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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301화 (301/354)

Chapter 301 - 루시아 우르엘라 (4)

계획과 달리 유진과 연인이 아닌 친구로 시작했다는 건 상당히 유감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리는 다가오는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중간고사에서 나타난 마물을 피해 없이 막아냈고, '기어오는 공포'와 침입자들의 협공도 견뎌냈으며, 칼리오페의 후계 문제마저 깔끔하게 정리했다.

... 물론 최선을 다해서 대비했음에도 중간중간 막지 못한 희생이 존재했다.

그때마다 몇 번이고 마음이 꺾일 뻔 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되살아난 타락'을 쓰러트린 다음 날.

나는... 유진에게 고백을 받았다.

".....!!!"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 흐... 흐음... 예전에 내가 고백했을 때는 몇 번이고 차 놓고... 그런데 이제와서 사귀어달라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네! 기꺼이!"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살짝 애태우는 편이 남자를 더 확 잡아끌 수 있다고 배웠다.

'... 진짜 확실해?'

'네! 이 책에서 그랬으니 확실해요! 남자는 본래 사냥하는 동물이라 여자가 도망쳐야지 더 다가온다고 했어요!'

'... 정말이지? 만약에 그랬다가 유진이가 포기하면...'

'루시아님!!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세요!'

정보의 출처는 비비안이었다.

브로치를 준 이후, 비비안은 수상 할 정도로 나를 잘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뭐, 나로서도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비비안 정도였고, 앞으로도 비비안이 유진이를 노리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친하게 지낼 수 있다.

어찌 됐든! 밀면 당연히 넘어올 줄 알았던 그때와는 달리, 나도 이제는 당기는 법을 배웠다는 뜻이다!

'... 자... 자... 유진아! 좀더.... 고백 해줘!'

힐끗-

유진의 적극적 반응을 기대한 채 슬쩍 눈길질을 했지만...

"... 그렇지...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네 마음은 무시해놓고서..."

"... 응?"

"미안해... 루시아... 잊어줄래?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 어?"

비비안의 말과는 달리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기는커녕 저 멀리 떨어지는 유진.

'비비아아아안...!!'

나는 속으로 비비안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비비안을 믿는 게 아니었다.

연애 경험도 없는 주제 맨날 야한 책만 읽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는 유진에게 달려가 등을 껴안았다.

"자... 잠깐..!.. 유진아.. 내가 미안해!... 그냥... 한 번 튕겨본 거였어!! 사실 너무 좋아!!! 응! 사귈래!!"

"... 루시아?"

한 번 튕겨서 그런지, 어딘가 확신이 없어 보이는 유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쪼옥

"이거면 대답이 됐지?"

"... 응."

조심스럽게 얼굴을 붉히는 유진에게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그럼 우리 이제 연인 사이니까 서로 애칭으로 부를까?"

"애칭...?"

"응,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연인끼리니까."

"... 원한다면... 루시아는 뭐라고 불리고 싶은데?"

"음... 불리고 싶은 건 잘 모르겠지만 부르고 싶은 건 있어."

"뭔데?"

나는 처음부터 정해놓았던 호칭을 유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 주인님♥"

***

유진과 연인이 된 이후, 하루하루 차근차근 행복을 쌓아갔다.

그러나...

행복을 쌓는 건 단계가 있었지만, 행복이 무너지는 건 어떠한 전조도 없이 닥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갑작스럽게 들린 엄청난 굉음과 충격.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흔들리는 시야와 귓가에 울리는 날카로운 이명.

이어서 코끝을 스치는 불꽃과 재의 냄새.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주위를 살펴보지만 검은 연기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누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침실에 걸려있던 수많은 보호 마법을 일시에 날려버릴 정도의 공격을 도대체 누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때,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가능성.

'되살아난... 타락!'

아직 쓰러트리지 못한 재앙 중에서 공격 한 번에 이 정도 위력을 뿜어낼 수 있는 재앙은 '되살아난 타락' 이 유일했다.

그러나 분명 '되살아난 타락'의 숙주가 될 시체는 뼈조차 남기지 않고 완전히 불태웠을 텐데 어떻게..?

'... 그런데 유진이는?'

반사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던 중 유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유... 유진아!... 유진..... 끄으으으윽!"

유진을 찾기 위해 바닥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몸 아래에서 엄청난 격통이 느껴졌다.

"... 아...?"

통증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양다리와 오른팔이 사라진 상태였다.

"... 끄으으으윽!"

한 번 상실을 인식하고 나자, 견디기 힘들 정도의 격통이 몰려온다.

하지만 지금 내게 사지를 잃은 고통보다 두려운 건 유진의 모습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야...!... 어디야 유진아!'

도대체 유진은 어디 있는 건가.

눈물을 흘리며 연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끝에.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유진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 유진.. 아!!"

당장이라도 달려가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사지 중 남은 건 왼팔 뿐이었다.

콱─! 즈으윽─!

나는 하나 남은 왼팔로 땅을 짚으며 유진을 향해 기어갔다.

"끄으으읏...!"

심각했던 상처가 움직이면서 더 깊어지고,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다 보니 안 그래도 부러져 있던 손톱이 박살났다.

자칫하면 기절해버릴 것 같은 격통 때문에 고작 열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진과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고작 팔다리가 몇 개 날아갔다고 유진이를 포기할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설령 왼팔이 없었더라도 이빨로 땅을 물어뜯어서라도 다가갔을 것이다.

즈윽─ 즈으윽─

한참을 노력한 끝에 나는 결국 유진에게 닿을 수 있었다.

"... 유... 유진.. 아... 유진아!"

나와 달리 큰 부상이 없어 보이는 유진의 모습을 보자 안도하는 마음이 솟아...

"... 아."

착각이었다.

유진이 무사하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비교적 온전해 보인 건 상체뿐.

하체를 가리고 있던 연기가 사라지자, 유진의 배꼽 아랫부분이 완전히 뜯겨 나간 것이 보였다.

'.....'

사지가 날아갔을 때조차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었지만, 유진의 죽음을 마주하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이것이 꿈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커흐..."

그때, 죽었다고 생각한 유진의 입이 열렸다.

"..... 루... 시아..."

"응...! 유진아...!... 나... 나.. 여기있어..."

유진의 생존은 내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 금방..... 거... 걱정.. 하지마... 그... 금방... 치... 치료해줄게... 내가... 꼭... 원래대로... 치료를..."

나는 횡설수설 하며 유진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유진은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 도... 망.... 쳐."

툭─

그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유진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유진아?"

"...."

"유... 유진아... 왜... 왜그래... 유진아... 대... 대답... 좀해줘... 제... 제발.. 유진아... 제발....."

"....."

".. 흐윽... 끄흐윽.... 유... 유진아.. 흐끄윽... 유진아!!... 유진아...!!"

아무리 유진의 이름을 부르고 흔들어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

그렇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명을 지른 끝에 나는 인정했다.

유진이가 죽었다.

내 눈앞에서, 내 품 안에서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었다.

하체가 통째로 날아가고, 시야가 없는 상태에서도 나를 걱정하며 죽었다.

어두워지는 시야 속.

나는 나의 실패를 자각했다.

**

4회차. 입학식 2년 전.

"...."

벌써 3번째 회귀라서일까.

어떠한 감흥도 없이 그저 유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괴로움만이 심장을 가득 채웠다.

"... 또... 지키지... 못했어."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차갑게 식은 머리로 판단해보니 내 실패의 원인은 간단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

마치 동화 속 주인공처럼 유진과 이어진다면 막연히 잘 될 거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설사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교만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었다.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멍청한 짓이었다.

이 세상은 동화가 아니다.

해피엔딩을 바란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곧바로 책상에 앉은 나는 종이를 한 장 꺼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무작정 적어가기 시작했다.

회귀, 비밀, 여자, 재앙, 변화...

무아지경으로 단어를 써 내려가던 중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

그 순간 나는 여자들을 배제했던 게 문제였다는 걸 직감했다.

물론, 배제라는 단어가 죽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비비안에 브러치를 준 것처럼 유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수를 사용했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 유진에게 여자를 유혹하게 시킨다.'

아니, 시킬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막지만 않는다면 양손을 가득 채우고 남을 여자가 유진에게 빠져들 테니까.

그렇게 유진에게 빠진 여자들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유진이를 우선시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이 방식을 사용한다면 유진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겠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에서 유진을 잃는 공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유진이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유진이 첫 번째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었다.

마음의 정리를 끝낸 나는 종이를 불태우고는 방을 나섰다.

***

2년 뒤, 카르네아의 입학식.

그 동안, 유진에 대해 두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

첫 번째는 유진에게는 여전히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2년 간 몇 번이고 유진과 대화를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그곳에 있는 유진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할 뿐이었다.

두 번째는 유진의 영혼이 깃드는 시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3회차의 세계에서는 내가 연설문을 읽던 도중에 유진의 영혼이 깃들었지만, 4회차의 세계에서는 입학식 사흘 전에 유진의 영혼이 깃들었다.

표본이 극도로 적었기에 이게 정확한 분석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 정도가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선언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한 번 카르네아의 강당 위에 오른 나는 유진의 눈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그를 잃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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