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2화
그는 전날만큼 허둥지둥하지 않았으나 역시나 하진이 자신에게 직접 부탁한 게 가슴 벅찬 일인지 방으로 뛰어 들어가려다가 테이블에 무릎을 받았다.
“아앗!”
물론 부서진 건 테이블 쪽이었다.
“또 우그러뜨렸네…….”
처음엔 왜 거실에 철제 테이블을 두는 건가 했는데 무릎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자국이 남은 걸 보니 그 이유를 납득하게 되었다.
최지형은 테이블과 하진을 번갈아 보더니 그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는지 테이블을 두고 겉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테이블은 저렇게 둬도 됩니까?”
괜히 하진이 신경 쓰여서 물으니 그는 하진이 자신에게 말을 건 것 자체가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나중에 와서 고치면 돼요. 지금은 하, 하진 씨가 기다리니까…….”
하진은 순박하게 웃는 지금과 잔뜩 흥분해선 제게 손을 뻗던 그때의 간극에 조금 떨떠름해졌다.
대체 본모습은 어느 쪽인 걸까. 가이드가 귀하다더니 파장이 맞는 가이딩이 처음이라 그때만 잠시 이성을 잃었던 걸까.
“……가시죠.”
하진이 먼저 돌아섰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곳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부디 잘 지내야 할 텐데……. 폭주가 일어나진 않겠지?’
이곳에 갇힌 시간이 길어지는 데다가 하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거나 이렇게 쳇바퀴를 돌 듯 같은 곳을 맴도는 것밖에 없어서 그런지 잡생각이 깊어졌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코스를 걸으며 하진은 이제는 자연스레 가까운 곳에서 걷는 최지형을 힐긋 살폈다.
그러자 하진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최지형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쳐왔다. 물론 맞닿기 무섭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려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뭐, 뭔가 하실 말이라도…….”
“음, 다른 곳으로는 가볼 수 없는 겁니까? 같은 길목만 왔다 갔다 하려니 이젠 좀 질려서요.”
“다, 다른 곳이요?”
최지형이 드물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하진이 한발 물러서는 척 그를 열심히 부추겼다.
“일하는 곳을 구경시켜 달라는 게 아니라 다른 층으로라도 가볼 수는 없나 싶어서요.”
“으음, 으음…….”
최지형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는 하진을 다른 곳으로는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하진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있었다. 거절하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그, 그건 안 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 거절 한 번에 지금의 거리가 다시 멀어진다면?
하진이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면 버리지 말아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마치 최지형의 망설임에 쐐기를 박듯 하진이 입을 열었다.
“곤란하다면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죠.”
괜찮다고 말하는 하진의 시선이 다시 최지형에게서 떨어져 정면을 향했다. 그저 가던 길을 가기 위함임을 아는데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최지형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 가요!”
그도 에스퍼이니 최지형이 가이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 이해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진은 자신들의 가이드가 될 텐데 괜히 미움받게 되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곤란한 거 아닌가요?”
“전혀요! 대, 대신 저하고만 가는 걸로 해주세요.”
자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드물게 어깨를 쫙 펴고 대답했으나 끝에 가선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소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진은 생각보다 빠르게 넘어온 최지형에 보이지 않게 주먹을 아주 살짝 힘주어 쥐었다.
역시 이쪽을 공략하기로 마음을 바꾼 건 잘한 선택이었다.
“그러죠. 어차피 저 혼자는 못 가니까요. 다만…….”
“다, 다만요?”
“아닙니다.”
말을 하려다가 말면 어지간히 관심이 없는 상대가 아니고서야 궁금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건 하진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최지형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 대상이 하진이었기에 그는 용기 내어 되물었다.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기에.
“그, 그러지 말고,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대체 뭐가 그의 마음에 걸리는 걸까. 그걸 만약 자신이 해결하면 하진이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될까. 그런 아주 약간의 사심을 담아 물었다.
“으음, 정말 별거 아닌데요. 괜히 제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서요.”
“투, 투정이라뇨! 누, 누, 누가 그런 말을……!”
최지형은 마치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면 직접 두들겨 팰 기세였다. 반응을 어느 정도 끌어 올린 하진은 그제야 입을 열고 대답했다.
“강아지 씨가 돌아오면 또 같은 곳만 맴돌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말입니다.”
순간 그 말은 최지형의 귀에는 그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는 말로 치환되어 들렸다. 어찌 보면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다른 층으로 향하는 건 최지형과 함께일 때만 가능할 테니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말이기도 했다.
합리화를 마친 최진형을 얼굴을 붉혔다. 벌써 자신과 떨어져 있을 것을 아쉬워하는 하진이라니.
심장이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앞으로도 나하고 산책하면 되는 거 아닌가?’
최지형은 능력 특성상, 외부 임무를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강아지보다야 그가 더 하진을 감시하고 그와 함께하는 일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진 씨도 분명 내가 더 좋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최지형은 최대한 멋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저랑 같이 사, 산책해요!”
그는 말을 조금 더듬었으나 하진에게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에 상기되었다.
“강아지 씨가 가만히 있을까요?”
최지형도 그 부분을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네가 뭔데 하진과의 시간을 채가느냐고 눈을 부라릴 강아지를 상상하면 무서웠다.
하지만 막상 하진이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이를 먼저 신경 쓰는 걸 보는 게 더 화가 났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제가 해결할게요!”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가이드에게 잘 보이고 싶은 에스퍼의 마음은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내도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다만 서지한이 조금 걸렸다.
하진의 예상대로라면 그는 최지형을 좋아하고 있는데 자신이 그와 함께 하는 걸로 질투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물론 직접적인 해는 끼치지 못하겠지만 귀찮아지지 않게끔 잘 살펴야겠군.’
생각을 마친 하진은 떼어내기 귀찮았을 강아지를 직접 상대해 주겠다는 최지형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럼 믿을게요.”
“미, 믿……. 맡겨만 주세요!”
적절히 듣기 좋은 말까지 섞으니 최지형이 정신 못 차리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다. 생각보다 진행이 빨랐다.
앞으로도 이대로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며 하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럼 위층으로 가 봐도 될까요?”
“가, 같이 가요.”
놀랍게도 움츠리고 다녀서 그렇지 하진보다 키가 큰 최지형은 성큼 발을 옮기더니 하진의 옆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앞에 섰다.
“혹시라도 하진 씨를 알아보지 못하고 공격할 수도 있으니 여기선 제가 앞에 설게요.”
“네…….”
공격이라니. 상식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처에 하진은 얌전히 최지형의 한 걸음 뒤에 섰다.
위로 향하는 계단은 꽤 길게 이어졌다. 체력 단련실에서 체력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만큼 걸어 올라간 뒤에야 위층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높네요.”
“네. 그래서 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요.”
“엘리베이터가 있다고요?”
계단을 오르느라 조금 지친 하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나갔다. 그러자 최지형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하, 하진 씨는 이용하면 안 돼서요…….”
‘내가 탈출하는 게 어지간히도 무서운가 보군.’
입 밖으로 비아냥거리려다가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하진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다른 층에 가고 싶다고 한 건 저였으니까요. 눈치 볼 거 없습니다.”
어쨌든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 되었다. 물론 긴급 상황에서 그 엘리베이터를 쓸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진은 잠시 슬쩍 고개를 내밀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높은 곳까지 계단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뛰어 올라가다가 붙잡히겠군.’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에스퍼라면 재워버리면 그만이니 탈출에 지장이 없겠지만, 그것조차 확실치 않았다. 고개를 원위치시킨 하진은 위층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한층 더 올라왔다고 해서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다만 하진이 있던 아래층보다는 통유리로 된 창이 많았다.
방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라 자연스레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연구실이 많나 보군요.”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쓴 이들이 제각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실험을 하는 건지 알아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반정부 놈들이 만들어내는 것 중에 뭐 좋은 게 있을 거라고.
“네에, 그래서 특히나 더 위험하니까 함부로 문 열지 말고, 꼭 제, 제 옆에 붙어계셔야 해요. 그, 지금보다도 더…….”
그러더니 최지형은 한 걸음만큼 떨어져서 걷고 있는 하진을 굳이 제 곁에 세웠다.
붉어진 얼굴로 코를 벌름거리고 있으니 영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최지형과 아슬아슬하게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깝게 선 하진은 연신 주변을 구경하는 척, 뭔가 건질 만한 게 없는지 살폈다.
그러는 동안 제법 많은 사람과 마주쳤다. 그들은 하진을 보고 놀라다가도 곁에 선 최지형을 보고는 그저 지나치기만 했다.
얼굴만 보고 알아서 지나가다니. 하진의 생각보다 그의 입지가 탄탄한 듯했다. 하진은 자신을 지나치는 이들을 곁눈질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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