉐이든은 윗윗대 선배들은 대부분 알면서도 쉬쉬하는 이야기이니만큼, 나도 다른 곳에 이야기를 내돌리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야기해주어 고맙다 인사하고 쉐이든의 응접실에서 나오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했다.
앗차.
수요일 오후에는 제국의 계보 수업과 실전 비도술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놀라고 혼란했던 와중이라, 비도술 수업을 빼먹은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이번 학기 시간표를 정할 적에, 수업을 꼭 듣고 싶은데 아쉽다 서운해 하였더니, 제비뽑기에서 뽑힌 아해들 중 세 명이나 내게 기회를 주느라 자리를 양보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중한 수업을 첫날부터 빠졌다는 것이 무척 미안했다.
허겁지겁 비도 연습장으로 향했다.
* * *
총 세 시간의 수업 중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 둔 차였다.
윌턴 로버츠는 뒤늦게 비도 연습장에 들어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민망하고 죄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이전 학기에도 이 수업을 듣지 않았나?”
“⋯제 실력에 미흡함이 있어 교수님께 조금 더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오늘 일이 있어 수업에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이번 학기에는 10번. 한 사람 뒤에 네 차례가 올 테니 대기하도록.”
“예!”
다행스럽게도 수업 내용이 지난 학기와 동일하여 재차 설명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얌전히 순서를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왔을 때 10m 과녁 앞에 섰다.
방학 기간 동안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보자는 말에 공연히 긴장을 했다. 호흡을 고르고, 시선을 곧게 하여, 팔꿈치를 사용하되 어깨가 흔들리지 않게.
한 번, 단도를 던지는 것을 보자마자 로버츠가 시린 웃음을 흘렸다.
“보지 않아도 네가 어떤 검법을 사용하는지 알겠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예?”
“쾌검을 쓰는군. 속도 위주의 화려한 검법에, 스텝을 중요시하는. 속도는 괜찮았는데, 시선보다 약간 높은 곳에 단도가 명중한 게 의도한 것은 아닐 테고⋯.”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겨울 방학 동안 혼자 연습하면서 창천의 도를 담기 위해 비도를 던지는 각도와 속도를 달리 한 것을 단번에 읽어낸 안법에 경탄을 삼켰다.
몇 번 더 피식 새는 웃음을 흘린 로버츠가 자리에 서서, 나처럼 던졌다.
그 호흡 방식과 손끝의 각도, 어깨와 시선까지 온전히 나와 같았다.
나는 창궁대연신공의 법도에 따라 호흡했다. 숨을 삼키고 내쉬는 것에도 알맞은 규칙이 있었다. 겨우 몇 차례 바라 본 것으로 따라할 수 없어야 마땅할진대, 윌턴 로버츠는 무척 간단하게 나를 흉내냈다.
나는 나와 온전히 같은 방식으로 호흡하는 시어런 사람을 처음 보아 눈을 크게 떴다.
“봐. 이렇게 하면 자연히 비도가 바람 위를 탄다. 손목의 옆쪽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렇게⋯.”
나는 얼떨떨하게 윌턴 로버츠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하늘과 바람을 담아 날아오르는 비도라니 믿기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심란하고 괴롭던 마음이 날랜 비도술에 사르르 녹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