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47화
에스퍼들이 찾으러 오기 전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던 하진은 제 나름대로 탈출 방법을 찾아봐야 할지 고민했다.
영화 같은 걸 보면 괜히 나대다가 일을 만들곤 하던데…….
“흐음…….”
“왜?”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린 하진은 곧바로 뒤돌아보는 강아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하진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있는 그가 그 말에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결국 하진은 괜히 이상한 생각으로 튀어버렸다. 고작 이렇게 걷는 것마저도 못하게 하는 것을 염려하며 대충이라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건물 구조가 특이해서요.”
“아아, 그렇긴 하지. 난 별로야. 우중충하고, 답답하고.”
“하긴 창문이 없으니 답답하긴 하더군요.”
“뭐, 낼 수도 없지만 말이야.”
강아지의 대답에 하진은 지금 있는 곳이 지하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했다. 그리고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강아지를 바라봤다.
서주안에게 농락당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이지 강아지는 상상 이상으로 단순한 사람이었다.
‘뭘 믿고 저렇게 구구절절 힌트를 쏟아내는 거지?’
이내 하진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어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가 멍청한 게 하진에게 도움이 되는데 뭐 하러 걱정하는가.
강아지는 하진과의 대화에 물꼬를 텄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계속 주절거리며 개미굴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투덜거리는 게 귀찮긴 하지만, 강아지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꽤 쏠쏠했기에 하진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대화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
‘나도 많이 성장했군.’
사실 목적이 있기에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걸 성장했다고 표현하지 않지만, 하진은 작은 뿌듯함을 느꼈다.
길은 하나뿐이라는 듯 길게 이어진 통로를 쭉 걷다 보니 계단이 나왔다.
위로 올라가는 방향, 아래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계단이 있는 걸 봐선 아무래도 하진이 있는 곳은 중간층 어딘가인 듯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큰 공간이군.’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섣부른 탈출은 시도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자. 이 정도 걸었으면 됐지?”
사방이 막힌 것을 제외하고 걸은 거리만 따진다면 충분히 산책이 될 수 있을 만큼 걸었다. 똑같은 층이 몇 개나 있다니.
하진은 질린 표정을 감추고 강아지에게 대답했다.
“네. 괜찮으면 내일도 같이 와줄 수 있습니까? 이렇게 걷는 거라도 매일 하고 싶은데요.”
“나랑 매일 같이 있고 싶다고?”
같은 말도 제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는 강아지가 떨떠름했으나 가장 이용해 먹기 쉬운 건 그였기에 하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거야 그에겐 너무도 익숙했다.
“그쪽이 그나마 가장 편하니까요.”
“내, 내가?”
강아지가 고백이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하진의 속내는 점점 떨떠름해지기만 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던 강아지가 여태 보여줬던 성격만 본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할 것 같았다.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락을 구해 보겠다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렇군요.”
하진은 찌푸려지려는 인상을 폈다. 허락을 구하겠다는 걸 봐선 이들 위로도 협회장 같은 우두머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괜히 그 사람의 귀에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물론 어떻게 관심을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미 하진은 자신에게 과할 정도의 시선이 몰리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우두머리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두 번이나 각인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허락을 구해야 할 일이었다니. 미안합니다. 그냥 없던 걸로 해도 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귀찮게 해드렸네요.”
하진이 과한 부탁을 해 미안하다는 식으로 발을 슬쩍 빼자, 역시나 강아지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전혀 안 귀찮거든?! 됐어! 괜히 잔소리 듣기 싫어서 물어보겠다고 한 거지, 굳이 허락받을 필요도 없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매일 나랑 산책해.”
하진은 시원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힘을 주어 얌전하게 올려 부드러운 미소로 탈바꿈했다.
강아지는 처음 보는 하진의 미소에 얼굴을 확 붉히더니 뻣뻣한 걸음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하진을 혼자 둘 수 없다는 듯 멀리는 떨어지지는 않는 게 참 징글맞았다.
처음 눈을 뜬 곳으로 돌아온 하진은 더는 방문을 굳게 닫고 지내지 않았다.
갑갑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함께 지내는 에스퍼들의 경계를 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이딩이 가장 쉽긴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눈에 띄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굳이 가이딩을 부탁하지 않는 걸 봐선 저쪽도 우선은 자신의 경계를 낮추려는 것 같았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선 가이딩을 펑펑 해대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러기엔 이미 방사 가이딩을 한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방사 가이딩은 접촉 가이딩만은 못 한 것 같으니 한 번 정도는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자신에게 향하는 감시의 시선들을 좀 줄일 필요가 있었다.
마치 가랑비에 젖는 데도 젖는 줄도 모르게 조금씩 경계심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주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들과 보내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누그러드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에스퍼들에게 가이딩하는 것을 의심하려 들지는 않겠지.
‘다만 문제라면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거겠지…….’
하진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이들이다. 숨소리마저도 신경 써야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속은 걱정으로 문드러져 갔다.
분명 하진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도 진즉에 알았을 테니 찾고 있을 텐데 그들을 가이딩할 수 있는 게 하진뿐이라는 게 문제였다.
수색에 있어 휴식을 취할 이들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또 폭주하면 안 되는데.’
하진은 한숨 대신 조금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이내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괜히 생각해봤자 늘어나는 건 걱정과 불안뿐이었다.
둘 다 딱히 탈출을 도모하는 지금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차라리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방에는 더는 틀어박혀 있지 않기로 한 탓에 화장실로 잠시 피신했던 하진은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린 후, 거실로 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던 강아지는 어디 가고, 안경을 낀,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소심남이 앉아 있었다.
“하, 하, 하진 씨! 드디어 나오셨군요!”
“아…… 예. 방 안에만 있으려니 이젠 답답해서요.”
결국 이름을 떠올리지 못한 하진이 소심남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하진도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고, 소심남 또한 하진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 딱히 말을 걸지는 않아 거실은 어색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차라리 쳐다보지라도 않으면 정적이 흐르건 뭐건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자꾸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쳐다보면서 말은 절대 걸지 않고 있었다.
하진은 결국 먼저 그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까먹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 아뇨!”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고 묻자, 곧장 시선을 피하며 고개까지 휙 돌려 버리는데 하진은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싶어 어이가 없어졌다.
하진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면 자신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리모컨을 찾았다.
‘하필 저기에 있네.’
직접 가지러 가기에도 애매하게 소심남이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있었다.
“들고 있는 리모컨 좀 주겠습니까?”
“이, 이거요?”
“네. 혹시 TV도 보면 안 되는 건가요?”
그렇다면 차라리 방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소심남이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붕붕 저었다. 놀랄 것도 참 많다 싶었다.
“아, 아뇨! 봐도 되죠! 여, 여, 여기요.”
소심남은 벌떡 일어나더니 리모컨을 들고 하진에게 다가왔다. 작게 고맙다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 리모컨을 받다가 손끝이 스쳤다.
굳이 신경 쓸 것도 없는 작은 스침이었는데 소심남이 갑자기 얼굴을 확 붉히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뭔가 불안한데.’
누가 봐도 흥분한 사람의 반응에 하진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으나 뒤에 있는 것이라고는 소파 등받이밖에 없었다. 오히려 소파에 갇힌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주춤주춤 소심남이 붉고 흥분한 얼굴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안 되겠다. 지금이라도 방으로 돌아가자.
제게 뻗어오는 손에 하진이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밖으로 이어진 문이 열리더니 서지한이 들어왔다.
그는 하진에게 손을 뻗고 있는 소심남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최지형.”
‘이름이 최지형이었구나.’
비록 자신을 싫어하는 티를 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에 안심했다.
하진은 제 코앞에 있는 손을 보고도 까먹었던 소심남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태평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떨어져.”
단호한 음성에 최지형이 마치 몽유병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뻗었던 손을 품으로 가져갔다.
“헉! 죄, 죄, 죄송해요! 제가, 으악!”
그뿐만 아니라 당장 떨어지겠다는 듯 뒷걸음질을 치다가 테이블에 다리가 걸려 그대로 나자빠지기까지 했다.
조금 전, 기분 나쁠 정도로 흥분했던 사람은 사라지고 강아지와는 다른 의미로 어수룩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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