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화 (6/176)

6.

도착한 메인 홀은 아주 거대했다.

에른하르트 백작가 저택의 연회장보다도 거대하고 높은 홀인데도, 기둥의 수가 매우 적어 놀라웠다.

늘어선 샹들리에의 개수만 해도 열둘이고, 단상 앞의 계단은 일곱 단이다.

황제의 단상이 대륙 신의 수를 따라 아홉 단이고 공후작가의 단상이 다섯 단이라고 들었으니, 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단인 셈이었다.

그 단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홀의 입구까지 아주 거대한 붉은 깔개가 길게 늘어진 채였다.

내가 있어야 할 위치까지 안내해 준 허시 밀턴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하고 홀의 왼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쪽에는 허시 밀턴과 같은 옷을 차려입은 소년 소녀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신입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감을 열어 확인해보니, 그중 삼분지 일은 검술부의 학생인 모양이었다.

삼류무인 출신의 학생이 열, 이류는 일곱, 일류가 둘 있었고 절정 이상은 없었다.

내심 사십 년간 수련한 나 자신의 경지에 자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갓 지학(*15세)을 넘은 듯 보이는 소년과 소녀의 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스물이 되어서야 도달한 경지였다.

전생에서 보았던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을 보는 것만 같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웅, 거대한 소리가 강당을 울렸다.

시어런 아카데미 신입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하고 시작되는 연설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그저 말하는 이가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성이라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의 은회색 머리칼은 단정하게 묶여 아래로 늘어져 있었는데, 공들여 손질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그 머리터럭이 편안하게 위치할 수 있는 모습을 찾은 모양새였다.

신입생 백이십 명. 그 왼쪽에 선 구십여 명의 근로 장학생들과 그 오른편에 선 구십여 명의 교사들.

나를 포함하여 거진 삼백이나 되는 일원이 한 사람의 입만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꽤 장관이었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말도 대단하게 들렸다.

이게 다 가문의 기사가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아 생긴 일이라 여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왕년에는 내가 마교 발호를 막으려고 수만의 무인들과 발을 맞추어 내달린 적도 있는데⋯.

다 소용없는 말이다. 우습기까지 했다.

연설이 끝나갈 무렵 신입생 한 명이 대표로 단에 올랐다.

오래 살피지 않아도 갓 이류무인의 위에 오른 놈인 것을 알았다.

나와 같은 검술부의 소년인데 나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인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내 옆에 선 붉은 머리 소년 하나가 내 손등을 제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시어런 아카데미의 신입생 대표는 늘 평민이었어, 미카엘 에른하르트.”

“음.”

“아직 물려받지도 않은 작위 순으로 성적을 매기는 건 불합리하잖아.”

“음.”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어쩐지 부아가 인 표정의 소년이 이쪽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신입생 대표가 굳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앞으로 성실하게 수학할 것이며, 높은 이상을 가질 것이며, 제국에 영광을 바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옆자리 소년이 왜 부아가 치밀었는지를 깨달았다.

다들 조용한 와중에 떠들면 안 될 것 같아 감사 인사를 잊은 탓이다.

앞을 바라보는 채로 그대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나한테 한 소리야?”

“모르던 사실을 알려 준 동기니까⋯?”

“너, 나 기억 안 나?”

“⋯음.”

곤란한 소리였다.

수련에 바빠 여름과 겨울 가족 여행 시간을 내는 것도 아까운 처지였다. 나는 아직 열다섯이 되지 않아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가문의 연회나 파티에는 가문의 이름으로 선물만 보내고 참석하지 않았다.

매해 생일마다 수십의 소년 소녀와 재회했지만 일 년에 딱 하루, 우르르 몰려왔다가 하루 만에 빠져나가는 마흔에서 쉰 명의 이름을 모조리 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해 생일에 왔다가 이번 해 생일에는 오지 않는 아이도 있었고, 지난해에는 오지 않았다가 이번 해 생일에는 온 아이도 당연히 있었다.

게다가 그중에 여우처럼 붉은 머리털을 한 아이는 열 명이 넘었다!

전생과 현생을 합치면 내 나이가 이미 지천명(*50세)이 넘었는데, 연에 한 번 접하는 어린 아해들의 얼굴을 일일이 외우고 다닐 새가 어디 있으랴.

가족들의 이름자와 가문 내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벅차 여덟 살 무렵에는 하루에 다섯 명씩 이름을 외우고 다녀야만 했거늘!

한 초식 한 초식의 기기묘묘한 법칙은 쉬이 잊히지 않거늘, 이 요상한 이름자를 한 번에 들어먹은 적은 좀처럼 없었다.

내 이름자도 까먹을까 겁이 나는 판이었다.

대꾸하지 않아도 내가 제 이름을 잊은 것을 알아챈 소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이쪽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나보다 딱 한 치(*3cm) 정도 눈높이가 높았다.

고슬고슬한 붉은 머리는 목덜미까지 늘어져 새끼여우 같고, 서슬 퍼렇게 날이 선 눈은 연한 녹빛이 도는 노란 빛이라 괭이(*고양이) 같았다.

현생에서 만난 어린 소년들이 대부분 그렇듯, 흰 낯에 갸름한 턱을 가진 미동(美童)이었다. 그 뾰족한 표정을 보다 보니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이 있었다.

“⋯시, 쉐, 웨⋯.”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말해.”

“미안. 기억 안 나.”

“쉐이든 로제. 오늘로 아홉 번째 가르쳐 주는 거야.”

녀석의 볼멘소리가 열 번째는 없다, 그리 이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매번 제 선물 포장에 장미꽃이 그려진 가문의 문장과 카드를 남기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일 연회가 그렇듯 선물은 한데 모아두고 시종이 먼저 개봉하여 분류한 뒤, 생일이 끝난 다음에 전해 받기 마련이었다.

카드에 이름을 또박또박 적고 날 기억해 줘, 하는 소년 소녀가 스물이 넘는 시점에서 녀석의 작전 아닌 작전은 늘 실패해 온 셈이었다.

중원인의 얼굴은 기억하기 쉬웠는데, 시어런 제국인의 얼굴은 다들 눈도 크고 코도 높고 얼굴이 갸름하여 오래 두고 보지 않으면 기억하기 어려웠다.

이참에 녀석의 얼굴과 이름자를 단단히 외워 둬야겠다 싶어 녀석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돌려세웠다.

“이제 안 잊을게. 쉐이든 로제.”

“⋯사, 사람을 왜 그렇게 봐?”

“안 잊어버리려고.”

가문과 가문이 서로 꾸준히 교류한 사이면 적당히 친하다고 봐도 되겠지.

쉐이든 로제가 먼저 말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말을 편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생일 연회에 온 이들 중 누구에게 존대를 쓰고 누구에게 말을 놓았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난 늘 모두에게 공평히 말을 놓고는 했다.

답하자 녀석이 깨물어 붉은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새로이 태어나 놀란 것은, 이 땅의 사람들은 소년과 소녀를 막론하고 얼굴을 퍽 세심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황도의 기생마냥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거나, 춤을 추는 것처럼 고개를 살포시 들어 시선을 멀리 두거나, 입술을 가만히 두지 않고 뾰족하게 했다가, 벙긋 웃었다가, 세게 짓씹어 깨물어 제 감정을 고스란히 알렸다.

전생에, 아니 무림맹에 있을 적에 이런 표정을 짓는 이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대개 묵묵했으며, 입꼬리만 슬쩍 들어 웃었다.

하북 팽가의 멍청한 놈들이나 사파 흑도 왈패들처럼 목젖이 다 보이도록 웃었지, 남궁세가를 포함한 무림맹 인사들은 사내와 여인을 막론하고 제가 중이나 도사라도 된 듯 고요하고 잔잔한 체하는 사람들이었다.

실제 중과 도사인 소림, 아미, 무당, 화산, 종남 등이 앞장서니 새초롬한 이들이 정파의 팔 할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래 사내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옛 생각에 잠기는 것은 오래 할 짓이 아니다. 녀석의 얼굴에 있는 점까지 헤아려가며 샅샅이 뜯어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마침 다음 식순으로 재학생 대표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준 뒤, 다시 교장이 연단을 차지한 참이었다.

[그럼 이제 검술부, 마법부, 경영부, 행정부, 서무부, 법학부. 여섯 개 학부로 나누어 강의실을 옮겨 수강 가능한 강의에 대한 설명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각 반의 담임교사의 인솔을 잘 따라주세요.]

[앞으로 삼 년간, 학부 이동이 없다면 쭉 마주할 얼굴들이니까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이상입니다.]

강당 안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는 처음과 같이 조곤조곤했다.

백이십여 명의 학생을 여섯으로 나누면 한 반에는 스물 남짓할 테니, 한 달 안에는 이름을 다 외울 수 있겠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우, 숨을 내뱉자 주변의 몇 명이 따라서 후우, 한숨과 탄식을 내어 뱉는 것에 멈칫하여 주변을 살폈다.

한숨이 하품처럼 옮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모친께서 조언한 내용이 떠올랐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생기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면 된다고 하였던가.

어린아이들이 저와 친해지고 싶어서 이런 소소한 것까지 따라 하는가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갓 쪄낸 만두처럼 뜨끈해졌다.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어린 아해들과 오순도순 친구 놀이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지금의 내 겉모습이 열셋 어린아이이니 가까이 오는 이들을 밀어내는 것도 우스웠다.

제 나이 성인이 될 무렵에는 이들과 함께 제국을 이끌게 될 것이니 동량이자 동지 아니겠는가.

반로환동(*무공이 경지에 올라 회춘하는 것)한 고수가 중원에 나와 겪는 민망함이 이러할까 생각하니 괜스레 경지에 오른 듯 멋쩍기까지 했다.

검술부 학생들과 이동하는 도중, 누군가 제 옆의 소녀에게 ‘정말 소문대로네, 에른하르트.’ ‘속눈썹도 분홍색인 거 봐⋯.’ 따위의 말을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내 소문이 어찌 났는지 잠시 궁금했으나, 곧 소스라치게 놀라 잊었다.

“반갑다, 제군들. 이제부터 일 년간 여러분의 담임과 초급, 고급 검술 수업을 맡게 된 마엘로 샌슨이다.”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목소리 틈새로 파고들었다.

“연무장 개방 시간은 오전 일곱 시부터 오후 여덟 시까지. 수업 시간은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덟 시까지 개인 시간표에 따라 다르다. 검술은 조급하게 해선 늘지 않는다. 1학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초는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고, 충분히 쉬어 제대로 된 몸을 만드는 것이다. 알겠나?”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한 화경의 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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