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8 - 루시아 우르엘라 (1)
"... 나는 네가 알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 비밀을 루시아에게 말할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숨길 것인지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 잔뜩 있다.
이 비밀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루시아가 내게 감추고자 했던 비밀을 억지로 들으면서도 나의 비밀만을 감추는 것은 기만이었다.
"처음부터... 속일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 역시 너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처음에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서히 깨닫고 말았다.
"허나, 너와 시간을 보내며 알았다.... 분명 너는 내가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존재를 보고 있었다는 걸.
"미안하다..."
몸이 떨린다.
루시아의 입에서 나를 비난하는 말이 나오는 게 두렵다.
아니, 두려운 건 비난이 아니다.
루시아에게 사랑하는 이가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게 두려울 뿐이다.
스윽─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뺨에 루시아의 손이 닿았다.
"고개를 드세요... 주인님."
"루시아... 다... 들었잖아... 나는... 너의..."
"저는 처음부터... 알고있어요."
"... 뭐?"
"처음부터 주인님이 저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지금 루시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렇다면... 왜... 나를..."
루시아가 나를 주인으로 모신 건 내가 1회차의 유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자 루시아가 아련하게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 저의 욕심이었어요. 주인님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의 주인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욕심."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죠? 제가 주인님 아닌 주인님을 보고있다고... 그건 틀렸어요. 저는 처음부터 주인님을 보고 있었어요."
"그걸...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전 알아요."
반론하는 나에게 루시아 단언했다.
"그야... 제가 사랑하는 사람인걸요."
두근-
루시아의 말에 얼어붙었던 심장이 뛴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주인님에게 기억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마음은 남아있으니까."
"틀렸어.. 루시아.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 이 세계의 환생했을 때, 나에게는 어떠한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부 너의 착각이라고!"
"아니요. 착각이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단순히... 너의 망상일 뿐일 수도 있다!"
소리치는 나를 향해 다가온 루시아가 입을 맞췄다.
"...."
우리가 하기에는 너무나 짧고도 가벼운 키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 루시아?"
"죄송해요. 주인님.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조금은 편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천히 눈을 감아 뜬 루시아가 푸른 눈동자에 나를 담았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동안 감춰왔던 저의... 아니..."
거기까지 말한 루시아는 고개를 젓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
2회차, 카르네아의 입학식.
"영광스러운 카르네아 아카데미의 일원.... 읏..!"
불현듯 찾아온 현기증.
그리고 몸을 가득 채우는 듯한 혐오감과 상실감 그러면서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또렷한 기억.
'여기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카르네아의 대강당이었다.
'... 어떻게 내가 여기에?'
이미 한참 전에 파괴됐을 아카데미에 내가 어떻게, 그리고 왜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부교장 싱글도어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루시아양? 괜찮으신가요?"
"죄송합니다. 잠깐 현기증이... 이제 괜찮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싱글도어의 도움에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나는 다시 연설문을 읽었다.
'... 어디야....'
입으로는 연설문을 읽으면서도 시선으로는 한 사람만을 찾고 있었다.
'... 어디있는거야... 유진... 칼리오페...!'
나를 속여 저열한 방식으로 조교를 한 남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육체는 그가 새겨 놓은 쾌락에 완벽히 길들여졌다는 걸.
하지만 어째서...
'미안하다...'
잠결에 때때로 들렸던 그의 목소리와 따듯한 손길.
내가 정말 그에게 한낱 장난감에 불과했다면 어째서 그는 그토록 가슴 아플 정도의 슬픈 목소리로 내게 사과를 한 것일까.
'... 죄책감은 있었다는 건가요? 아니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제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테니까.
처음 유진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은 이 입학식이 끝남과 동시니까.
"... 선언합니다."
짝─ 짝─ 짝─
연설을 끝냄과 동시에 박수 소리가 강당을 채운다.
이윽고 무리를 지어서 강당을 나가는 학생들.
나는 유진 칼리오페가 쉽게 말을 걸 수 있게 되도록 늦게 강당을 나섰다.
그러자 뒤따라 강당을 나서는 유진.
두근─ 두근─
저열한 남자가 내게로 다가온다는 생각에 그에게 조교 당한 몸과 마음이 멋대로 떨려온다.
'루시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이건 쾌락으로 새겨진 가짜 감정일 뿐이다.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알면서도 쉽게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는다.
저벅─!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내 앞에 도착했다.
'왔다..!'
이제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을 하겠지.
"...."
"...."
"...."
"...?"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를 부르기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지나가는 유진.
'뭐죠?... 왜 말을 안 거는 거죠?'
뒤로 돌아서 나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거기!"
"... 저... 말씀이신가요?"
"당신.. 왜....!"
일단 말을 뱉고 나니 머리가 냉정해졌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가.
갑자기 왜 말을 걸지 않냐는 멍청한 질문을 할 수도 없는 노릇.
"...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 네."
오히려 놀란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내가 입술을 꽉 씹었다.
"... 뭔가요... 도대체..."
**
기숙사 침대에 혼자 눕는 순간 몸이 뜨겁다는 걸 자각한다.
"... 하아... 하아..."
그와 몇 마디를 나눈 것만으로도 몸이 기쁨으로 채워져 버린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하복부로 향하려는 손을 억누르며 다시금 내가 떠올린 기억에 대해 되짚어 본다.
"... 전부 꿈이라고요?"
백일몽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나 또렷하고 생생한 기억들.
주인.. 아니, 유진 칼리오페는 분명 나를 잔인하게 조교 한 것이야 그렇다 쳐도...
세계를 구하고자 발버둥 쳤던 그 모든 시간이 전부 한낱 꿈이었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두고 보면 알겠죠."
***
입학식 이후 나는 유진의 뒤를 몰래 쫓았다.
1반과 5반이라는 물리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 어딘가 익숙한 여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 저건 분명.'
비비안 베아트리스.
1회차 때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훗날 마녀라 불리게 된 여자.
'... 그렇군요... 유진 칼리오페... 이번에는 제가 아닌 저 아이로 시작하려는 건가요?'
마녀의 힘을 손에 넣으면 분명 좀 더 쉽게 미래를 바꿔 나갈 수 있겠지.
'역시... 당신은 악당이었어... 하지만...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유진이 비비안에게 손을 대면 당장이라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 저게 조교라고요?'
아무리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봐도 유진이 하는 일은 조교가 아니었다.
"... 고... 고맙습... 니다..."
"괜찮아. 신경쓰지마."
"그... 그래도... 고... 고마워서..."
저건 그저 비비안에게 도움을 주며 지켜주고 있을 뿐이다.
욱씬─
'... 나... 나한테는...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으면서... 왜... 저 아이한테는...!!'
불현듯 심장을 죄여오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차린다.
'... 정신 차려요 루시아. 나랑은 하등 관계없는 남자예요!'
스스로 말하고도 모순적인 건 알고 있었다.
정말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나는 왜 이렇게 그의 뒤를 쫓고 있는 걸까?
***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야 나는 결국 인정했다.
그는 내가 알던 '유진 칼리오페'가 아니다.
유진의 행동으로 보아서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미래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1회차의 유진과 지금의 유진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잔인하고 사악했던 1회차의 그와는 달리 지금의 유진은 그저 성실하고 인망 있고 착해빠진 남자일 뿐이다.
자기 몸을 희생해서 남을 구할 수 있다면 자기 몸 따위는 얼마나 다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내던지는 그런 바보 같은 남자.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십 번은 죽을 뻔했고, 그중에서 열 번은 넘게 내가 구해냈으니까.
허나, 그의 인격과는 별개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칼리오페 가문의 가주가 독살... 첫째 아들인 에르덴이 유력 용의자...'
손에 들어온 전보를 본 내가 입술을 씹었다.
나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레이카와 가르시아 두 악녀가 꾸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회차 때는 에르덴마저 독살을 당했지만, 이번 회차에서는 유진 칼리오페가 노력한 듯 에르덴이 도주에 성공했다.
'... 하지만 이미 칼리오페 가문은 차남 케일 칼리오페가 잇게 되었어... 하아..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우르엘라의 후계자라로서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가 직접 칼리오페 가문으로 쳐들어가 행동했으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명의 여인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황녀....'
리아나 루멘하르크.
미래의 지식으로 미리 선수를 쳐서 꼬리를 잡으려고 하면 그녀는 사건과 연관되어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선을 떼면 1회차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나를 조여온다.
... 마치 나와 게임을 하듯 잡힐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비웃는 황녀.
만일 이번에 내가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비웠다면 분명 감당할 수 없던 사건이 터졌을 것이다.
'... 이제 반란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점점 다가오는 시간이 초조하게 느껴진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문득 창가를 보자 안뜰을 거니는 유진과 비비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처음 비비안을 봤을 때와는 같은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 비비안의 얼굴에서 그녀가 진심으로 유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안대를 한 채 목발을 짚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유진의 모습.
욱씬─
심장이 아프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1회차의 조교에서 벗어났다.
제법 후유증이 길게 남았었지만, 이제는 그 후유증마저 사라진 상태다.
욱씬─
...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어디서 온 걸까...
'... 만약에.'
만일 내게 1회차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처음부터 유진과 거리를 두지 않았더라면...
비비안이 아닌 내가 저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을까.
"....."
문뜩 치밀어오른 치졸한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 차려요. 루시아..."
설령 유진을 마음에 품었다 한들 이번 생에 내게 주어진 역할은 히로인이 아니다.
주인공으로서 이 세계의 배드엔딩을 막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이...
이 세계를 위해 누구보다 자신을 희생한 남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