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일요일에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수련을 하고 공부할 것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느지막이 나온 쉐이든이 내 곁에 앉는 것을 보고 그리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된다고 일렀으나, 저도 공부할 것이 많아 도서관에 온 것이니 오해하지 말라 큰소리를 치기에 그러려니 했다.
제국의 계보 유인물을 펼쳐두고 앉았다. 익숙한 이름자들이 유인물 위를 뛰놀았다. 유일 산맥 어림에 있는 두 공작가에 대한 설명을 차근차근 읽었다.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베어 넘겨 그 부산물로 마법사를 거느리고 임업에 치중하는 것이 위드로 공작가였고, 산맥의 광물을 캐내고 바닷물을 쏟아부어 철을 단련하는 것이 그림스베인 공작가였다.
두 공작가 사이를 가로막은 산의 끝자락이 이번에 내가 다녀온 엘도스 산이겠거니 했다.
단순하게 생겨 먹은 대륙 전도의 위쪽을 죄다 유일 산맥이 틀어막고 있어 그 너머의 정경을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기에, 사서의 도움을 받아 몬스터와 야생 짐승 도감 따위의 책을 구해 와 자리에 앉았다.
루베르가 언질을 준 다이어 울프에 대한 것을 먼저 찾아보았다.
다이어 울프는 큰 놈의 몸길이가 오 미터가 넘는다고 적혀 있었다. 이 장에 달하는 짐승이라니, 중원에서 그리 큰 호랑이가 있다면 산군 취급을 받았을 터였다.
도감을 살펴보니 다이어 울프란 놈은 몬스터 중에 제일 큰 놈도 아니라 하여 기가 턱 막혔다.
그림책에서 둥글넓적하게 나와 그리 무섭게 여기지 않았던 몬스터 각각의 생김새가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놈들이 떼로 몰려다닌다 생각하니 이 땅의 평화를 의심하게 되었다.
내가 딴짓을 한참 하고 있는 것을 본 쉐이든이 툭, 제 노트로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가려 시야를 막으며 딴소리를 했다.
“오늘 저녁에도 데미한테 밥 가져다주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후유증이 그렇게 심해? 치료 아티팩트를 쓰면 완전히 낫는다고 했는데도.”
“몸은 그렇지.”
내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앉아 있자 쉐이든이 쓰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끔찍하게 아팠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잖아. 우린 그나마 검술 수련을 하고 몸을 단련하다 가볍게 칼침도 몇 번씩 맞고 그랬지만, 데미는 아니니까.”
“⋯그렇지.”
“평생 몬스터라고는 도감 속 그림으로만 봤을 녀석인데, 죽다 살아난 일이 쉽게 잊히겠어? 거의 끌려갈 뻔했다며.”
“⋯.”
“걔는 이겨내거나 싸운 게 아니라, 그냥⋯ 해야 할 일이라서 한 거야. 제니와 마리앤을 등 뒤에 두는 게 자기가 해야만 하는, 자기 몫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엄청 무서웠을걸.“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중원에서도 큰 전투를 겪고 나서 다시는 검을 쥐지 못하는 이들이 왕왕 있었다. 평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허풍을 떨던 것들도 가까운 동무와 친인척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 손을 덜덜 떨었다.
나도 그랬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검을 놓지 않기로 결정한 지 오래였다. 데미안을 물고 가려던 늑대의 목을 단칼에 자른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그 아이가 혼곤한 악몽에서 깨어났을 적에 그를 해하려던 놈은 내 손에 죽어 사라졌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것 말고도 데미안을 도와줄 일이 없을까.”
“글쎄⋯ 데미는 힘든 건 혼자 삭이는 편이라서. 그냥 걱정만 하는 거지, 뭐.”
한숨을 폭 쉬는 쉐이든의 얼굴에 그늘이 서렸다.
녀석의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어 쓰다듬었더니, 녀석 또한 그렇게 했다. 한참을 서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몸싸움을 했다.
도서관에서 장난을 치면 안 된다며 사서에게 주의를 들었다.
저녁 식사를 싸 들고 데미안의 방을 찾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유난이라며 데미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쉐이든과 함께 데미안을 찾아가서 알게 된 것인데, 점심시간에도 쉐이든이 데미안을 위해 식사를 가져다 날랐다고 했다.
지난 학기 초반에 나 또한 쉐이든에게 비슷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씨가 넓고 고운 녀석인 것을 알아 나 또한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결심했다.
웃고 떠드는 데미안의 행동이 내가 보기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마음을 놓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쉐이든의 표정이 단단히 굳은 것을 보고 내가 착각을 하였구나 깨달았다.
그러나 굳이 데미안이 그렇게 힘들어 보이더냐 하는 소리를 입 밖에 내어 쉐이든을 괴롭히지 않았다.
오랜만에 달밤에 나가 검을 그었다.
* * *
월요일.
초급 검술 시간에는 마엘로 샌슨이 짐승과 몬스터의 약점을 찾는 법에 대해 강의했고, 아티팩트 수업 시간에는 위르겐 카이저가 중간고사 이전에 배웠던 응급치료 방법에 대한 해설을 한 번 더 했다.
데미안은 아티팩트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아이들이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는 것이 민망해 혼이 났다며 투덜거렸다. 아이의 표정은 밝았지만 걸을 적에 조금씩 절뚝거리는 것을 알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카데미의 모두가 이번 야영 수업에서 늑대가 나타난 일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처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꼴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후 처리가 기민하였다.
당장은 내가 한 손을 거들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이라고, 나를 달랠 수 있는 여유를 다시 한번 선물 받은 셈이었다.
내가 졸업 후에 제국기사단에서 일하게 된다면 교수진들과 함께 이런 일을 처리하게 될 터였다.
생각해 보면 중원에서는 본받고 싶은 인물이 없었던 것도 같았다.
물론 대단한 이들이야 많았다. 중원 천지가 드넓어 유명한 고수도 많고, 대단한 선인도 많았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을 보며 이 사람을 닮아야겠다 마음먹은 일이 없었다.
그저 강해지는 것, 누구보다 강해져서 이름을 떨치는 것만 바라보고 살았던 것을 이제 알았다.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이기고 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많은 이를 살리면 칭찬을 받았으나, 많은 이를 죽이면 칭송을 받던 시절이었다.
근래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을 종종 했다.
마엘로 샌슨처럼 살고 싶었다.
수많은 아이들을 끼고 살며 그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배움의 길을 열어 주고, 간혹 우스갯소리도 하며 유유히 여생을 마치고 싶었다.
더글라스 머스탱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자신의 뜻을 단단히 세우고 새로운 이치를 연구하여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 또한 부러웠다.
윌리엄 에른하르트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어여쁜 아내를 두고 여러 자식을 두고 금실 좋게 알콩달콩 제 가문을 돌보는 일은 내 평생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가끔은 쉐이든 로제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정이 많아 주변의 모두를 돌보고 세심하게 살피며 돌봐 주는 모습이 좋게 보였다.
이전 생에 협객 놀음을 했던 것은, 제 앞에 놓인 길이 그것뿐이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의 인정이 고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해도 남궁의 방계라는 이름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이번 생에는 받은 것이 차고 넘치도록 많아, 그것들을 누구에게든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게 쏟아지는 애정과 관심을 빚처럼 달아 두는 것은 전생에 이렇게 조건 없는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시어런은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많은 세상이었다. 그 일원이 될 수 있어 기뻤다.
화요일 오후에는 메이지 볼더가 골렘을 가져 와 선보였다.
원래는 지난주에 가지고 오기로 했던 것인데, 마감 일자에 완성하지 못하여 미안하다며 납죽 절을 하는 것을 말리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티팩트 수업 시간에 상처가 쩍쩍 벌어지는 징그러운 골렘을 겪어 본 일이 이미 있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볼더가 가져온 골렘은⋯ 여러 의미로 내 기대에서 벗어나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이게 뭡니까?”
“인체의 뼈와 장기, 혈관을 구성한 뒤 가상의 혈도를 상정하여 구현해 보았습니다! 몸 안에 있는 혈관에 흐르는 부동액에는 마석 가루를 갈아 넣어서 마나나 오러, 혹은 내공 등의 기의 움직임이 있으면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이렇게요!”
“우욱.”
“아름답지 않습니까? 혈관과 혈도를 구분하기 위해 색도 다르게 넣었어요!”
“우우욱!”
너무 징그럽고 괴상하여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저 생긴 것만 대강 인간의 모습을 본뜬 것이 아니었다. 겉가죽이 투명하여 그 내부가 모조리 비쳐 보이는 것이 꿈에 나올까 두려울 만큼 흉측한 모습이었다.
내 많은 사람들의 내장을 두 눈으로 보았으나, 그중 대부분은 핏물로 얼룩져 흐린 눈으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리 멀쩡하게 앉아 있는 인간의 속을 본 일은 당연히 없었다.
게다가 심지어 그 골렘의 키와 얼굴 생김이 낯설지도 않았다.
“⋯저기, 골렘이 당신 얼굴을 닮은 것 같은데.”
“좋은 지적입니다, 샌슨 경! 아무래도 가장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인체를 모델로 하는 게 실물과의 오차를 줄일 방법일 거라고 생각해서요. 허락만 해 주신다면 마엘로 샌슨 경으로도 이런 것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뇨, 전 됐습니다. 거참 반짝반짝하네요⋯.”
투명한 메이지 볼더라니. 골렘이 속곳을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괴로운 낯을 숨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엘로 샌슨이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마엘로가 즐거워하는데 이렇게 울컥한 기분이 드는 일은 또 처음이었다.
더글라스 머스탱이 투명한 두개골을 덮은 칙칙한 머리칼을 한 번 만져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카락 구현은 실제 모델을 복사한 겁니까?”
“아, 그럼요. 베니플라빅스 시약에다가 원본 머리칼을 넣어서 복제해서 가져다 붙였어요.”
“머리카락은 아예 없는 편이 관찰에 좋을 것 같은데.”
“제가 만들긴 했지만 안구랑 치아가 보이는 게 좀 징그럽더라고요. 평소엔 앞으로 넘겨서 가릴 용도로⋯.”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어지간한 일로는 욕설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는 나였으나, 저치의 괴상한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골렘의 머리통 위에 백회혈을 표시해 둔 부근이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끔찍했다.
볼더는 한참을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최대한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마석을 심기 위해 골렘의 손톱과 발톱에 마석을 박았다느니, 가상의 단전을 구현하기 위해 해당 공간의 설계를 어느 어느 방식으로 했다느니 하는 등의 설명이었다.
마엘로와 더글라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나는 흐린 눈을 하고 골렘을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