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2 - 루시아 우르엘라 (5)
"....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
또다시 유진의 죽음을 마주하고 터져 나온 건 울음이 아닌 웃음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실수하지 않았다.
감정을 덜어냈다.
죽을 만큼 노력했다.
그럼에도 유진을 구할 수 없었다.
마치 세계가 유진의 죽음을 바라는 듯한 느낌.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반복해야... 너를 구할 수 있는 걸까....'
피어오르는 절망 속에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5회차, 입학식 3년 전.
눈을 뜬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 회귀를 고백하자."
두려웠다.
회귀를 고백한다는 건, 유진을 위해 나를 희생 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과연 유진이가 어떻게 반응할까.
나를 경멸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유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내게 못 할 것은 없었다.
***
"... 저, 회귀했어요."
"네?"
카르네아의 입학식 날 나는 유진을 붙잡고 전생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했다.
"그 작전은 통하지 않아요. 차라리 비비안이 숨어있다가 후방에서 기습하는 게 나을 거에요."
"알겠어. 그럼 비비안 부탁해도 될까?"
"네.. 넷! 유진님! 여.. 열심히 할게요!"
회귀 사실을 공유하니 확실히 편해졌다.
개연성 없는 짓을 할 때 변명을 댈 필요도 없었고, 무언가를 반대할 때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생겼다.
"유~진아♬"
"... 황녀 전하."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내가 아닌 유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리아나가 유진에게 흥미를 느낀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낸 건 이번 회차가 처음이었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내가 아닌 유진이 표면에 나서서 활동했으니까.
"응~♪ 유진이 그러면 다음에 봐~"
"네, 황녀 전하께서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리아나가 떠난 뒤 나는 유진에게 말했다.
"...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정을 주면... 죽여야 하는 순간 망설일지도 모르니까.
"응, 나도 알아."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유진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아렸다.
**
'...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리아나가 유진에게 남긴 유언이자 저주.
저 말을 들은 이후 유진의 얼굴 뒤편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애써 모른척하며 내가 말했다.
"주인님...?"
"아... 루시아..."
"... 후훗... 이 호칭에도 익숙해졌나 봐?"
"... 응, 많이 들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어깨를 끌어당겨 나를 안아주는 유진.
... 이번 생에도 나는 유진과 연인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비비안이랑 릴리스는?"
안타깝게도 혼자가 아니라, 세 명이 함께였지만.
"잠깐 조사하러. 곧 돌아올 거야."
유진이를 독점할 수 없는 건 솔직히 아직도 괴롭지만...
그래도 유진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늘었다고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그래... 이제 곧 '되살아난 타락'이 나타날 시점인가."
유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4회차의 유진이 죽음을 맞이한 날이 다가온다.
그 날의 사고는 '되살아난 타락'의 숙주가 될 트리스탄의 시체를 태워버렸기에 발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번 회차에는 확실히 대처할 수 있도록 트리스탄의 시체를 그대로 놔두었다.
"... 루시아. 우리... 해낼 수 있겠지?"
"응... 반드시."
나와 유진, 그리고 비비안과 릴리스의 힘이 더 해진 상태다.
꼭 해낼 수 있을 것이다.
***
6회차, 입학식 4년 전.
"...."
걱정했던 '되살아난 타락'은 어떻게든 막아냈다.
허나, 마지막 재앙인 '퍼져나가는 악몽'을 막지는 못했다.
이유는 단순히 힘이 부족했다.
이름답게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는 악몽'은 순식간에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 모습을 보니, 최종보스를 봉인한 1회차 때 유진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퍼져나가는 악몽'은 명확한 공략법이 보이는 재앙이어서 그럴까?
오히려 이전 회귀 때보다 절망감은 덜했다.
단순히 힘이 부족한 거라면 더욱더 노력하면 될 뿐이었다.
'... 할 수 있어.'
내겐 힘을 기를 4년이란 시간이 있었다.
**
입학식 3일 전.
충격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 유진 칼리오페가... 실종됐다고? 나... 납치라도 당한 거야?!"
"아닙니다, 루시아님. 유진님께서는 스스로 떠난 것 같습니다. 칼리오페 측에서도 찾는 중이라고 하지만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고요."
이어서 정보원이 뭔가를 더 말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 어째서?'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채 이마를 짚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지금까지 6번의 회귀 동안 자잘한 것은 달라졌을망정, 큰 틀에서의 유진은 거의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졌단 말인가?
전생에 유진에게 영향을 줄만 한 건...
"...!"
그때, 불현듯 머리에 든 생각.
'... 내가 회귀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에...'
시간을 거스른 존재인 내가 그것을 유진에게 고백했기에 무언가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 그래도."
괴로웠지만 꼭 이번 일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유진이 떠났다는 건 영혼이 돌아와 있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그저 찾아내면 되는 일이니까.
***
유진이 사라진 이후, 나는 혼자서 여러 재앙을 막아냈다.
이번에는 비비안에게 힘을 빌리지는 않았다.
유진이 없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친구마저 잃어버리면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 대신...
"자, 이번 카르네아 습격 사건에 대한 보고서."
비앙카 베아트리스를 손에 넣었다.
비앙카는 비비안의 언니라고는 믿지 않을 정도로 전혀 반대의 성격과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
"고마워요."
비앙카가 건네준 보고서를 잃던 중 한 가지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습격자의 리더는 180cm 정도의 검은 눈의 검은머리의 남성
"...!"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파볼리에의 특징이었다.
'... 우... 우연이야... 그럴 리가 없어...'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유진이가 사람을 죽이는데 끼었을리 없지 않은....?!
그때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에 몸이 떨려왔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 비앙카."
"왜."
"... 지난번 습격 때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했죠."
"응, 보고서에도 적혀있잖아. 뭐 좀 심하게 다친 애들은 있는데... 운이 좋았는지 그래도 한 명도 안 죽었어. 근데 왜?"
"...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견디기 어려운 불안감에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유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지키는 건 점점 더 익숙해졌다.
이상하게 재앙들의 난이도가 낮아진 느낌도 들었고, 무엇보다 리아나의 행동이 달라졌다.
사람을 거리낌 없이 죽이던 이전과는 달리 가능한 피해를 줄이고 살인을 피하는 듯했다.
"...."
좋은 일이었다.
리아나가 살인을 피한다는 건, 이전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도 리아나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 준비 다 했어?"
"네. 가죠."
그리고 마침내 오늘.
리아나 루멘하르크 토벌전이 시작되었다.
****
리아나를 쓰러트렸다.
"... 아하핫.... 강하네... 루시아..."
"... 리아나... 루멘하르크..."
죽일 각오였던 나와는 다르게 죽일 각오가 없던 리아나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
"... 뭐가 당신을 그렇게 바꾼 거지?"
"하아... 하아... 글쌔...?.. 아마... 사랑이 아닐까...?"
"웃기지마...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리 없어."
"... 아하하... 말이... 심한데... 하윽.. 하아.. 나도.. 여자라고?"
그러자 사랑하는 남자를 떠올린 듯 리아나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마침내... 만났어.... 나의... 이해자를... 모든 것을 버리고도 내 곁에 있어 주는 남자를..."
두근─
심장이 뛰었다.
리아나 말이 마치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그때, 리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아... 마지막으로.... 유진이... 보고... 싶네..."
"... 거짓말!!"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나는 현실을 부정하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유진이가 내가 아닌 리아나를 택할 리 없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말해! 리아나 루멘하르크!"
내가 리아나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 이미 리아나의 눈은 빛을 잃은 상태였다.
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가 내렸다.
저벅- 저벅-
그리고 빗속에서 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보고서에 적힌 인상착의와 똑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마치 1회차와 같이 검을 든 모습.
유진 칼리오페였다.
"... 내가 많이 늦었구나."
조심스럽게 리아나의 시체에 다가간 유진은 리아나에게 살며시 입을 맞추고는 눈을 감겨주었다.
이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
"..."
유진의 눈에 담긴 건 명백한 적의였다.
"투항하세요. 지금이라도 검을 버리면... 당신은 그저 리아나에게 속아 넘어간 걸로 해드릴게요."
"... 루시아 우르엘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
무너질 것 같은 마음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 다시 한번 말합니다. 투항... 하세요... 당신에게 승산은 없어요..."
명령처럼 말했지만 이건 애원이었다.
제발 내가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게 해달라는 애원.
스릉─
하지만 그 애원에도 유진은 검을 뽑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투항하지 않는 건가요! 당신도 알잖아요!! 잘못된 건 리아나야!!"
"... 그래."
나의 외침에 유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옳은 것은 너고 틀린 것은 리아나였겠지."
"... 그걸 알면서도...!!"
"... 하지만."
척─
유진의 검 끝이 내 심장을 겨눴다.
"그럼에도 나는 리아나의 편이다."
"... 왜...!! 도대체 왜...!!... 리아나가... 잘못된걸... 알면서도...!"
어디서 무엇을 실수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뭘 잘못한 것일까.
"간다, 루시아."
유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어째서 나와 유진이 적이 된 것인가.
콰앙-!
절망한 나를 향해 달려드는 유진을 막아선 것은 비앙카였다.
"뭐하고 있어 이 멍청아!!! 안 싸울 거면 도망쳐...!!"
"... 비앙카..."
"이익..!!.. 닥치고.... 도망치라고!! 그리고 너네는 보고만 있을 거야!! 다 같이 공격해!!"
비앙카의 말에 병사들이 화살을 겨누고 검과 창을 든 기사가 달려든다.
"아... 안돼...!!!... 그만둬...!!!... 죽이지마!!!"
비앙카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있는 힘껏 절규했다.
안된다.
절대로 내 손으로 유진을 죽일 수 없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전선에서 명령에 혼란을 줄 생각이야!!"
"아... 안돼요..!!.... 안돼요... 새... 생포해요... 비앙카."
내가 병사들을 막아서는 사이, 유진은 망설임 없이 아군의 사이를 파고들어 헤집었다.
"정신차려!! 지금 우리 병사들이 쓸리는 거 안 보여? 저건 그냥은 못 막아!!! 죽여야 한다고!!"
"... 제... 제발요...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제발... 유진이를... 살려주세요!.. 제... 제발..!"
나는 비앙카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지휘관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지만 상관없었다.
유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발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 이... 씨발... 진짜...!!"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은 비앙카가 소리쳤다.
"죽이지 말고!! 생포해!!!"
***
아군의 상당한 희생을 낸 끝에 유진을 제압했다.
"...."
유진의 몸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살아만 있다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구속당한 유진에게 다가가 말했다.
"... 왜... 왜... 그런건가요... 말했잖아요... 승산이 없다고..."
"...."
"... 지... 지금이라도 우리 쪽으로 전향한다고 말하세요... 제가 어떻게든 구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 한마디만... 해줘요..."
"...."
몇 번이고 애원해봐도 침묵하는 유진을 보며 내가 소리쳤다.
"왜..!! 왜..!! 왜...!! 나는... 안돼는건가요... 왜...!!!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었어..!!.. 근데 왜...!! 내가 아니라... 리아나를...!!"
"... 미안했다...."
갑작스럽게 들린 유진의 한 마디에 무너졌던 마음에 희망이 깃들었다.
"아... 네... 그... 그래요... 저도... 화내서 미안해요... 잘생각했어요... 제..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드릴..."
"... 곧... 따라가마. 리아나."
울컥─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아...?"
몇 번이고 지켜 본 광경이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유진이 죽었다.
내가...
죽게 만들었다.
깃들었던 희망은 절망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