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그 시간, 황녀는 (2)
* * *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혁명군과의 전투는 의외로 꽤 긴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어요.
적의 수가 그렇게 많으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는데도 아비고르는 이렇다 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죠.
정확히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레나이 역시 막사에 자신의 대리인을 세워놓고는 소규모 분대와 함께 아비고르가 있는 곳으로 향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다면 서신이라도 보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아비고르가 그만큼 신경 쓸 일이 생겼다는 것이니까요.
어디 숨어있던 마군주가 나타났다던가,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모두, 전투 준비. 앞에 마군주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선두에 있던 레나이가 멈춰 섰어요.
정말로 마군주가 있는 걸까요?
“하지만, 황녀님…. 저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레나이만이 마군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기사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마군주가 없다고 말하며, 주변을 몇 번이고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혹시라도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없다고 말했던 것이 실수가 되어 죄를 물을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레나이가 그럴 인물은 아니지만요.
“당연하다. 이렇게 감춰놓았으니.”
레나이는 앞으로 나서 허공에 손을 뻗어 커튼을 들춰내듯 공간을 열어젖혔어요.
흐물거리며 어둡고 오묘한 빛을 내던 공간은 그대로 신기루처럼 흐려져, 그 안에 있는 것을 비추었죠.
레나이는 물론이고, 뒤에 있던 기사들까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대자로 쓰러져있는 아비고르와 함께 황궁의 기사들이 보였으니까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보이는 혁명군과 그 뒤로 매복 중이던 아이펠슈에의 분대까지 함께 쓰러져있었어요.
숲에 들어온 직후부터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했더니 모두 이렇게 쓰러져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그런데 이런 참상 가운데에서도 딱 한 명, 옆으로 드러누워 무언가를 마시고 있는 이가 있었는데요.
아마, 레나이가 말했던 마군주일 거예요.
“그대 짓인가?”
“으응~? 넌 누구야?”
느릿느릿하면서도 어딘가 한층 들뜬 목소리.
모두가 쓰러져 있어, 누구나가 참혹하다 할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네요.
생긴 것마저 길게 늘어뜨린 보랏빛의 머리카락에 자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될 거의 감은 눈.
여기에 더해 흐트러진 옷가지는 제 사이즈보다 큰 어른의 옷을 입고 있어서 게으름의 대표적인 표본이라고 해도 될 정도예요.
“그대의 짓이냐고 물었다.”
“뭐어…. 이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봐? 흐…. 나쁘게는, 음, 끄윽…. 후…. 안 했는데?”
대답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손에 쥐어진 불투명한 병에 든 무언가를 마시고 있네요.
트림까지 하는 걸 보면 물이나 보통의 음료수는 아닌 것 같아요.
뭐가 됐던, 레나이는 험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그녀를 계속 추궁할 뿐이었어요.
“그대는 누구인가.”
“내 이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데에…. 너도 같이 마실래? 맛있거든.”
“[이름을 말하라]고 했을 것이다.”
“…윽, 너어. 재밌는 능력을 쓰는구나. 나한테는 통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줘야지. 셀레스야.”
셀레스는 레나이의 능력에 버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레나이가 적의를 거둬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인지, 누워서 대화를 이어갈 생각을 접은 것 같아요.
“그리고 술을 어~엄청 좋아하지. 여기 쓰러져있는 녀석들한테도 나눠준 것뿐인데….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네에.”
“…술? 그대가 말하는 건 지금…. 이들이 전부 죽은 게 아니라, 술을 마셨을 뿐이라고? 기절할 때까지?”
“나 반복해서 말하는 거 싫어해. 나쁘지 않게 대했다고, 했잖아? 억지로 마시게 한 건 맞지마안….”
레나이는 그 즉시 쓰러져있는 기사 한 명에게 가까이 가서 앉아,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봤어요.
그러자 미약하지만 숨을 쉬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기사가 숨을 내쉴 때마다 풍겨오는 고약한 포도주의 냄새는 덤이었어요.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그대, 정체가 뭐지? 마군주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우리와 싸울 텐가?”
“원래느은, 이 세계에 넘어와서어…. 라파르를 도와주려고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귀찮더라구. 그래서 그냥,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던 것뿐이야. 얘들은 덤벼오길래 그냥 재워버린 거야.”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베일리? 거점으로 돌아가서 이들을 수송할 준비를 해라.”
레나이의 말에 뒤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자리를 떠나, 왔던 길을 돌아갔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생각인가. 이 세계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될 것이라면 본인이 모른 체할 수는 없는데.”
“이대로 놔주는 건 어려울까~? 어딘가에 속박되는 것도, 싸우는 것도 질렸는데에….”
“그대가 괜찮다면, 본인과 간단한 계약을 하는 것으로 앞으로는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 계약의 내용은 물론….”
“이 세계의 안전이지? 알아~ 알아~ 그럼 선물로 이거 줄게.”
마군주 셀레스가 내미는 술병, 선물이라지만 주변의 풍경을 보면 받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지만요.
레나이가 선물을 받지 않고 셀레스의 기분을 해친다면 계약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본인의 선물도 하나 받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뭐야아, 브로치? 흐응~ 나를 못 믿는구나?”
셀레스가 건네받은 브로치에는 뭔가 장치가 되어있던 것 같아요.
상대가 마군주이다 보니 레나이도 신중에 신중을 더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성급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알아보았나? 그래도 겉보기엔 꾸미는 데에 있어서 이만한 물건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그대같이 이쁜 여자아이라면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흐흥, 흣. 그렇게 칭찬하면 안 받을 수가 없잖아아. 그래도 너무 능숙한데에?”
칭찬에 약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은 것인지.
레나이 덕분에 서로 간의 적의는 누그러드는 것 같아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지금의 상대하고 있는 건 술에 취한 마군주이지만 옛말이 다 틀린 건 아니었던 거예요.
“본인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안고 싶다는 야망을 품고 있거든, 이상한가? 어때, 그대도 꽤 아름다운데…. 본인에게 안겨보겠나?”
“나를 이렇게 원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계약을 마친 뒤에 생각해볼게. 일단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해, 서 있느라 지쳤어어….”
“하핫, 본인의 막사로 가지! 리트리, 디네! 이곳에서 베일리를 기다렸다가 함께 일을 마친 뒤에 돌아오도록. 본인은 먼저 가서 급한 일부터 처리하겠다.”
기사들은 레나이의 끝없는 욕망에 질렸다는 듯이 간단한 대답만 하고 바로 주변의 경계에 들어갔어요.
누구 하나 죽지도, 다치지도 않은 이 참상 가운데에서도 먼저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행히, 레나이와 셀레스가 막사에 도착해 계약을 나눈 뒤까지 아무 일도 없었기에 다행이었어요.
“그래서어, 계약은 이걸로 끝?”
“음, 브로치도 예상대로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군. 하지만, 그 옷…. 본인이 하나 더 선물해줘도 되겠는가?”
“으응…. 옷, 이게 편하고 좋은데에.”
레나이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요.
헐렁하기만 했을 뿐이라면 옷이 흘러내려 맨살을 보일 기회가 많았을 테니 레나이로서도 좋았겠지만요.
문제는 헐렁한 걸 넘어서서 기괴한 장식도 달려있고,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때가 탄 게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이런 셀레스의 모습은 항상 자신의 몸을 가꾸고 남에게 잘 보여야 했던 레나이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겠죠.
“그 술은 잠시만 내려놓는 게 좋을 것 같군.”
“앗, 이봐아! 그런다고 내가 술을 못 마실 것 같아?!”
자신이 빼앗아간 술을 보고도 뻔뻔하게, 허공에 손을 집어넣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새로운 술을 꺼내는 셀레스였어요.
병의 모양도 다르고, 내용물의 색도 다른 걸 보니 다른 종류의 술 같은데, 어디서 꺼낸 걸까요?
레나이도 궁금했었나 봐요.
“미리 물어보겠는데, 그 술은 제한이 없는 건가?”
“술은 나의 권능이니까아? 너도 줄까?”
“아니, 일 중에는 마시면 안 되지. 이 옷이면 될 것 같군.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지?”
레나이는 빼앗은 술을 탁자에 내려두고는 대충 걸려있는 옷걸이에서 하나를 꺼내줬어요.
막사 안에 여벌 옷이 있다고 해도 레나이 자신의 옷이라서 셀레스에게는 맞지 않을 텐데요.
하지만 별 상관없다는 듯이 바로 옷을 벗어 갈아입기 시작하는 셀레스였어요.
레나이의 앞인데도 부끄럽지 않은 걸까요?
술에 취해서 부끄러움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겠네요.
“끄응, 읏! 조금 헐렁한데, 그래도 흘러내리지는 않네에…. 레나이라고 했었지? 네가 준비해주는 신분증이 생기며언…. 여행이나 다녀볼까아. 이 세계엔 얼마나 맛있는 술들이 있을지 궁금하거드은.”
처음부터 헐렁이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레나이가 준 옷도 자신의 옷이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셀레스였어요.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원래의 옷에서 브로치를 떼어내 새로운 옷에 다시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죠.
그 모습을 본 레나이는 안심이 된 건지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어요.
“정말로 술을 좋아하는군. 마지막으로 물어보겠는데 본인에게 와 볼 생각은 없고?”
“말했지마안? 나는 속박 당하는 걸 싫어해.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한다면, 정말 나 없이 안된다며언, 딱 한번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민 정도는 해볼게에.”
“알았다. 그대가 이 세계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전쟁은 큰 수확이었으니. 짧은 시간이겠지만 황궁에서 잘 지내다가 갔으면 좋겠어.”
“빈둥거리는 건 내 전문이니까 걱정하지 마아~ 충분히, 즐겨줄 테니까.”
“음,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번을 마지막으로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
나름대로 대화가 잘 통한다고 판단한 레나이는 진지한 투로 이야기를 꺼냈어요.
셀레스는 대답 대신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죠.
가끔 입가에서 흘러나온 술이 턱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떨어져 옷을 적시고는 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오히려 술에 물들어가는 것을 즐기는 느낌이었죠.
레나이만 눈썹을 찡그릴 뿐이에요.
“그대와 같이 넘어온 마군주, 강력한 녀석인가?”
“푸핫! 크으…. 아, 뿌루뿌루가 궁금했구나아?”
“뿌, 뿌루뿌루…?”
“귀엽잖아? 뿌루뿌루라고 발음하는 거어.”
“음…. 그, 그래. 강력한 녀석인가?”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의 이름이 뿌루뿌루라면 누구나가 당황하지 않겠어요?
레나이의 반응이 이상한 건 아니에요.
발음이 귀엽다고 헤실거리는 셀레스가 이상한 거죠.
“한 번만 설명해줄 테니까 잘 들어, 두 번은 안 해줄 거야아~”
레나이는 셀레스가 설명해주는 족족 종이에 적어나가며 뿌루뿌루에 관한 모든 정보를 확인했어요.
보답이라고는 뭣하지만, 레나이는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없냐며 셀레스에게 물어봤죠.
“으응~? 아, 너 말이야? 여기에 남자가 안보이던데에? 왜 군대에 여자밖에 없는 거야아.”
“그건 본인 취향이다. 좋지 않나, 꽃들로 구성된 기사단은 순결하고, 아름답고,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해주지.”
“너어…. 여자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만났을 때부터 나한테도 그렇게 안기라고오…. 방심하면 안 되겠네에….”
“무드 같은 건 확실하게 챙겨주니까 만약 본인에게 안길 일이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하핫.”
“나한테는 웃을 일이 아니거드은…. 네가….”
“아, 말하는 도중에 미안하군. 나머지는 황궁에 가서 하도록 하지. 수송 마차가 온 모양이야.”
셀레스는 레나이 때문에 말이 끊겼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술을 좋아하네요.
그렇지만 셀레스가 이렇게 순조롭게 협조해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보아하니 모든 일을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세계에는 왜 오게 된 걸까요?
아직 의문이 많이 풀리지 않은 존재 같아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레나이가 황궁에 너무 쉽게 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아니면, 황궁이기에 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기사, 마법사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날뛰면 아무리 마군주라 하더라도 곱게는 못 나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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