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4화
큰소리에 멀리서 직원이 뛰어오는 것을 확인한 한지우는 몸을 움츠린 채 에스퍼에게 대응했다.
“저도 힘들어요. 몇 주째 협회의 S급 에스퍼는 전부 제가 감당하고 있는데 이 정도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건가요?”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주성원 에스퍼는 좀 떨어져 주시길 바랍니다.”
위험 분자에 시한폭탄 취급이야 익숙했으니 주성원은 인상을 쓰면서도 군말 없이 두 사람에게서 몇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가이딩 거부는 다른 문제였기에 그는 물러서면서도 직원에게 항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 폭주 수치가 이런 데 가이딩을 못 하겠다잖아.”
내민 손목에 떠오른 수치를 확인한 직원이 작게 인상을 쓰며 한지우에게 물었다.
“수치가 아슬아슬한데 가이딩 힘들겠습니까?”
주성원을 대할 때와는 퍽 다른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가이드의 중요성이야 그도 알고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확연한 차이에 주성원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한지우는 직원의 조심스러운 부탁에도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수치가 위험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가이딩을 너무 많이 해서 힘들어서 조금만 쉴 시간을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
주성원은 어이가 없었다. 한지우가 분명 아까도 같은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에게 말할 때와 협회 직원의 앞에서 말할 때와 태도가 달랐다.
안색이 좀 파리하긴 하지만, 뻔뻔한 얼굴로 본인의 휴식을 요구하던 이가 갑자기 돌변해서는 마치 주성원이 억지로 가이딩을 요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니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지우가 지금 하는 말은 그에게도 했던 말이기에 무어라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태도? 그거야 주성원의 주관적인 관점이라고 못 박아버리면 끝이 아닌가.
게다가 대놓고 S급 가이드를 더 우대하는 협회가 그의 말을 들어줄 리도 만무했다.
“음, 가이딩이 힘드시다면 어쩔 수 없죠.”
역시나 협회 직원은 한지우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차별적인 대우는 이미 오랜 세월 이어져 왔기에 그다지 억울하지도 않았다.
직원은 한지우의 말에 납득하더니 주성원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일단은 한지우 가이드의 체력이 돌아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죠.”
약이었다. 주성원은 미간을 구겼다. S급 에스퍼라면 모두 이 약이 익숙하지만 익숙한 만큼 싫어했다.
미약하더라도 폭주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먹는다지만, 먹고 난 후의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약을 먹으면 마치 이미 자란 키를 억지로 줄이는 것처럼 뼈마디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에스퍼들은 약으로 수치를 낮출 때면 필수로 방공호에 들어가야 했다. 간혹 고통을 참지 못한 이들이 능력을 방출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약은 먹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주성원은 약을 받은 손에 힘을 주면서도 알약을 가루로 만들지 않기 위해 손끝에는 힘을 풀었다.
가이드가 있으니 더는 약을 먹을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협회는 언제든지 그들에게 약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는 짜증을 부려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한지우는 며칠간 휴식을 취하면 가이딩해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하진인지 뭔지 하는 S급 가이드는 잘난 알파 팀만 관리하느라 얼굴도 본 적 없는데 말이다.
“……하아, 딱 사흘 기다린다.”
그 말에 직원이 한지우를 돌아보았다. 소리 내어 묻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사흘이면 충분한지 묻고 있었다.
“사흘이면…… 좋습니다.”
선심 쓰는 듯한 태도에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던 주성원은 한숨을 내쉬고는 독실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손에 쥔 약도, 독실로 향하는 길도 모두가 익숙한 것들인데 어쩐지 씁쓸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흥. 별것도 아닌 게.’
한지우는 멀어지는 주성원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고작 주성원 한 명의 기를 죽여 놓은 걸로 만족할 한지우가 아니었다.
‘이 기회에 누가 위에 있는지 제대로 알려 줘야겠네.’
자신이 없으면 안 되게 만들기 위해서였지만, 군말 없이 가이딩을 해달라는 대로 해주니 S급 가이드가 별거 아닌 줄 여기는 것 같았다.
‘애초에 가이딩이 정상적이기만 했어도 이딴 귀찮은 짓거리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망할 서주안. 콱 잡혀서 뒤져버려.’
가이딩이 변질되지만 않았더라면 주성원 따위가 감히 언성을 높이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욱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한지우 가이드, 얼굴이 좋지 않은데 검사라도 받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색이 파리한 게 이 순간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뿐인데 알아서 어디가 아픈 걸로 오해해주니 말이다.
“괜찮아요.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직원이 더 권유하기 전에 한지우는 쉬러 가 보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는 협회에서 새로 내어준 자신만의 숙소로 발길을 돌리며 생각했다.
한지우도 안색이 왜 파리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안색을 제외하면 아픈 곳도 없으니 더더욱.
예전이었더라면 제 몸을 끔찍이 아끼는 그이니만큼 직원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검사를 요청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약 성분은 일주일이면 체내에 모두 흡수된다고 했지만, 그놈 말은 이제 더는 믿을 수 없어.’
혹시라도 검사받았다가 성분이 검출되기라도 하면 모조리 망하고 만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사실이 밝혀지면 단순히 징계나 벌을 받는 걸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서주안과의 거래까지도 밝혀지게 될 거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 번 가이딩을 받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하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알파 팀이 그를 죽이려 들 게 분명했다.
그냥 죽이면 차라리 다행이지, 살아남는 것만도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컸다.
‘그건 절대 안 돼…….’
한지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나 만약에라도 들킬 경우를 대비해 어떻게든 에스퍼들의, 그중에서도 알파 팀이 가지고 있는 집착을 제게로 끌어와야 하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았다.
다른 에스퍼들은 한지우의 가이딩을 귀찮을 정도로 잘 이용하곤 했다.
반면 알파 팀은 한 번 가이딩을 받으면 최대한 가이딩이 고갈되지 않도록 아끼고 아끼다가 어쩔 수 없어졌을 때야 한지우를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알파 팀이 한지우에게 가이딩을 받은 횟수는 다른 에스퍼들에 비해 오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젠장, 찾아와야 뭘 해도 할 텐데 망할 새끼들이 포기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니.’
일부러 알파 팀에게는 양질의, 많은 양의 가이딩을 퍼붓는데도 그들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차라리 그놈들은 포기할까?’
꿈쩍도 하지 않는 알파 팀에게 공을 들일 바에야 차라리 남은 가이딩으로 다른 S급 에스퍼들을 손에 넣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혹시라도 한지우의 비밀이 밝혀지더라도 에스퍼들이 자신을 지키려고 할 터였다.
알파 팀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을 죽이려 하겠지만, 그쯤이면 상황을 파악한 협회가 한지우를 비호하려 할 것이다.
‘그걸 무시하고 덤벼들면 내팽개쳐질 테고, 수긍하면 나로선 환영이니 손해 볼 건 없다.’
미약하게 남아 있는 불안감을 없앤 한지우는 한결 느긋해진 태도로 숙소에 들어섰다.
남은 것은 사흘 동안 편히 쉬는 것뿐이었다. 며칠간 가이딩도 하지 않고 쉬다 보면 안색도 돌아올 것이다.
한지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한지우는 쉬는 동안에는 다짐한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간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 것과는 반대되는 하루를 보냈다.
“흐아아암. 역시 비싼 게 좋긴 좋네.”
가이드 숙소에서 쓰던 매트리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푹신함과 편안함에 간밤에 꿈도 꾸지 않았다.
한지우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너무 오래 잤더니 배가 고파진 탓이었다.
주마다 새롭게 채워지는 반찬을 꺼내고 밥을 퍼 이제는 점심이라고 불러야 할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후엔 대충 싱크대에 그릇을 넣어두고 소파에 눕듯이 앉아 하릴없이 채널을 돌려댔다. 그러다 재밌어 보이는 채널에 고정하고 낄낄거리기 바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그렇게 게으르면서도 모든 직장인이 부러워할 휴가를 보내고 있으니 파랗게 질렸던 낯빛도 어느 정도 돌아온 상태였다.
“역시 피곤하긴 했었나 보네.”
쉬고 온 다음 낯빛이 돌아왔으니 다음에 또 피곤하다는 핑계로 쉰다고 해도 어느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못할 것이다.
한지우는 이 핑계를 조금 더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바라던 S급이 되고서도 한지우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들의 반응이 제 생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가이딩을 받기 위해 매달리고 애원해야 할 에스퍼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니 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꾸 몸을 혹사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번에 기를 죽여 놓을 생각이니 좀 괜찮아지겠지.’
한지우는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괜히 착해진 척했다며 투덜거리며 소파에 누웠다.
“남은 하루도 푹 쉬면 되겠네.”
그러는 동안 한지우를 찾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그로서는 오히려 환영이었다.
그렇게 남은 하루는 어떻게 보낼지 즐거운 고민을 하는 순간이었다. 띵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을 확인하자 익숙한 얼굴의 협회 직원이 안절부절못한 채 서 있었다. 이틀 사이에 뭔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한지우는 사흘간의 휴일이 이틀로 끝났다는 것에 혀를 차면서도 다급하게 저를 찾아온 것에 만족스러워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도 협회 직원은 연신 초인종을 누르며 한지우를 찾아댔다.
한지우 가이드! 안 계십니까? 긴급 상황입니다! 강제로 문을 따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한지우가 문을 열었다.
“죄송해요. 옷 좀 갈아입느라고 늦었네요. 무슨 일이세요?”
“긴급 상황입니다. 주성원 에스퍼가 폭주를 일으키기 직전입니다. 어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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