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마차는 아카데미 방향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트인 창문 양옆으로 어둠이 한껏 내려앉아 있었다. 달빛과 별빛이 울음 스민 아이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사과하자, 아이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사과했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힘들다고 그래서⋯.”
“⋯저 때문이에요.”
“제가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다시 훌쩍 울음이 터지기 전에, 데미안이 힘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아뇨, 저도 힘들다고 핑계 댄걸요. 누구 탓도 아닌 걸 다들 알잖아요.”
“⋯하지만, 저 때문에⋯. 저 지켜 준다고, 앞에⋯.”
“그땐 그랬어야 했어요.”
데미안이 제니의 말을 잘랐다.
“다 잘 됐으니까, 괜찮아요.”
아무리 보아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지만, 데미안이 괜찮다고 말했기 때문에 다들 침울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안 그래도 힘든 아해와 괜한 것으로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이 혼자 걷는 것을 힘들어하여 안아다가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데미안이 식당에 보이지 않아, 쉐이든과 함께 요깃거리를 챙겨 들고 데미안의 방으로 향했다.
데미안은 초췌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창백한 낯을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많이 아픕니까?”
“아니, 괜찮아요. 그냥 꿈자리가 좀 뒤숭숭해서 잠을 설쳤거든요.”
“아침 챙겨 왔는데. 침대에서 먹을래?”
“으음⋯. 응. 그게 좋겠다.”
쉐이든이 데미안을 부축하여 다시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도 식사가 든 쟁반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의자를 끌어다가 침대 곁에 앉아 주스를 따라 준다, 샌드위치를 꺼내 준다 부산을 떠는 우리를 본 데미안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게 할 말이야?”
“그래도, 아픈데 공부까지 해야 하면 서럽잖아.”
데미안이 애써 밝은 표정을 하더니 샌드위치를 크게 물었다. 평소보다 부러 와구와구 먹는 것이 우리가 걱정하는 것을 달래 주려 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천천히 먹으라며 쉐이든이 챙겨 준 주스를 곱게 받아먹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안쓰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조를 짤 적에 검사를 한 조에 한 명씩 넣어 둔 이유가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늑대 따위야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라도 쫓아낼 수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이고, 데미안이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후회가 가시지 않았다.
내 시선이 자꾸만 데미안의 다리를 흘긋대고 있는 것을 알고, 데미안이 웃으며 잠옷 바지를 걷어 올렸다.
흰 다리가 반들반들하니 사슴처럼 고왔다.
내 눈앞에서 소년이 늑대에게 물려 끌려갈 뻔한 것이 바로 어제 일이었다. 거짓말처럼 잇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봐요, 미카엘. 진짜 괜찮아요.”
“⋯예.”
그나마 마법이 있는 세상이라 다행이었다.
중원에서 그런 상처를 입었다면 이렇게 멀끔한 다리를 갖기는커녕 다리가 썩어들어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약초를 개어 만든 고약을 펴 바르고 있었을 터였다.
“환상통인가, 그건 괜찮습니까?”
“하하⋯. 사실 아직 좀 절뚝거리게 되긴 하더라구요. 그렇게 아파 본 적이 난생처음이라서 아직 좀 뜨끈뜨끈한 것도 같고⋯. 그 늑대 머리가 내 몸통만 했잖아요.”
“⋯그랬죠.”
“정말 딱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데미안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손을 내밀자, 데미안이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웃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미카엘. 제가 아직 고맙다는 말을 안 했더라고요.”
울컥, 목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만 내저어, 아니다, 내 탓이다, 하고 싶은 말을 삼켜냈다.
식사를 마친 아이가 쉬고 싶다 하여 쟁반을 챙겨 들고나왔다.
쉐이든과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으나 입이 쓴 탓에 집중이 어려웠다.
유인물을 펼쳐 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더니, 쉐이든이 기운을 북돋아 주겠다며 나를 끌어다가 아카데미 내의 카페테리아에 앉혀 두었다.
테이블 가득히 올라오는 단 음식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걸 다 누가 먹으라고.”
“왜 그래, 미카. 약한 소리를 다 하고.”
“약한 소리가 아니라⋯.”
“너 아침도 대충 먹었잖아. 이 정도는 다 먹을 수 있을걸. 내가 알아.”
쉐이든이 아이 어르듯 굴기에 못 이긴 척 포크를 들었다.
단 음식을 깨작대고 있자니 멀찍이서부터 익숙한 기척이 다가서는 것을 알았다.
다디단 초콜릿 퍼지를 우물거리며 출입구 쪽을 보았다.
어딜 그렇게 뛰어다녔는지, 넋 빠진 표정을 한 루베르가 제 목에 매달린 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헐겁게 만들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쳐 고개를 까닥여 간단히 묵례하자, 녀석은 망설이지 않고 나를 향해 곧게 걸어왔다.
“미카엘! 어디 안 다쳤어?”
“예.”
겨우 산짐승에게 당할 내가 아닌 것을 비슷한 경지에 오른 소년이 모를 리 없는데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 거북했다.
내가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챈 쉐이든이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좀 앉으시겠어요, 황자님? 안 그래도 디저트를 많이 시켰거든요.”
“⋯아. 로제 영식.”
“예, 저도 반갑습니다.”
“그, 음. 어⋯ 반가워. 그럼 잠깐 앉았다 갈까.”
멀거니 서 있는 루베르를 위해 쉐이든이 옆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끌어왔다.
루베르는 쉐이든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쉐이든은 그를 위한 음료를 대신 주문했다.
언제 쉐이든이 루베르의 취향까지 파악해 뒀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루베르는 목이 말랐던지 레모네이드를 단박에 절반을 비웠다. 그제야 소년이 좀 진정하여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렇게 나를 찾아온 것을 보아하니, 루베르가 어제의 일에 대해 들은 것이 있겠구나 싶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나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였던 겁니까?”
“⋯사실, 문제라고 할 건 없었어.”
“⋯.”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원래 그 자리에 없던 산짐승이 내려와 사람을 해치고 날뛰었는데 문제가 없었다니.
루베르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내 앞으로 케이크 접시 하나를 밀어주었다.
나는 순순히 포크를 들어 디저트에 손을 댔다.
루베르가 말을 이었다.
“요사이, 유일 산맥에 몬스터가 많아지기는 했어. 그렇지만 제국기사단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웨슬리 키아드리스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기에 몬스터 수를 조절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게 맞아.”
“그럼 이번에는.”
“⋯그 늑대들이 몬스터가 아니라 그저 산짐승이라서, 달아나는 것을 ‘일부’ 방치했다고 해. 매뉴얼에 어긋나는 일은 없었어.”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숲속의 생물들의 먹이 사슬이란 오묘한 것이라 어느 한 종족이 쇠퇴하면 꼭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늑대의 수가 너무 적어지면 그 먹이가 되는 초식 동물들이 숲의 새순을 모조리 뜯어먹어 숲 자체가 황폐해지기 때문에 육식 동물이라고 하여 무조건 죽이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다만 최근에 몬스터의 수가 늘어 제국기사단이 유일 산맥 위쪽에서 활동하다 보니, 그 싸움의 여파로 동물들이 아래로, 아래로 산 능선을 따라 타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늑대들이 무리 생활을 하긴 해도, 기사들이 꾸준히 개체 수를 조절하고 숲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최근 백여 년간은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어. 그래서 이번에도 늑대 무리가 이동하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나 봐.”
“⋯.”
“이번 사고가 있고 나서, 제국에서는 늑대들 중에 다이어 울프와 늑대의 교배종이 섞였다고 판단했어. 어젯밤에 황궁 제국기사단의 절반을 파견해서 엘도스 산의 늑대들 중 덩치가 유난히 큰 녀석들을 모조리 사냥했다고 해.”
“늑대들이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키우지 않겠습니까?”
“인간을 공격하면 이런 해를 입는다는 걸 학습시키는 과정이지. 초식 동물이 아닌 어린 인간을 사냥하기로 결정한 건 개체 수가 많아졌기 때문일 테니, 그걸 조절하겠다 하는 명목도 있고.”
나는 어제 보았던 덩치 큰 늑대를 떠올렸다. 그 녀석의 귀기 어린 푸른 눈과 저들끼리 대화하듯 길게 울었던 울음을 기억했다.
몬스터의 피가 섞였다고.
산짐승에게 무언가를 교육시킨다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졌으나 사람도 이렇게 지독하게 교육시키는 제국이니만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짐승의 사정도 너그러이 보아주는 것이 시어런의 법도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자꾸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지금쯤 데미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차곡차곡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분했다.
포크를 쥔 내 손이 아직 짤막했다.
내 나이가 어린 탓에 시어런 제국의 사람들이 내게 어떤 문제의 해결을 맡기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속에 스미는 울화는 쉽게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니 쉐이든과 루베르가 디저트 접시란 접시는 전부 내 앞에 몰아 둔 채였다.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기에, 입맛이 없어도 다 먹어 치웠다.
잔뜩 먹고 나서 루베르가 기분을 풀기 위해 비도술 연습을 할 테냐 묻기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쉐이든이 저는 그럼 쉬러 가 보겠다고 하여 배웅하고, 루베르와 둘이 비도술 연습장에 들어가 낮은 자세로 단검을 던지는 법을 연습했다.
루베르가 날 달래 주려 애를 쓰는 것을 알아 몇 차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으나 마음 한켠이 심란하여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홀로 남으니 아이들의 비명이 귓전을 울렸다.
쓰러져 누운 데미안의 형상 위로 조카 놈들이 겹쳐 보였다.
칼 찬 무인은 언제든 저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것들이었으나, 그래도 정도가 있었다.
중원에서도 이름 있는 악적들은 제 수준에 맞는 이들만 상대하는 것을 옳게 여겼다.
어린 조카 놈들은 삼류 도적을 해치우고, 나와 같은 이들이 일류 악적을 베어 넘기고 살았다.
그러나 천마대전이 발발한 뒤에는 법도가 무너져 그런 체면치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강에서부터 내려온 마교의 고수들은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막아 세우는 이를 모조리 베어 넘기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너나 할 것 없이 공을 세우겠다 뛰어나오던 시절이었다.
제 앞에서 재잘대다 검 한 번 빼 들지 못하고 쓰러진 조카 놈의 아명이 가물가물했다.
제일 먼저 죽은 놈이 아정이던가, 아화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녀석들이 재잘대며 웃는 얼굴이 더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주먹 아래 감춘 눈시울이 뜨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