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0 - 황녀는 잠 못 이루고 (2)
"... 지각이야. 리아나 루멘하르크."
유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음이 터질 거 같았기에 리아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 왜... 아직도... 있는거야..."
"기다린다고 말했으니까요."
"내가... 느... 늦는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그러겠다고 말 안 했는데요."
장난스러운 유진의 대답에 리아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내가... 언제 돌아올지... 알고..."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니까 괜찮아요."
"진짜... 바보.. 아니야..... 아!... 자... 잠깐만... 오... 오지마...!"
이쪽으로 걸어오는 유진의 모습에,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리아나가 허둥지둥 몸을 정리해보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나... 나... 정말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라서... 머리도... 얼굴도 죄다 엉망인데..."
유진이에게만큼은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나 유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발자국 더 내디디며 말했다.
"...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지금은 연회 중이잖아요. 그러니까 일단은...."
창가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 곡 추시지 않을래요?"
"...."
네, 기꺼이.
그 쉬운 한 마디가 어째서인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 네."
몇 번이고 입을 벌렸다가 닫은 끝에, 간신히 눈물을 흘리지 않고서 대답한 리아나가 떨리는 손을 조심스럽게 유진의 손위로 겹쳤다.
저벅─ 저벅─
악단도, 관중도 없는 어두운 무도회장이지만... 이곳에는 유진이 있었다.
척추는 곧게 세우고, 무릎은 살짝 느슨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유진의 팔이 리아나의 등을 감싸며 리아나의 왼손은 유진의 어깨 위에 살포시 얹어진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기본적인 준비 자세.
하지만 어느 때 보다 긴장한 리아나가 조심스럽게 시작된 첫 스텝을 밟았다.
".... 아핫♪"
우려와 달리 긴장은 찰나였다.
순식간에 익숙해진 리아나는 달빛과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오직 둘만의 무도회를 마음껏 만끽한다.
만면에 떠오른 미소.
지금만큼은 다른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서, 이 순간을 영원히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끝나버린다.
─탓
더 붙잡고 있으면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춤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물러난 리아나는 치마 끝을 살짝 붙잡으며 인사했다.
"아하하하핫..!! 유진이는 생각보다 춤 못 추네."
"... 제가 못 추는 게 아니라, 리아나가 너무 잘 추는 것에요."
"음... 박자를 두 번 놓쳤으니까 마이너스 20점, 거기에 발도 한 번 밟았으니 추가로 마이너스 15점, 총 마이너스 35점이야!"
"... 점수가 너무 짜요. 음악도 없이 이정도면 잘했는데."
"아하하하핫!! 그런가? 하지만... 유진이니까. 가산점 100만 점.... 그래서 총점은 1000만 점이야!! 응! 최고점이네! 짜자잔! 상품은.... 아름다운 황녀님이야!"
리아나가 달려가서 품에 안겼고, 너무나 제멋대로인 점수 측정에 유진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리아나가 잠시 눈을 감고 품 안에 기대고 있자, 유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가방은 잘 샀어요?"
"으음.... 보다시피 이번에도 꽝.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샀어."
스윽─ 스윽─
대답을 들은 유진은 손수건을 꺼내 땀과 흙먼지로 엉망이 된 리아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 미안해요."
"응? 뭐가? 아! 발 밟은 거? 아니 괜찮아~♬ 어려운 스텝이었는 걸? 한 번 밖에 안 밟은 것도 잘한 거야!"
"아니요... 아니, 그것도 미안하기는 한데.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해요..."
유진의 사과에 리아나는 뺨에 손가락을 대고는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 으응?... 나는 유진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리아나, 저 진지하게 하는 말이에요.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저도 같이 가요."
"...."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유진의 눈빛에 더는 말을 돌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어떻게 알았어?"
"멜피사에게 물어봤어요. ...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잖아요. 리아나 직접 나섰는데 명품 따위를 사지 못할 리가 없는걸요."
"... 흐음. 나, 멜피사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미안하지만 멜피사는 리아나보다 제가 더 좋다네요."
"하아... 정말... 다 들켜버렸네...."
리아나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멜피사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진이 직접 묻는다면 멜피사로서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품에서 벗어난 리아나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 있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솔직히 지금도 그냥 변덕을 부려서 왔을 뿐인걸? 나는 황녀님이라고? 이런 연회 같은 건 지긋지긋할 정도야."
"하지만 저랑 같이 다닌 적은 없잖아요. 저는 리아나와 함께 다니고 싶어요. 리아나는 아니에요?"
"... 흐음, 자꾸 그런 말만 하면... 감당할 수 없어질걸?"
안 그래도 감정이 억누르기 힘든 곳까지 올라와 있는데 계속 저런 말만하면... 못된 마녀에게 덮쳐져도 할 말이 없다.
"... 유진아. 네가 나를 구하기로 선택했던 것처럼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야. 나 때문에 너까지 더러워질 필요 없어."
괴물과 싸우는 건 영웅의 일이고, 인간을 죽이는 건 마녀의 일이다.
상대가 아무리 추잡하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도, 유진이라면 자신이 빼앗은 목숨에 책임감을 가질 것이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유진이가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내가 해결할 테니까... 오늘 밤의 일은 그냥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응, 그게 좋겠어!♪ 아무것도 못 본 거로.... 응? 음? 유진아... 가... 가까운 것...?... 같은.. 에?"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때 무서운 표정을 한 유진이 다가오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리아나가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친다.
쾅─!
그렇게 벽으로 리아나를 몰아넣은 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아까부터 쫑알쫑알 말이 많아."
"유... 유진아?"
"내가 처음 너를 품기로 했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나?"
유진의 강압적인 말투에 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에..."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못된 마녀를 사랑에 빠트린 그 최악의 고백을.
"... 나를... 아니... 저를... 길들여준다고 했어요..."
"그래, 내가 너를 길들여주겠다고 말했다."
스윽─
유진의 손끝이 턱 끝에 닿자 몸이 제멋대로 떨려온다.
"... 흐읏."
"... 내가 너를 길들이겠다는 건, 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나까지 더러워질 필요 없다고?"
턱 끝을 붙잡은 유진이 리아나의 눈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웃기지 마라. 리아나. 처음 너를 품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공범이 되었다. 그러니... 다시는 혼자서 감당할 생각하지 마라."
"....."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밝게 빛날 수 있으면서도 끝까지 나와 같이 더럽혀지겠다는 유진의 말이...
"뭐하고 있지? 알아들었으면 대답해라. 리아나 루멘하르크."
너무나 기쁘고, 괴로워서 심장을 찢어질 것 같다.
"네... 저의... 주인님."
리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공범인 걸 마침내 인정하는 순간.
두근─ 두근─
심장이 지금껏 없었을 정도로 미쳐 날뛰는 게 느껴진다.
'.. 나... 나... 왜이래..?'
입꼬리가 제멋대로 씰룩거리고, 유진의 얼굴 보는 게 두렵다.
가슴에서 넘쳐 흐르는 이 감정을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
"... 응, 그거면 됐어요."
유진이를 사랑한다는 자각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마치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한참 넘어버린 느낌이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 이거!... 위... 험. 해...!!'
얼마 전, 유진이와 나눴던 문답에서 리아나는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증오라고 했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때는 유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유진의 적을 없애는 게 중요했으니까.
...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사랑 이외에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 왜...! 왜... 이래... 정말..!!'
리아나의 맥박과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머릿속에서 백마를 탄 유진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지갯빛 환상의 나라가 자꾸 펼쳐진다.
'저... 정신... 차려...! 리아나... 루멘 하르크!!.. 지금.. 무슨.. 말도안되는.. 상상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목소리에서도 자아를 유지하던 리아나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 괜찮아요?"
"히끅....!! ♥"
풀썩─
유진이 어깨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성적인 쾌락과는 다른... 정신적으로 완전히 충족되어버리는 감각.
"아... 많이 힘들었나 봐요. 제가 방까지 안아 줄 테니까 좀 쉬어요."
"... 자... 자... 잠.. 잠... 깐...!"
어깨에 살짝 손을 댄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이 풀려버리는데, 품에 안기기라도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 읏차!"
'──────────!!?!?! ♥♥♥♥'
유진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하는 순간 리아나의 머리가 고장 나버렸다.
행복, 행복, 행복, 행복.
머리가 행복 이외의 감정만을 뿜어내는 방법을 잊은 듯 행복으로 가득 채워진다.
'... 나... 나... 어... 어떻게해... ♥'
술에 취해 본 적은 없지만, 만일 취한다며 틀림없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리가 어지럽지만...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하다.
'... 조... 조금만... ♥'
지금도 몸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쁘면서도, 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며 옷깃을 손으로 움켜쥐려던 순간..
"다 왔어요."
"어...?"
체감상 10초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어느새 방앞까지 도착했다.
"그럼, 푹 쉬고. 나중에 봐요."
문까지 열어주고는 곧바로 떠나가는 유진의 모습에 리아나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 차!!"
"... 네?"
"자... 잠깐... 차... 마시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