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48화
하진은 최지형을 극도로 소심해서 가끔씩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단둘이 남아 있지 말아야겠군.’
“헉! 테이블!”
뒤로 자빠졌으면서 뒤통수가 깨지기는커녕, 테이블을 부숴 먹은 최지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당황하는 꼴을 본 하진은 쥐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고 방으로 향했다.
TV 보기는 다 그른 상황이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돌아서던 하진은 서지한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인상을 쓴 모습을 목격했다.
그러나 하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서지한은 하진을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평소처럼 못마땅한 듯 바라보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던 하진의 예상과 달리 서지한은 최지형을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하진의 방으로 다가갔다.
더는 문은 닫지 않기로 했기에 문이 열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문턱은 넘지 않은 서지한이 하진에게 말했다.
“최지형 건들지 마.”
뜬금없는 말에 하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모로 꺾었다. 저게 무슨 뜻이지? 최지형을 건들지 말라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최지형이 위험하다는 건지, 하진이 위험하다는 건지 말이다. 그러다 문득 하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최지형을 좋아하는 건가?’
뜬금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 되는 것도 같았다.
최지형 또한 에스퍼이니 가이드인 하진에게 자연히 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같은 에스퍼인 서지한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진에게 경고를 하는 듯했다.
하진은 자신을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는 서지한에 제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질투하는군. 풋풋하기까지 한 반응에 하진은 하마터면 픽 웃을 뻔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입꼬리를 갈무리한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그렇게 하도록 하죠.”
머지않은 미래에는 가이딩을 해야 할 테니 확답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접촉은 최대한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이 정도면 서지한도 만족하리라.
그러자 역시나 서지한은 하진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발길을 돌려 거실로, 부서진 테이블을 수습 중인 최지형의 곁으로 향했다.
역시 곧바로 최지형에게 가는 걸 보니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서지한은 알겠다는 얼굴로 자신과 최지형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하진을 보며 물었다.
“뭘 보는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히 아는 척하면 또 무슨 성질을 부릴지 몰라 하진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한 번 눈치를 채고 나니 서지한의 행동이 눈에 띄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주로 거실에 머물렀는데 그때마다 항상 곁에는 최지형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는 건가.’
최지형 곁에 머무는 서지한을 자연스레 여기는 걸 보니 저들도 아는 듯했다.
‘반면에 저쪽은 모르는 거 같고.’
하진은 여전히 자신을 힐끔거리고 시선이 마주칠 때면 얼굴을 붉히는 최지형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서지한이 불쾌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하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럴 거면 고백이라도 하든가.’
하진은 떠보는 것을 그만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곧 있으면 강아지가 돌아와 산책하러 가자고 할 시간이었다.
그는 순간 울컥한 마음에 약속한 것치고는 본인이 한 말을 꾸준히 지키고 있었다. 이름일 뿐이라도 강아지는 저쪽인데 어쩐지 신세는 반대가 된 것 같지만 말이다.
“산책 가자!”
현관이라고 부르기로 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강아지가 신난 얼굴로 하진을 불렀다.
역시 아무리 봐도 저쪽이 강아지 같았다. 이름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무슨 개새끼도 아니고…….”
서지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하진과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다.
물론 하진의 귀에 들릴 정도면 당연히 같은 에스퍼인 강아지의 귀에도 들렸기에 한 차례 싸움이 날 뻔했지만 말이다.
“그만 나가죠.”
“어? 아! 맞다. 그래!”
서지한은 하진이 본부 내라고 할지라도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딱히 막아서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하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벌써 말이 들어갔나 보군. 굳이 위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서주안은 알고 있겠어.’
완전히 감출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서주안이 알게 되었을 거라는 게 제일 신경 쓰였다. 그의 능력이 뭔지 아니까.
게다가 아무리 방사 가이딩이라고 해도 하진의 가이딩을 받고도 능력으로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던가.
하진에게는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었다.
“하아…….”
“왜 한숨을 쉬어?”
아, 이런. 속으로 삼킨다는 게. 실수에 잠시 입을 다물었던 하진은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지한 씨가 저를 유독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거 같아서요.”
“아아.”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는데 강아지는 뭔가 아는 사람처럼 반응했다.
하진은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래도 둘만 남을 경우를 생각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네요.”
서지한이 해치려고 들까 봐 무섭다는 말을 돌려 하자 강아지가 돌연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진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웃음소리였다.
이 정도면 서지한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강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 성에 찰 때까지 웃었다.
“으하핫! 아, 진짜 웃겼다.”
“다 웃었습니까?”
다 웃었다면 이젠 왜 웃었는지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다. 비웃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왜 웃는지 정도는 자신도 알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만약 자신이 잘못 말한 게 있다면 알아둬야 했다.
강아지는 언뜻 뚱해 보이는 하진의 표정을 살피고는 억지로라도 웃음을 감췄다. 그에 하진은 놀랐다.
저 해맑은 뇌의 소유자가 자신의 눈치를 살필 줄도 알 줄이야.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크흠. 서지한 자식이 널 해칠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손도 못 댈걸?”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서지한을 믿어서라기보단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당연한 명제를 말하는 것 같은 확신에 하진이 되물었다.
사람인 이상 백 퍼센트 이럴 것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뭘 근거로 저렇게 확신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진의 물음에 강아지가 픽 웃었다. 생긴 것과 퍽 잘 어울리는 비웃음이었다.
“그 새끼는 존나 겁쟁이거든. 가이드 하나가 저놈한테 가이딩하고 눈앞에서 자살한 이후로는 가이드한텐 손도 못 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이야기에 하진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하진보다 앞서 걷던 강아지는 알아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언제였더라. 갑자기 가이드 하나를 잡아 왔더라고. C급이었는데 이상하게 서지한이랑은 매칭률이 높아서 그 새끼만 쓰고 우리는 쓰지도 못했어.”
하진은 물건 취급하는 명칭에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으나 강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기분이 안 좋건 어떻건 간에 저들과 관련된 정보는 뭐가 되었든 알아둬야 했다.
“……왜 죽은 건지는 모릅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뭐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안 보내주니까 그랬겠지.”
그 가이드는 자주 울었다고 했다. 혼자만 독차지하는 것처럼 서지한이 가둬둔 바람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볼 때마다 울고 있었다고.
“어쩌다 마주치면 집에 보내 달라고 비는데 불쌍하긴 하더라.”
저 가볍디가벼운 목소리가 이젠 역겨워지려고 했다.
하진은 속이 갑갑해져 가슴을 두드리고 싶어졌으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언제 한 번은 그게 탈출한 적이 있었어. 당연히 난리가 났지.”
강아지는 그때 기억을 떠올렸는지 혀를 쯧쯧 찼다.
“폭주한 것도 아닌데 미친놈처럼 막 날뛰는데 그대로 두면 건물 무너지겠다 싶어서 서주안이 도망친 애를 잡아 왔어.”
“어떻게요?”
이 이야기만큼은 꼭 들어야 했다. 본능이 무조건 저 뒤에 이어질 말을 들어야 한다고 외쳐댔다.
하진은 부디 제 묻는 목소리가 너무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강아지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저 가벼운 태도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 새끼 능력에 추적 기능도 있거든. 물론 그 대상을 일일이 기억해야 한다는 번거로운 단점이 있긴 한데……. 뭐, 내 능력도 아니고.”
하진은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하진이라고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하진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경고. 강아지는 멍청해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어…….’
하진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우면 뭐 하나. 서주안의 능력이면 도망을 쳐도 알파 팀을 만나지 못하면 곧바로 잡혀 올 텐데.
하진은 입안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게다가 서지한의 과거를 듣고 나니 여차하면 그냥 막무가내로 에스퍼들을 이용해 먹으려는 계획도 써먹기 망설여졌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울며불며 도움을 청하는데 들어주지 않았다니.
이용해 먹으려고 가이딩했다가 되레 이쪽 발목이 잡힐지도 몰랐다.
“안색이 별론데? 돌아갈까?”
“……그러죠.”
인정하긴 싫었지만, 지금 기분으로는 괜히 괜찮은 척해봤자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는 행위밖에 안 되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리자 이번엔 하진이 앞장서게 되었다.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하진은 그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바빴다.
반 정도 갔다가 되돌아온 덕에 금방 숙소로 돌아오게 된 하진은 기껏 열었던 문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나마 노려볼 만한 사람이 최지형밖에 남지 않았다.
서주안은 당연히 안 되고, 서지한은 가이드가 스스로 죽게 할 만큼 집착하는 성향이니 안 된다.
어쩐지 처음부터 하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경계하는 것 같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면 납득이 되었다.
‘강아지 그놈은 멀쩡한 줄 알았는데 만만치 않게 인성에 하자가 있어.’
아직도 가이드의 자살을 가볍게 입에 담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역시 남는 건 최지형뿐인데…….’
물론 이쪽도 마냥 만만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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