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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29화 (29/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9화

에스퍼인 이도윤이 훨씬 잘 번다는 건 하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에게 넙죽 얻어먹자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꼰대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이도윤의 돈을 쓰게 할 바에야 꼰대 소리 듣는 게 나았다.

이도윤은 갑갑함에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진에게 조금 더 어필할 새도 없이 그가 주문한 샌드위치와 커피가 나왔다.

게다가 하진이 자신은 다 먹으면 갈 생각이니 얼른 주문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는 바람에 결국 하진의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젠장, 완전 애 취급이잖아.’

싫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진이 특별히 신경 써주는 것은 좋았으나 챙겨야 할 어린애를 보는 듯한 시선이라면 사양이었다.

이도윤은 괜한 오기가 생겨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아메리카노와 요깃거리로 삼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평소처럼 영수증은 구겨 버리려다가 그래도 하진이 제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사줬다는 증거라서 주머니에 곱게 접어 넣었다.

“자요. 이번엔 얻어먹었지만, 다음엔 내가 살 거예요.”

하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는 이도윤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커피 향을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에 이도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진짜 예쁘게 생겼네.’

입 밖으로 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하진의 미소가 사라질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순간을 그대로 머릿속에 박제해 버리고 싶었다.

정신 계열 에스퍼를 찾아가면 어떻게 안 되려나.

이도윤은 마치 이 순간에 취한 사람처럼 멍하니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연히 보일 만큼 올라갔던 입꼬리는 시간이 지나며 다시 내려왔지만, 은은하게 남은 커피 향처럼 하진의 입가에는 미처 다 지워지지 않은 미소가 남아 있었다.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하진은 하진대로, 이도윤은 이도윤대로 각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진의 공간에 자연스레 스며든 느낌이라 더없는 충족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도윤이 주문한 것들도 완성되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새카만 커피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구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괜한 치기 때문에 하진이 주문한 것과 똑같이 주문하긴 했지만, 사실 이도윤은 단 걸 좋아했다. 평소에 쓴 건 질색이라고 표현할 만큼 싫었다.

그런 그의 입맛에 시럽이라고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아메리카노가 맞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에스퍼가 되고서는 오감이 예민해진 탓에 쓴맛이 더욱 크게 다가와서 그런지 쓴 걸 먹을 때면 몇 배로 괴로웠다.

‘조금만 넣을까.’

힐긋 시럽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 때문에 어린애 취급을 받는 중인데 이것도 쓰다고 마시지 못하면 어리게 보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게 될 게 뻔했다.

‘하아…….’

큰맘 먹고 잔을 쥔 이도윤은 한숨을 삼켰다. 하진의 곁에서 나던 커피 향은 부드럽기만 했는데 왜 제가 쥔 잔에서 올라오는 향은 사약같이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

이도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가장하고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으…….”

혀끝에 닿는 쓴맛에 순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으나 하진의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이도윤은 커피와 함께 소리까지도 삼켜냈다.

꿀꺽.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고 잔을 내려놓은 이도윤의 얼굴은 멀끔했다. 그 속은 어떨지 몰라도 말이다.

“뭐, 먹어줄 만하네.”

하진은 그의 미묘하게 구겨진 한쪽 눈썹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니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일 것이다.

‘나중에 아이스크림이나 사줘야겠군.’

이도윤이 하진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그런 취급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빽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신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속으로는 좋아했을 것이다.

“여기 있었네!”

그 순간,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인데도 선명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이도윤과 하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한승호가 창밖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도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백자안이 걸음을 옮겨 카페로 들어오는 문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한승호 또한 잽싸게 움직여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휴식 시간은 물 건너갔군…….’

셋 중 하나라면 감당할 수 있지만, 둘 이상 모이면 감당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건 하진도 함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하진이 없다면 저들은 둘이 모이든 셋이 모이든지 서로에게 일정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랜 시간 팀을 이뤄온 이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진이 알았더라면 퍽 억울해했을 일이지만, 그는 그가 없는 에스퍼들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치사하게 둘이서만 노냐?”

그러는 사이 한승호와 백자안이 지척에 다가왔다.

의자를 끌어온 백자안이 먼저 하진의 옆자리를 차지하자 한승호가 이를 갈았고, 이도윤은 저런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에 제 이마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진의 옆에 앉은 백자안은 곱게 웃는 얼굴로 하진에게 물었다.

“형이 안 오셔서 걱정했어요.”

“아……. 그러네요. 미안합니다. 교육이 일찍 끝나 잠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던 건데 걱정을 끼쳤군요.”

하진은 제가 너무 자기 생각만 한 게 아닌가 싶어 잠시 반성했다.

가이딩을 빙자한 키스 이후 이들과 떨어져 있을 생각만 하다 보니 반대로 이들이 걱정할 건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말인데요. 번호 알려주시면 안 돼요? 생각해보니 아직 형의 번호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기회를 놓칠 백자안이 아니었다. 하진은 백자안이 내민 휴대폰에 순순히 제 번호를 찍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다른 두 사람도 잽싸게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진 또한 그들의 성화에 번호를 저장해야 했다.

‘역시 조용할 새가 없군.’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그저…….

“엥? 너 쓴 거 못…….”

“형, 여기 샌드위치 맛있는데 좀 처먹어봐.”

“우웁! 이 미친, 읍.”

“형, 커피 좋아하세요? 머신 하나 살까요?”

사람이 늘어나자 정신이 없었다. 하진은 싹 사라진 입맛에 잔을 내려놓았다.

“미친놈아!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넘어가! 좀 넘어가라!”

그저 가게에 민폐가 될 뿐이었다. 하진은 결국 반이나 남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카운터에 가져다주며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가게를 떠나야 했다.

그런 그의 뒤로 에스퍼들이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이제 숙소로 갈 거야?”

“아니면 나온 김에 더 돌아다닐까요? 귀찮으시면 쟤네는 보내도 돼요.”

“지랄하지 마.”

이왕 나온 김에 조금 더 돌아다닐까 싶었던 하진은 지금은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밖으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파 팀으로 유명한 이들이 하진을 끼운 채 시끄럽게 다투고 있으니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하아…….”

결국 하진이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자 세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여기서 기다려요.”

그 말만 남긴 하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하진을 따라 들어가려다가 기다리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곤 겨우 발을 멈춰 세웠다.

그나마 가게 안이 훤히 보이는 곳이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슬금슬금 따라갔으리라. 이윽고 돌아선 하진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콘이 들려 있었다.

눈치 빠르게 달려와 문을 연 이도윤에게 감사 인사로 고개를 까딱인 하진은 그대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그에게 내밀었다.

“먹어요.”

“나 주는 거예요?”

“예.”

하진은 한승호와 백자안에게도 아이스크림을 건넨 후 손을 털었다. 별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도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사줄까 하던 차였는데 이걸로 이 셋의 입을 잠깐이라도 틀어막을 수 있다면야.

그리고 예상대로 셋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에는 얌전히 굴었다.

열심히 아이스크림을 먹는 커다란 장정들을 보며 하진은 팔자에도 없는 애를 셋이나 키우게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이들 중 두 사람과는 남한테 보여주기 남사스러울 정도로 진한 키스를 나눴다는 사실이 떠올라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마냥 어리게만 생각하는 사내와 키스라니. 더 파렴치했다.

“그런데 형은 안 드세요?”

하진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아깝다는 듯 조금씩 먹던 백자안이 물었다. 만약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지만 않았더라도 한참을 깨작깨작 먹었으리라.

“저는 괜찮습니다.”

“단 걸 안 좋아하세요?”

하여튼 자연스럽게 개인 정보를 캐묻는 건 백자안이 제일 잘했다.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스크림은 별로 좋아하지 않네요. 비단 아이스크림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왜?”

백자안 혼자만 하진과 대화하게 둘 수 없다는 듯 한승호가 끼어들었다. 그는 이미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콘까지 모두 먹어 치운 후였다.

저걸 벌써 다 먹네. 하진은 짧았던 평화에 아쉬움을 삼켰다.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그냥 속이 차가워지는 게 기분 나빠서요. 시원한 건 좋아하지만 너무 차가운 건 즐기지 않습니다.”

셋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롭게 알게 된 정보를 머릿속에 박아두었다.

“그럼 뭘 좋아하는데? 다음엔 나랑 먹으러 가자.”

“승호야. 하진 형이 너랑 왜 둘이 놀러 가.”

“넌 꺼지라고.”

“형들이야말로 꺼져. 하진 형이랑 나랑 분위기 좋았는데 왜 끼어들어선.”

이도윤의 말에 한승호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네가 제일 문제야! 너 하진 형한테 위치추적기 달아놨냐? 어떻게 알고 네가 거기 있어!”

덩치도 크고 사납게 생긴 남자가 저러면 움츠러들 법도 한데 이도윤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그딴 건 백자안 형이나 하는 짓이지.”

“도윤이가 이제 무서운 게 없나 보네…….”

중간에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으나 이도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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