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5화 (5/176)

5.

시어런 제국.

내가 태어난 새로운 조국은 대명제국보다 아주 조금 작은 나라였다.

대륙은 아주 커다란 나비 혹은 날개를 펼친 새를 닮은 모양새였고, 그중 동쪽의 날개를 시어런 제국이 차지했다.

제국의 북쪽으로는 거대한 산맥을 경계로 마경이 있어 몬스터와 괴물이 먹을 것을 찾아 민가를 노린다고 했다.

서쪽으로는 포달랍궁(*세외 세력 중 불가 계통의 종교 세력)과 같이 너른 사막이 펼쳐져 있는데, 이 또한 몬스터와 괴물이 득실거렸다.

사막과 제국 사이에 다섯의 왕국이 방파제처럼 늘어서서 매번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북쪽의 산맥과 서쪽의 사막이 맞닿은 지점에 커다란 오아시스가 몇 있어 여러 씨족의 유랑 민족들이 떠돌아다녔다.

강호 하북에 대명 황실이 가장 큰 권위와 힘으로 자리 잡았듯, 이 땅에서는 시어런 제국이 대륙의 패자이자 주인 행세를 하였다.

무림에서는 그 큰 땅을 각각의 무림방파와 무림세가가 구역을 나누어 저들의 것인 양 행세했다. 안휘 땅은 남궁이 지키고, 사천 땅은 당가가 지키는 식이었다.

그러나 시어런 제국의 땅들은 황제가 그의 가신들에게 상으로 내린 것이었다. 작위와 함께 대대로 이어 정치하기 때문에 무림세가가 자리 잡을 틈이 없었다.

모든 기사들이 귀족 가문과 황제에게 예속되어 있으니, 관무불가침 정도가 아니라 관이 무림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때문에 제국의 그 많은 귀족가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황궁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사교계 입성이 가능한 열다섯부터 성인으로 인정받는 열여덟까지 황궁 근처의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수학하였다.

검술, 마법, 경영, 행정, 서무, 제국법 여섯 가지의 큰 갈래와 백여 과목에 달하는 각종 교양 수업들을 수학하고 또래들과 성적을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이점이었다.

제국 내 최고의 인력들은 황궁 아니면 아카데미에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기 입학, 조기 졸업, 졸업 유예가 모두 가능하고 가문의 후계자는 반드시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하지만 후계자가 아닌 귀족은 구태여 수학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미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누구나 또래 문화를 충분히 향유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문들은 여력이 닿는 한 그들의 자녀를 아카데미에 보내고자 하였다.

한 해 수강료가 여느 영지의 한 해 세금과 흡사하게 값이 나가기 때문에 재력이 부족한 집안에서는 아카데미에 차남 차녀를 보내는 대신 일찍이 사교계에 자식들을 내어 혼인 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값비싼 수강료는 아카데미에 평민 장학제도를 원활하게 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귀족 한 명이 입학하면 동시에 평민 셋이 입학하는 형국이었다.

처음 아카데미의 존재를 알았을 때 얼마나 감탄하고, 또 경탄했는가.

나라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황실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제국민을 향해 열려있다는 점은 내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체계였다.

알고 있는 검을 반복해서 수련하고 아는 사람들과 꾸준히 대련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당당히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 무척 기뻤다.

시어런 제국에서는 한 해를 열둘로 나뉘어 표시하는데, 입학식은 매해 2월의 첫날이었다.

에른하르트 백작가에서 수도까지는 마차를 타고 칠 주야가 걸리기 때문에 새해맞이를 하고 부산스럽게 준비하여 수도에 닿았다.

백작가 영지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 층에서 삼 층 정도인 데 반해, 수도 성벽을 넘자마자 오 층에서 육 층에 이르는 건물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특히 모든 건물보다 높이 솟은 황궁의 담벼락과 수도 동쪽과 서쪽의 양 끝에 당당히 서 있는, 하늘을 찌를듯한 아주 높은 탑이 놀라웠다.

절간의 돌탑도 아니고 어찌 저렇게 높은 건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배웅을 도맡은 기사, 벤터스 경에게 물으니 저것이 바로 마법사의 탑, 마탑이라 하였다.

“마법⋯ 이야기는 몇 번 들었어도 영 상상이 가지 않는군. 오러를 사용하여 불과 물을 만드는 것이 저렇게 높은 탑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야.”

“흔히들 마법은 진리에 도달하는 학문이라고 하는데⋯ 뭐, 직접 겪어보면 알 겁니다. 저도 아카데미에 가서야 마법을 처음 봤거든요. 저 탑은 일 층으로 들어가서 삼십 층으로 나오는 문이 있다고 들었어요.”

“아아.”

“예? 이 설명으로 이해하셨다고요?”

벤터스 경은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의 진법(*오행의 기운과 기물 등을 사용하여 환각을 보게 하거나 주술적인 일을 일으키는 마법진)이나 부적과 흡사한 것이 가득한 곳이려니 생각하니 납득할 수 있었다.

용봉지회에서 연무장 위에 나무작대기 같은 것을 세워놓는 것은 제갈가의 사람들이 유일했으므로⋯.

우수한 마법사가 있다면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에는 시종과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아카데미 입구쯤에 내려서 기숙사로 옮길 짐들을 바로 앞에 선 창구에 맡겼다.

입학식을 하는 동안에 개인 짐을 기숙사에 옮겨준다고 하는 것을 보아하니, 아카데미 내의 시종이 따로 있는 모양이라 내심 안도하였다.

내 손으로 빨래를 해 본 일은 전생과 현생을 합하여 무려 삼십여 년 전의 일인 까닭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소년 소녀들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혹은 상기된 낯으로 제 일행들과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나를 여기까지 호위해 온 벤터스 경과 다른 기사 서넛이 내 눈을 보고, 웃으며 포권(*한 손의 주먹을 다른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이는 무협식 인사)을 취했다.

어릴 적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몇 번 나온 것을 가지고, 어린애 놀이라고 생각하여 따라 하기 시작한 기사들의 짓궂은 인사였다.

“그럼, 큰 도련님. 여름 방학 무렵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한 학기 동안 꼭 소드 마스터 되시는 겁니다.”

“그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노력은 해 보겠네. 가는 길 조심하고, 쉬엄쉬엄 가도록.”

“안 그래도 유람하며 왔으니 유람하며 갈 겁니다. 몸조심하세요.”

낯선 인사 탓인지, 이쪽을 흘금거리는 또래들의 시선에 낯이 뜨거워 몸을 세우고 손이나 크게 흔들고 뒤돌아섰다.

기사의 도리인지, 그간 쌓은 두터운 정 덕분인지 아카데미 문에 들어서고 나서도 한동안 기사들의 기척이 지워지지 않아 자꾸만 민망한 웃음이 샜다.

* * *

교문을 지나 사람들이 걷는 길을 따라 걷고 있자니 감빛 교복을 차려입은 인물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손에는 서류철 하나를 들고 있고, 이 대륙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애체(*안경)를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영지 밖으로 나섰다는 실감이 났다.

“저기⋯ 안녕. 신입생 미카엘 에른하르트 맞지⋯ 요? 저는 한 해 선배인 허시 밀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밀턴 선배.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제가 올해 근로 장학생이라서 신입생 길 안내를 맡았어요. 강당까지 안내하려고⋯.”

자꾸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아하니, 말을 높여야 할지 낮춰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아 그냥 웃어 주었다.

허시 밀턴의 양 뺨에 발갛게 열이 오르는 게, 저도 퍽 민망했던 모양이다.

겉으로만 보기에도 나보다 네 살은 더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말 편히 하세요, 선배.”

“아, 고마워! 갓 들어 온 신입생들은 반말로 대화하는 걸 싫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원칙적으로는 후배들에게 존대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조금 걱정했어. 미안해.”

“존대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라니,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으음, 그러니까⋯.”

허시는 다시 한번 눈치를 보더니, 한 걸음 앞서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면서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 같기에 나도 얌전히 그 옆으로 따라 걸었다.

청년은 조금 빠른 어조로, 이쪽을 힐끔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걷는 걸음이 무겁고 불규칙한 것을 보니 검술부의 청년은 아닌 모양이군. 그런 생각이나 하며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어런 아카데미에는 귀족이 한 명 입학하면 평민이 세 명 입학하잖아. 그래서 당연하게도 평민이 더 많아.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 온 평민들은 대부분 성적이 매우 좋기 때문에 귀족 출신 학생들이 성적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으음.”

“그래서 귀족 학생들이 평민 출신 학생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걸 막기 위해서, 동기들끼리는 친하지 않은 이상 서로 맞존대를 하는 게 일차 규칙이야. 그리고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하는 게 이차 규칙이고, 후배는 선배에게 존대를 하고⋯ 졸업 이후에는 몰라도, 졸업 전까지는 교내나 교외나 예외 없이 벌점을 받을 수 있어.”

“아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매해 신입생들은 그걸 모르니까,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하거든. 아, 물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원래 바깥에서 만난 사람에게는 나이나 직위에 상관없이 높임말을 하는 게 정상이니까. 그래서⋯ 그래서 걱정했어. 미안해.”

“옳은 말을 전해주시는데 미안해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 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허시는 수줍게 웃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자꾸만 뺨을 붉히는 것을 보아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이렇게 깡마른 몸을 하고 양기가 뚜렷한 사람은 본 일이 드물어, 그 얼굴색이나 구경하며 걸음을 옮겼다.

침묵을 깨기 위해서인지, 허시가 문득 입을 연다.

“듣긴 했지만⋯ 너, 머리 색 정말 예쁘다. 정말 꽃잎 같은 연분홍색이라서 깜짝 놀랐어.”

“음.”

“⋯아! 시, 실례되는 말이었다면 미안해!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라ㅡ.”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놀랐을 뿐이에요.”

이제는 귓바퀴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청년이 삐걱삐걱 걸음을 옮겼다.

메인 홀로 도착하기까지 청년은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덕분에 뒤따라 걷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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