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금방 들켜버릴 비밀 (1)
* * *
셀레스와의 일이 조용히 진행되면서, 비교적 가벼웠던 혁명전쟁 이후.
질과 그 가족들은 집에 다시 돌아와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죠.
바로 질,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요.
“메인은 이걸로 세 개. 그리고 서브로 장식될 세 가지가 더 필요한데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질은 책자에 그려진 그림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으며 말했어요.
“아가씨, 그럴만한 돈은 있는 거야? 제일 큰 사이즈라고, 개당 200만 Eli는 할 텐데. 옆에 추가로 들어갈 것들만 하더라도 가격이 뻥튀기 될 거야.”
점주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며 질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향했죠.
아마 질이 지금껏 모은 돈만 하더라도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박살 낸 전적이 있으니 꽤 있겠지만요.
개당 200만이 넘어가는 물건을 3개나 산다는 거예요.
그것도 10살의 여자아이가.
질은 이런 당연한 의심을 품은 점주에게 자신의 신분증에 적힌 모험가 랭크를 보여줬어요.
[A+]라고 적힌 등급을 보자마자 점주는 의심을 거둘 뻔했어요.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것은, 신분증에 적힌 질의 나이 때문이었죠.
“…아가씨 10살이라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돈만 있다면 받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럴만한 돈은 있어요! 저 바빠요! 서브로 들어갈 색은 빨간색이랑, 노란색이랑, 보라색으로 준비해 주세요. 얼마예요?!”
“다 해서 800만 Eli. 그래도 이런 주문은 난생처음이라서…. 많이 깎아준 거야! 알지? 메인 소재에 링까지 주문제작이었으면 원금 전부 받았을 텐데, 링의 재료만 달라고 한 거니까…. 이봐! 언제 올 건지는 말을 하고 가라고!”
질은 주머니에서 수표 8장을 꺼내 점주에게 내밀곤 점주의 말을 듣지도 않은 체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문이 닫히는 순간에 점주가 달려들어 다시 문을 열고 질을 찾아 소리쳤지만, 질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어요.
보나 마나 문을 건너는 능력을 쓴 거겠죠.
질이 나타난 곳은 레드 카펫이 깔려있으며, 화려한 조명이 밝게 빛을 비추며, 바닥은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들어간 돌바닥으로 장식된 곳, 정장을 입은 수많은 사람이 바삐 오가는 곳이었어요.
눈치가 약간이나마 있더라도 거액의 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질이 이곳에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죠.
방금만 하더라도 800만 Eli라는 거금을 쓰고 왔으니까요.
그런데 질이 누군가를 찾는가 싶더니, 곧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은 여자가 와서 말을 걸었어요.
“고객님, 혹시 오늘 예약하신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님이신가요?”
“아, 네. 맞아요. 며칠 전에 카탈로그에 나온 것만 보고 돌아갔었거든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뭘 사야 했길래 카탈로그를 보고도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고 하는 걸까요?
구매에 있어서 신중한 것은 나쁘지 않지만요.
“저번에 보고 가신 것들은 실내에 준비된 것이었기에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실외에서 할 수 있는 옵션도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아, 그래요…? 샘플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따라오시겠어요?”
질은 여자를 따라가 긴 복도를 빠져나와 화원과 비슷한 곳에 도착했어요.
입구에는 아치형으로 된 문틀이 자리 잡고 있고, 양쪽으로 줄지어 선 기다란 벤치, 중앙으로는 기다란 길이 나 있어 끝까지 이어지고 있었어요.
길의 끝에는 단상과 꽃이 조각된 사람보다도 더 큰 상이 놓여있었고요.
주변은 전부 꽃, 모든 것이 꽃이었죠.
“괜찮은 거 같은데요? 이거, 다른 곳에 설치하려면 얼마나 들어요?”
“철거비용 포함, 40만 Eli에서 공사에 방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추가금액이 발생할 것 같습니다.”
“좋네요. 제가 지도 가져왔거든요. 지도에 표시해둔 곳에 설치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선금은 지금 낼게요.”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아까와는 다른 지폐 4장은 꺼내 건네주고는 3일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며 말하고 또다시 문을 건너버리는 질이었어요.
그다음으로 질이 향한 곳은 꽃집이었어요.
“언니, 여기 국화 있어요? 다섯 송이.”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모든 일을 재빨리 마치고 싶어하며 계산을 마치고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뒤뜰의 가족들의 묘비에 간 것이었어요.
그런데 질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동생까지 3명이 아니었나요?
왜 다섯 송이나 산 걸까요?
“질? 꽃을 사러 갔다 온 것치고는 늦었네요?”
“아, 어, 할 일이 있었어요.”
벤치에서 책을 읽던 아오이는 돌아온 질을 보자마자 늦은 이유에 대해서 물어봤지만, 질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네요.
그런데 꽃을 바로 묘비에 놓지 않고 아오이의 앞에 가버리는 건 또 왜 그런 걸까요.
그렇지만 아오이는 왜 그러는지 아는 것처럼 바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질에게 건네줬어요.
“메모리얼 스톤을 달라는 거죠? 준비해놨어요. 자.”
“고마워요. 전부 언니 덕분이에요.”
“그렇게 저를 치켜세워 줘도 지금 당장 질에게 줄 만한 것은 없는데요?”
“언니. 그럴 때는 솔직하게 칭찬을 받고, 좋아하면 되는 거라구요. 이젠 조금 뻔뻔해져도 되잖아요?”
“음, 그래요. 확실히 메모리얼 스톤은 저밖에 만들 수 없는 데다가, 제가 안 만들어 준다면 질이 슬퍼할 테니까요.”
“아, 하하…. 제가 그러라고 했지만, 언니, 조금, 네에….”
질은 멋쩍게 웃고는 늘어선 묘비 앞으로 가서 국화를 한 송이씩 세 송이를 내려놓고 기도를 올렸어요.
나머지 두 송이를 아직 놓지 않은 것은, 질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메모리얼 스톤과 연관이 있을 거예요.
누구의 묘비일까요?
“그렇지만, 질. 저는 조금 궁금하네요. 영혼의 동화라는 게 그렇게 영향이 컸나요?”
“저, 마음만 먹으면 로니아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어요. 해볼까요?”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음, 흠! 헤헤, 해본 말이에요오…. 어쨌든 로니아랑 가티아는, 이미 저의 일부예요. 로니아가 죽기 직전까지의 감정이 전해지던 게 아직도 생생해요. 말은 안 했지만…. 로니아는 저와 동화된 이후로 죄의식 속에 살아왔었어요. 그럼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저의 손길을 계속 거부했던 거예요.”
나머지 두 묘비는 로니아와 가티아의 것이었나 보네요.
질은 묘비 앞에 앉아 메모리얼 스톤을 쥐고, 옛날 일을 떠올리듯이 눈을 감았어요.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경험했던 것처럼 아오이에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죠.
“…돌이킬 수 없는 죄도 있는 법이에요.”
아오이는 질과의 대화를 시작했을 때 접어두었던 책을 옆에 두며 흐름을 끊었어요.
당연히 아오이의 입장에서야 베리아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으니까요.
게다가, 실제로도 슬리브스터라는 집단은 아직도 멀쩡히 활동 중이니 이 죄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혁명군은 운이 좋아 한 번에 소탕하는 게 가능했다지만, 슬리브스터라는 노예상이 얼마나 더 오랜 기간 뒷세계에서 암약할지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로니아는, 죽기를 선택했을지도 몰라요. 점점 저희들과 좋은 감정을 갖는 게 죄를 무겁게 느끼게 하는 것 같아서. 스스로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렇지만 저는….”
“질, 그건 도망친 거예요. 죄의 무거움을 버틸 수 없어서 책임질 생각은 못 하고, 도망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던 거죠. 끝까지 비겁자에 악인이었던 거예요.”
“알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제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해주고 싶었어요. 로니아는 저와 만난 뒤로 항상 마음속으로 괴로워했고, 가티아는, 그녀는 저의, 아, 아니! 로니아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요. 로니아가 사랑했던 사람은 저한테도….”
베리아가 사라진 뒤에도 동화의 영향은 남아있는지, 가티아를 자신의 인연이었던 것처럼 말하려 한 질이에요.
미리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해지는 정도도 그렇지만, 영향을 없앨 수도 없다는 것이 꽤 크네요.
“저는 그렇게 동화의 영향이 심할 줄 몰랐어요. 베리아의 성격이 날이 갈수록 유해지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요. 괜찮다면, 가티아에 대해 말해줄래요?”
“으응, 싫어요. 아오이 언니가 가티아에 대해 관심이 있는 건 의외지만요. 기쁘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싫어요.”
질은 메모리얼 스톤에 집중하는 것을 끝냈는지, 묘비에 준비된 공간에 놓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리고 반 바퀴 빙글 돌아 아오이를 바라보고는 머뭇거리며 말하는 데에 있어 뜸을 들이고 있었죠.
“…뭔가 할 말이 있나요?”
“저, 뭔가 잊은 게 있지 않아요?”
“또 그거에요? 제가 잊은 게 뭐가 있다고…. 질, 저는 이번에는 장담할 수 있어요. 질에게 미안해할 만한, 잊은 건 전혀 없어요.”
“거짓말, 또 거짓말~ 뭐어, 저도 깜빡한 거라 넘어가 주겠지만요? 언니, 혹시…. 저랑 라피아 언니랑…. 그러니까아….”
자신을 탓해놓고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아 답답했는지, 아오이는 왜 그렇게 뜸을 들이냐며 퉁명스레 말했어요.
하지만 질은 더욱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아니, 아니에요! 나중에! 라피아 언니가 있을 때 같이 말할게요!”
“질, 질!? 말은 끝까지 해야죠!”
“나중에요!!”
…라고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어요.
말하기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말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읽기를 선택한 아오이였죠.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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