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3화
‘민간인들도 많군. 어쩌면 에스퍼보다도 많을지도 모르겠어.’
하진으로서는 일반인이면서 이렇게 지하에 숨어 살면서까지 반정부 측에서 서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들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저들로 인해 탈출이 어려워졌다는 거였다.
‘역시 이 방법밖에 없네.’
고민하던 하진은 결국 또다시 최지형을 이용하기로 했다.
서지한이고 나발이고 지금 하진의 주위에 있는 에스퍼 중 이용하기 가장 쉬운 사람은 최지형밖에 없으니 그를 이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사람과 어떻게든 가까워져야겠지.’
꺼림칙한 최지형의 반응은 잠시 접어둬야 할 문제가 되었다.
이 모든 건 서지한이 임무에서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했기에 하진은 지금부터라도 켜켜이 판을 깔기 시작했다.
주변을 구경하던 하진은 마침 무언가 물어볼 게 떠오른 척 최지형에게 조금 더 붙어 고개를 가까이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데 혹시 실내에 산책로나 정원 같은 건 안 만들어 뒀습니까?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필요할 거 같은데요.”
최지형은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하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 거슬릴 것 하나 없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고, 아슬아슬하게 스치던 팔이 달라붙으며 그의 온기가 전해지자 뇌가 망가진 것 같았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르고, 그 달아오른 얼굴을 하진에게 보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보았다.
그 어정쩡한 태도로 하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진은 생각한 반응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소심한 청년을 놀려먹는 기분이라 아주 약간이지만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최지형 씨?”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서 그만둘 건 아니었다. 하진은 아주 조금만 더 몰아붙이기로 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제게서 시선을 돌린 최지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서른둘이나 먹고 귀여운 애들이나 할 법한 짓이라니 낯부끄러웠지만, 탈출을 위해서라면 이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 그, 그러니까……!”
역시나 최지형의 반응은 기대대로였다. 그는 마치 뒷골목에서 양아치들에게 희롱당하는 조신한 도련님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하진은 조금 가까운 거리에서 고개만 기울이며 올려다봤을 뿐, 그의 몸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 말아다.
‘이쯤에서 물러설까.’
너무 몰아세워도 좋지 않았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낯빛을 확인한 하진이 몸을 떼어내며 한 걸음 훌쩍 멀어졌다.
“음, 제가 곤란한 질문을 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닌데요…….”
멀어지는 온기와 하진의 체향에 최지형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가락을 움찔거리다가 무언가를 참듯 제 양손을 움켜쥔 그는 연신 하진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걸까 싶어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 모습에도 하진은 굳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소심한 최지형은 그가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착각했다.
실망이라니. 상상만 했을 뿐인 지금도 눈물이 비죽 새어 나오려고 했다. 그래선 안 된다.
어떻게 얻어낸 하진과의 시간인데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채 끝나선 안 됐다.
‘너무 많은 정보를 주면 혼나지만……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하진은 주어진 생활 공간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밖으로 나갈 때는 꼭 누군가와 동행한다는 것을 떠올린 최지형은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혼나는 건 싫지만, 하진이 자신에게 실망하고 더는 찾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더 싫고 무서웠다.
최지형은 하진의 가이딩을 처음 겪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지면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하진의 가이딩이 제게 닿는 순간 그는 그 종소리를 들었다.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그런 그가 하진이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는 하진에게 외치듯 말했다.
“이, 있어요!”
“네?”
“실내 정원, 있어요.”
하진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혹시 저도 가볼 수 있나요? 복도만 돌아다니고 있으니 솔직히 많이 갑갑해서요. 이곳은 창도 없으니 말이에요.”
하진은 슬쩍 최지형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마치 애교를 부리듯 말을 이었다.
“최지형 씨하고만 가겠다고 약속할게요. 안 될까요?”
“으헉!”
‘으헉은 무슨 나야말로 으헉이다.’
하진은 자신보다 한참은 어릴 성인 남성에게 애교 따위나 부리고 있는 상황에 대한 통탄을 애써 삼켰다.
최지형은 마치 불시에 공격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허둥지둥거렸다. 그러면서도 하진에게 붙잡힌 옷소매만은 얌전했다.
그는 그 한쪽 팔만은 진동도 가지 않게끔 하면서 온몸을 부산스레 떠는 기행을 보였다.
하진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좀처럼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 최지형에 조금 더 그를 건드려보기로 했다.
“역시 힘들겠죠.”
“아뇨! 가, 같이 가요!”
최지형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진을 정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진이 자신에게 애원하자 순간적으로 말을 잊고 만 것이다.
옷소매에도 신경이 연결된 건 아닐 텐데 최지형은 하진이 손을 놓기 무섭게 그의 손을 붙잡아왔다.
생각보다 큰 손이었다. 하진은 자신의 손을 전부 감싸버리는 커다란 손에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몇 주가 흘렀지만, 저들은 의식적으로 하진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 하진이 기선제압으로 방사 가이딩을 한 이후에는 특히나 더 말이다.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진이 가이딩으로 자신들을 억누르고 이용할까 봐 조심하며 손도 못 대던 이들이 이렇게 손을 댔다는 건 어느 정도 제게 마음을 열었다는 뜻일 거다.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고맙죠.”
“고, 고맙다니…….”
헤헤거리며 좋아하던 최지형은 그제야 하진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으악, 죄, 죄송해요!”
그 모습에 하진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신 사무적이거나 경계심 어리기만 하던 태도가 바뀐 것이다.
최지형은 그 변화를 만들어낸 게 자신이라는 것에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가슴께를 꾹 눌렀다.
‘생각했던 거보다 빠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한순간 가이딩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 방사 가이딩보다는 아무래도 접촉 가이딩이 효과가 더 좋으니까 말이다.
그대로 가이딩했더라면 최지형은 하진의 손 위에서 놀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바로 들켰겠지.’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애정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최지형이 그대로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알려졌을 것이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곳이 지하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상이나 공중이었더라면 차라리 창문으로 그가 쉽사리 탈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줬겠지.
차라리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에스퍼의 튼튼한 신체를 믿고 아무나 하나 잡아서 탈출을 시도했을 텐데.
‘지상이든 지하든 만들어진 출구로 탈출하는 게 아니면 불가능하겠지.’
압력을 에스퍼가 대신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탈출은 더없이 신중해야만 했다.
하진은 자신이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계속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지형을 보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최지형 씨만 괜찮다면 내일 그 정원에 가 보고 싶은데요.”
최지형은 발길을 돌리는 하진의 곁에 따라붙었다. 마치 데이트 신청처럼 들리는 그 말에 그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조, 좋아요.”
* * *
한지우는 바쁜 일상을 살고 있었다. 어디서든, 누구든 한지우를 찾아댔고 그는 하루하루 협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갔다.
심드렁하기만 하던 에스퍼들도 지난 반응과는 달리 착실히 한지우를 찾아댔다.
“가이딩 좀 해줘.”
‘결국엔 이렇게 찾아올 거면서 건방 떨기는.’
폭주 수치가 아슬아슬한지 태연하게 말하는 것과 달리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힐긋 손목에 채워진 기기를 통해 수치를 확인하자, 아슬아슬하지만 하루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수치가 눈에 들어왔다.
‘흠, 이쯤에서 좀 기를 잡아놓을까.’
S급 가이딩을 받는 것에 고마운 줄 모르고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는 가이딩을 내놓으라고 하는 모습이 한지우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내가 아직도 A급인 줄 아나?’
자신들에게 벌벌거리며 가이딩하던 그때의 한지우를 기억하는 것 같아 그는 새로운 기억을 심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한지우는 자신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건만, 냅다 의자에 앉아 손을 내미는 에스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서 어쩌죠? 요 며칠 가이딩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어지러워서 지금은 가이딩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실제로 그의 안색은 평상시보다 창백했다. 왜 그런지는 한지우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몸은 멀쩡한데 거울을 보면 어딘가 조금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뭐? 내 수치 안 보여? 폭주 직전이라고!”
한지우가 거절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지 에스퍼는 당황하더니 수치가 표시된 손목을 한지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이 되었으니 마음이 다급해질 만도 했지만, 그 태도를 눈감아줄 한지우가 아니었다.
“그건 정말 미안하지만, 저도 너무 지쳤어요. 이 상태에선 가이딩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테니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
“며칠? 미쳤어? 그러다 폭주하면 어쩔 건데?!”
이미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을 끌어안고 며칠을 더 버티라는 말에 에스퍼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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