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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349화 (349/354)

Chapter 349 - 황녀는 잠 못 이루고 (1)

제국 중앙, 지하수도.

비앙카가 '퍼져나가는 악몽'을 때려잡았던 그곳에서,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수십 명의 사람이 모였다.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마지막 기회다. 학생들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고, 황실의 기사단은 수도를 떠났다."

무리의 대장, 렌돌프가 횃불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는 본래 우리 것이었던 것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렌돌프가 자신의 오른손을 들며 선언했다.

"반항하는 것들은 전부 죽여라! 어차피 유진 칼리오페만 잡으면 우리의 승리다! 그 이외에는 어떠한 자비도 보이지 마라!! 우리가 잃은 것을 그대로 갚아줘라!"

리아나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제국 대부분이 이 손안에 떨어졌을 것이다.

허나,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고 이 순간까지 지옥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니... 지금 이것은 정당한 복수였다.

"... 그럼, 출발하..."

"아하하하핫! 딱 맞췄네♪"

렌돌프가 진격을 선언하려던 순간, 개미굴처럼 퍼져있는 통로 사이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또각─

한 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

황금색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를 빛내며 리아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리아나 루멘하르크...!! 감히 뻔뻔하게도 우리의 눈앞에!!!"

리아나의 모습을 확인한 렌돌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네년이 우리를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이렇게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부..!! 전부 네년이!!!"

"배신...? 전락...? 흐음. 무슨 소리일까나?"

"시치미떼지 마라!! 왜!! 어째서!!! 우리를 배신한 거냐! 너는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렌돌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작전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기만 했어도 리아나는 제국의 황제가, 이들은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을 제 손으로 죄다 부숴버린 게 리아나가 아니던가.

"아하하핫!!! 아... 미안미안, 너무 웃겨서 너무 크게 웃어버렸네."

"네년... 도대체 뭐가 우습지?"

"그야, 웃기잖아. 사자와 토끼 무리가 진심으로 동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굴은 험악한데 머리는 꽃밭이네?"

"... 리아나...!!"

렌돌프는 자신들을 토끼 무리 취급하는 리아나에게 이를 갈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분노한 것은 사실이나, 고작 이딴 도발에 냉정함을 잃을 정도라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흥분한 척하면서도, 렌돌프는 머릿속으로 철저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 보아하니 리아나의 상태도 온전하지 않다.'

리아나의 옷과 피부 이곳저곳에 상처가 남아있고 애써 감추고는 있지만, 걸음걸이도 불안정하다.

하지만, 본래 상처 입은 맹수가 가장 위험한 법.

어차피 이곳에서 시간만 끌면, 다른 루트로 잠입한 동료들이 유진을 생포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때가 되면 저 도도한 얼굴을 직접 밟아주마.'

승리가 확정된 상황에서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다.

"... 흐음, 갑자기 말이 없어졌네? 아, 혹시 시간을 끌 생각이야?"

그러자 이미 꿰뚫어 봤다는 듯 속삭이는 리아나의 말에 렌돌프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입꼬리를 비틀며 답했다.

"그렇다면 어쩔 거지? 이미 내 동료들은 다른 길을 통해 잠입해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늦었다."

지금부터 리아나가 쫓아간다고 해도, 이미 동료들이 카르네아를 점령한 뒤일 것이다.

'... 아무리 카르네아의 출신이라도 해도 아직은 학생일 뿐.'

그에 비해, 이쪽은 사람을 죽이는 것의 전문가였다.

본보기로 잔인하게 몇 명 죽여버리면, 학생들은 알아서 전의를 잃을 것이다.

그때, 리아나가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그런데 혹시 다른 길에 잠입했다는 동료는... 이걸 말하는 건가?"

툭─ 투두둑─ 투툭─

리아나의 손을 펼치자 그 안에서 증표가 우수수 떨어진다.

"정말... 바퀴벌레도 아니고 귀찮게 이곳저곳에 퍼져있어서 아침부터 뛰어다녔잖아♪"

".... 네... 년...."

바닥에 떨어진 증표를 본, 렌돌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고작 하루 사이에 우리를 전멸시켰다는 거냐!! 이 괴물 같은 년이... !!"

"흐음... 겨우 너희 따위를 처리하면서 괴물이라니... 아하하하핫!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리아나아아아아아아!!!!"

더는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한 렌돌프가 진심으로 소리쳤고.

"... 원래라면 나와 함께 사라졌어야 할 버러지들이... 운 좋게 목숨을 건졌으면 어디 구석에 처박혀 살았으면 좋았을걸."

동시에 리아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제 됐다!! 죽여버려!!!"

렌돌프의 말에 달려오는 적들을 보며 리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 있잖아. 사실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어."

나 때문에 더는 멜피사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같은 것에게도 비앙카가 같이 가자고 해서 기뻤어.

나도 유진이랑 춤을 추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었어.

"... 사실은 나도 파티에 가고 싶었어."

미움받고 싶지 않아. 슬퍼하는 얼굴은 보기 싫어. 웃어줬으면 좋겠어.

이쁨받고 싶어, 귀여움받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나의 태양이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혀진 내가 나서야 하니까.

"미친년이 자꾸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죽어버려!!!"

"... 도망치지 않는 건 고마워. 하나하나 찾아서 죽이기는 좀 귀찮거든."

리아나의 말에 렌돌프가 이를 까득 갈았다.

"여유로운 척하지 마라!! 네년이 맹약을 어겨 약해진 건 이미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 동료를 전부 상대했다면 정상은 아닐 터!! 그런 몸으로 이 숫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맞아. 나는 약해졌어. 네 말대로 많이 지쳤고.. 응, 숫자도 그쪽이 많네."

렌돌프의 생각과는 달리 '제국의 어둠'을 걷어내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없었지만, '퍼져나가는 악몽'은 달랐다.

만약에 흑기사를 처음에 쓰러트리지 않았더라면, 리아나가 패배했을지도 모르는 수준의 강적.

그들을 상대하느라 리아나의 몸과 정신에 쌓인 피로가 이제 슬슬 한계에 가까웠다.

....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 뭐?"

"내가 약해졌다고... 내가 지쳤다고... 고작해야 그딴 이유로 나를 이기겠다고?"

사아아아아아악────────!!

리아나가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렌돌프는 깨달았다.

어째서 리아나가 자신들을 토끼 무리라고 불렀는지.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격이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포식자와 피식자로 결정된 존재처럼, 리아나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렌돌프가 질척한 열등감 속에서 소리쳤다.

"리아나 루멘하르크으으으으!!!"

"... 재미없어. 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이번에는 철저하게 지워줄게."

이번 일을 들키면 분명 유진이는 화내겠지.

왜 전부 혼자 감당했냐고, 어째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화내는 유진이는 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정말로 들키고 싶지 않지만....

응, 만일 들키면... 어쩔 수 없지.

도망치지 말고 똑바로 사과하면, 잔뜩 화를 내도 결국 유진이는 용서해 줄 테니까.

"... 그러니까 안심하고 죽어줘?"

어두운 지하수도 안에서 리아나는 작게 웃었다.

***

늦은 새벽, 카르네아의 정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벽에 도달한 리아나가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아무래도 이 꼴로 파티는 무리네..."

완전히 엉망이 된 드레스, 백옥 같았던 피부에는 피와 먼지로 뒤덮였다.

... 오늘만큼 자신이 약해졌다는 걸 통감한 적은 없었다.

힘 따위야 유진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내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유진의 곁에 있으려면 힘이 필요했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유진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순수하고 올곧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이미 오래전에 더럽혀진 인간이니까.

"... 그럼 돌아갈까."

최소한의 체력을 회복한 리아나가 곧장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 기다리고 있을게요.'

떠나기 전 유진이 남긴 한 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아하하하...! 유진이도 내가 이렇게 늦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또각─ 또각─

이성적으로는 이 시간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각─ 또각─

마음속 한 곳에 작은 기대를 품은 채,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후우...."

마침내 연회장 문 앞에 선 리아나가 떨리는 마음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리아나의 눈앞에 보이는 건.

.... 텅 비고 어둠이 내려앉은 연회장이었다.

"... 응, 당연한 거잖아."

알고는 있었지만, 심장이 욱신거린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더욱더 혐오감을 느낀다.

기다리지 말라고 한 주제에 제멋대로 기대하고, 그러면서 또 제멋대로 실망하고.

이기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다면 몇 번이고 내가 나설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

"자! 그럼, 돌아갈까."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은 리아나가 연회장을 떠나려던 순간.

화륵─

연회장 안쪽에서 켜지는 촛불 하나.

"... 아?"

작지만 너무나도 밝게 느껴지는 빛에 리아나의 두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이 벌어졌다.

일렁이는 촛불 빛 아래에서 유진 칼리오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 지각이야. 리아나 루멘하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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