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그 시간, 황녀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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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마법 지부의 전쟁 건이 대충 마무리되어, 탈리안은 질과 라피아를 집으로 향하게 했어요.
모두가 지친만큼 제대로 된 휴식을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황녀에게 빠르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인 자신은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지만, 아오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헛걸음을 하게 되었어요.
황궁에서 말하기를, 황녀는 혁명군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먼저 전장에 나섰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황녀가 열심히 싸우고 있는 곳인 플로스 평원을 보도록 해요.
황궁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대삼림을 경계로 넓게 펼쳐진 곳이었는데, 숲 안쪽을 거점 삼아 혁명군이 진을 치고 있었거든요.
질이 마법 지부에 들어가기 몇 시간 전, 황녀는 임시 막사 안에서 지도를 보고 있었어요.
지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돌들이 놓여있었는데, 빨간 돌은 지도의 평원 부근에 넓게 퍼져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고, 파란 돌은 숲에 여러 덩이로 뭉쳐있었어요.
“황녀님, 혁명군을 살펴본 결과. 리더로 보이는 자는 없었습니다. 따로 저희 쪽에 전하는 말도 없고요. 그저…. 저희 군대와 일절 교전 없이 대치 중이기만 할 뿐입니다.”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레나이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막사 입구를 가리고 있는 천을 들추고 들어오는 아비고르였어요.
“일부러 허점을 보이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 많은 수의 혁명군이 황궁 바로 옆까지 숨어들어오지 않았나. 도대체 무슨 수로….”
“먼저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어떠신가요. 황궁에 비하면 저들의 장비는 좋지 못합니다.”
아비고르의 말도 맞아요.
아무리 저들이 오랜 기간 준비를 해왔다고 해도, 그 장비의 질과 병력의 훈련 강도는 황궁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거예요.
탈리안과 라피아가 황궁의 기사들을 상대로 잘 싸울 수 있던 것은, 물량전에 특화된 마군주와 비상식적인 재생력을 기반으로 한 초월적인 지구력을 자랑하는 뱀파이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무래도 레나이는 뭔가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어요.
“아비고르, 그대가 보기에는 저들이 단순히 수적으로만 뭉친 바보들처럼 보이나?”
“마군주도 보이지 않으며, 리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비책을 가지고 있더라도 황궁 앞에서는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옆에서 봐 왔으니, 그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아있어.”
아비고르는 끈질긴 레나이의 태도에 대답하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듣기로 했나 봐요.
이에 레나이는 뒤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며 말했어요.
“이번에 재앙의 문을 통해 넘어온 마군주는 셋이다. 그런데 혁명군에 가담한 녀석은 고작 하나이지. 나머지 둘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요컨대 나머지 둘의 마군주가 너무나 신경 쓰였다는 거네요.
어쩌면 마군주 중 하나가 혁명군을 도와 황궁의 바로 옆까지 이동하는 데에 도움을 줬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죠.
확실히 혁명군의 리더였던 다르크,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마군주가 베리아에게 처리당했는데 무슨 수로 혁명군이 황궁 옆까지 왔겠어요.
남은 수라면 마군주밖에 없겠죠.
“혁명군에 가담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아비고르, 그대처럼 황궁과 본인에게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마군주가 흔하다고 생각하나? 본인이 다리를 핥으라면 핥고, 옷을 벗으라면 벗는, 그런 마군주가 흔하냐는 말이다.”
“읏흠! 황녀님, 지금은 그런 말보다는….”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탁자 위의 지도로 향하는 아비는 급하게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황녀는 다리를 조금 들어 올려 내밀고는 명령을 한가지 내렸어요.
“아비, 핥아라. 구석구석, 깨끗이.”
“읏…. 지금은 전쟁 중이지 않습니까! 이런 중요한 시기에…! 으윽…. 아, 알겠습니다.”
전쟁 중이라며 레나이를 회유하려는 아비였지만,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고압적인 시선에 주춤거리며 레나이의 앞에 다가와 꿇었어요.
그리고는 레나이의 다리 갑주에 손을 옮겨 천천히 풀어내려고 했죠.
황녀가 웃음을 참아냈다면 아마, 얼굴을 붉히며 발을 핥았을지도 모를 일이예요.
황녀가 발을 걷어가지만 않았더라도, 양손에 레나이의 발을 담고 핥았을 거란 말이에요.
“훗, 농담이다. 그대 말대로 전쟁 중이니 삼가거라.”
자신을 놀리는 말에도 아비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하지만, 확실히 다른 마군주 둘은 아가레스와 함께 너무나도 조용하게 지내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 너무나도 조용하지. 이상할 정도로. 그리고 본인에게는 느껴진다. 이 어딘가에서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는 것이.”
“마군주인 제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본인은 시선이나 직감 같은 것에 예민하지. 마기야 얼마든지 숨기고 있을 수 있잖나. 아이펠슈에는?”
레나이는 황제의 핏줄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평범한 인간일 텐데,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네요.
주변에 보이지도 않는데 시선을 느끼고 알 수 있다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건 확실해요.
아비도 토를 달지 않고 지도에서 숲의 최 안쪽을 가리키며 대답했어요.
“아이펠슈에는 황녀님이 명하신 대로 혁명군의 뒤에서 매복 중입니다.”
“그럼, 슬슬 움직이지. 본인이 앞장서겠다.”
“그건 안됩니다. 이번 작전의 총사령관, 하물며 황제의 장녀께서 나선다니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레나이의 앞을 가로막아버린 아비예요.
물론 그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없기는 하지만, 레나이는 한두 번도 아닌 일에 왜 이리 호들갑을 떠냐고 할 뿐이었어요.
“아비, 그대는 너무 본인을 감싸들려고 해. 본인이 자기 몸 하나 지킬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나.”
“그래도 안 됩니다.”
“거 참, 밤에는 매번 지기만 하니 낮에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본인의 명령에는 따라야 하지 않겠나. 그대는 본인의 신하인데.”
“신하 된 자로서 말씀 올리는 겁니다.”
레나이의 부끄러운 말에 눈썹을 꿈틀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비는 강경하게 나왔어요.
둘의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좋았는지 몰라도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만하네요.
“황궁에서의 답답함 때문에 이렇게 나와서 싸우는 것인데, 그대까지 본인을 속박하려고 하는 것인가?”
“황녀님, 최근에 단탈리안의 집에서 지내겠다고 하신 일 때문에 황궁 내에서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적어도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십시오.”
“하아, 망할 노인네들…. 그렇다면 아비, 그대가 나가서 혁명군들을 생포해오도록. 전력 차도 크게 나지 않고 싸우는 도중에는 무적이라 칭할 수 있는 그대라면 문제없겠지?”
“당연합니다. 저보다 강한 마군주가 나오더라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을 죽이지 않고 생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베리아와 싸울 때는 왜 패배했던 걸까요?
어떤 능력이 있길래 이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지도 의문이네요.
아비가 나가려는 것을 막지도 않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자신감에 대해 신뢰를 해도 괜찮다는 것이겠죠.
“아! 아비? 밖에 있는 문지기 중 한 명, 아무나 들어오라 해.”
그런데 아비를 갑자기 붙잡고 한다는 말이 문지기보고 들어오라는 말이네요.
아비는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듯, 눈썹을 찡그렸어요.
“황녀님, 지루하신 건 알겠습니다만…. 안됩니다. 제아무리 이 가사단이 황녀님의 군대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비!! 그대는 본인을 지루함에 찌들게 해서 죽여버릴 셈인가!!”
“어린애도 아니고 매번 왜 이러시는 겁니까!”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일어선 레나이가 소리치는데도 아비는 더욱 화를 내며 다그쳤어요.
매번이라는 것을 보면 아비가 레나이에게 찾아온 뒤로 항상 이랬다는 것일 텐데, 뭘 원하길래 이러는 걸까요?
“이럴 거면 차라리 본인을 죽여! 이 세상에서 즐거움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고!”
“황녀님의 즐거움은 오로지 색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저와 같은 여자만을 노리시는!”
“본인이 색을 밝히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러는 것인가! 당장에 아비! 그대만 하더라도 좋다고 엉겨 붙으면서!”
삿대질까지 해가며 아비에게 뭐라고 하는 걸 보면 꽤 억울했던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황궁에서 레나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숨 막히는 생활을 하는 것은 확실해요.
게다가 아비도 좋다고 레나이와 어울린다고 하는 걸 보면 굳이 이 정도로 거부할 일인지 의문이 드네요.
아니면 질투일까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불러달라고 했기에?
“덕분에 저도 곤란합니다! 이러려고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닌데, 황녀님이, 황녀님이…!”
“아아, 알았네, 알았다고. 그대는 밤에 이뻐해 줄 테니, 어서 가서 문지기를 불러오도록.”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기사단에 제발 남자 좀 끼워 넣으시라는 겁니다! 제가 몇 번이고 건의드리는 사항인데,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황궁 내에서 황녀님 이미지가 물불 안 가리는 레즈비언이라는 거 아십니까?!”
“큼, 으흠! …본인의 기사단에 냄새나는 남정네들을 끼워 넣기 싫어. 어쨌든 다녀와.”
자신을 비하하는 말에도 레나이는 아비를 혼내지 않고 헛기침만 반복하며 얼른 내보내려고 했어요.
명령을 내린 지가 언제인데 이런 일로 출전이 늦어진다면 아무리 마군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싸움이 힘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아비 역시 이런 일로 더 말싸움하기는 싫은지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바로 막사를 나가버렸어요.
당장에 아비가 빠져나가고 기사들의 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어요.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지도를 살펴보던 레나이는 좀이 쑤시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바로 일어섰어요.
“…아비, 그대가 자리에 없는데 본인을 막을 수는 없겠지.”
레나이도 못 말리겠네요.
아비가 없는 틈을 타서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찾기 위해 황궁의 진영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다니, 황녀로서의 위엄은 어디 간 걸까요.
하지만 레나이의 이런 노력은 헛수고였어요.
거점을 지키는 기사들을 찾아 말을 걸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 때문이었는데요.
“황녀님, 저 아비고르 부기사단장님께 혼나기 싫습니다.”
…라는 힘 빠지는 대답을 듣거나.
“오늘 기사단 전체에 황녀님의 취미에 어울리면 벌을 내릴 것이라는 부기사단장님의 말씀이….”
이런 레나이의 어깨에 힘을 빠지게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한두 명이 이렇게 대답한다면, 나머지 역시 다 비슷비슷한 대답을 할 거예요.
레나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돌멩이를 발로 차며 분노를 삭이는 것밖에 없었죠.
“이, 이이이! 아비고르으!!”
“아하하…. 황녀님 오늘은 참으시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시는 게 어떠십니까? 부기사단장님, 정말 화난 것 같았습니다.”
“하아…. 맥빠지는 날이군. 혁명군 타도라는 중대한 목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비고르와 아이펠슈에가 있기에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렇습니까? 뭐, 저희 뒤쪽으로는 황궁의 마법 포대도 늘어서 있으니 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리고 저는 황궁도 믿고 있지만, 황녀님도 믿고 있습니다.”
“기특한 말을 하기는. …그런데, 진짜 안 되겠나?”
“…안됩니다.”
기사가 레나이의 부탁을 거절하는 거야 둘째 치더라도, 전쟁이라고도 보기 어려운 일방적인 황궁의 폭력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끝이 나버렸어요.
마군주도 리더도 없는 군대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으니까요.
아마도 전 병력을 마법 지부로 향하게 했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요?
빈집을 털기 위해서 모든 병력을 아무도 모르게 황궁의 옆으로 보낸 거겠죠.
아쉽게도 레나이 때문에 막혀버린 계획이 되어버렸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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