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0 - 선택은 강자의 권리 (5)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일까?
갈색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매력적인 외모의 수녀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릴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 세... 세이라 언니."
긴 침묵 끝에 릴리스가 조심스럽게 수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라 수녀라고 부르십시오. 성녀님."
"... 네. 세이라 수녀님."
세이라의 차가운 반응에 릴리스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 넓은 수도에서 설마하니 세이라 언니를 딱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것 때문에 릴리스는 일행과 따로 떨어져 혼자 행동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세이라가 싫은 건 절대로 아니다.
릴리스에게 클라리스와 엘라리스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면, 세이라는 언니 같은 존재이니까.
조금 엄격하기는 해도 어딘가 어설픈 릴리스를 챙겨주고 보살펴 준건 언제나 세이라였다.
"하아... 정말..."
화를 참으려는 듯 콧등을 꾹꾹 누르며 세이라가 입을 열었다.
"왜 성녀님께서 이곳에 계신 겁니까?"
"... 그... 그러니까... 즉위식에 참가하려고..."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성녀님께서 참가하시는 거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여신교는 기본적으로 귀족들의 경조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설령 황제의 즉위식이라도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국에서 살아가는 이상 완전히 정치에서 손을 뗄 수는 없다.
그렇게 보통 황제의 즉위식에는 최고위 간부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사람을 보내 성의를 표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대상으로 최연소 수녀장 후보인 세이라가 뽑힌 것이다.
"성녀님은 자신이 여신교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교황이 여신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자라면, 성녀는 여신에게 가장 이쁨받는 자이다.
그런 성녀가 직접 황제의 즉위식에 참여하다니!
보통 황제가 즉위하고 가장 먼저 하는 공식행사가 교회에 방문해 교황이나 성녀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성녀가 직접 즉위식에 참석하는 건 여신교에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제 귀에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카르네아에서 정체를 들키셨다고요?"
"그, 그게 다친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어어요... 저 릴리스가 힘을 써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니까..."
릴리스의 대답에 세이라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저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합니다. 여신님께서도 사람의 생명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셨으니까요."
"그렇죠! 역시 어쩔 수 없던 일...!"
"하지만!!"
세이라가 릴리스의 말을 끊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체를 들킨 것은 들킨 것입니다! 거기에 이번 즉위식에 몰래 참가하려던 것까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일단 즉위식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얌전히 계시다가 끝나면 저와 같이 파르테논으로 돌아갑니다!"
"... 파르테논이요?"
"예,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곧 카르네아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파르테논에 들렀다가 가면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거 같아서..."
그러자 세이라가 안경을 올려 쓰며 되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카르네아에서의 생활은 끝입니다."
"... 네?"
"애초부터 성녀님이 파르테논이 아닌 다른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부터가 이상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수녀장이 되기 전에 잘못된 걸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겠네요. 성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
"대답하셔야죠?"
세이라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릴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해서 대들기 무섭다.
어릴 때부터 세이라에게 혼나던 기억은 릴리스의 머릿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착하지만 세이라는 엄격한 언니였으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잘못했다고 말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릴리스에게는 물러설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이 선택이 잘못되었... 아니, 잘못되지 않았다.
선생님을 돕기 위해서 하는 일이 잘못됐을 리 없지 않은가!
주먹을 꽉 움켜쥔 릴리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 싫어요!"
"그래요. 성녀님은 당연히 파르테논에... 응...? 지금 싫다고 하셨습니까?"
릴리스의 대답에 세이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저 릴리스는 파르테논에 돌아가기 싫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탓일까.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릴리스를 바라보던 세이라가 소리쳤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파르테논은 성녀님의 집입니다!! 지금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소리입니까!"
"그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세이라 수녀님의 말대로 파르테논은 언제까지나 저 릴리스의 집일 거예요! 하지만...!"
릴리스는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하지만 저 릴리스에겐 지금의 생활이 중요해요! 카르네아에서 친구와 떠드는 게 좋고 놀러 다니는 게 좋아요!"
"그런 것이라면 제가 파르테논에서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까지 말한 릴리스가 숨을 들이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저 릴리스! 사모하는 남성이 있어요!"
"....."
릴리스의 선언과 함께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 사... 사..."
멈춘 시간 속에서 점차 세이라의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이윽고 완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사, 사, 사모 하는?! 지, 지금 성녀님! 사모한다고 하셨습니깟!"
얼마나 당황했는지 삑소리까지 튀어나오는 세이라.
"네, 사모해요!! 그게 어때서요! 여신교에서는 딱히 연애를 금지하지 않잖아요!"
"그...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성녀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저 릴리스는 이미지 같은 건 몰라요! 그냥 선생님과 함께가 아니면 싫어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세이라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 서... 성녀님이 사모하는 남자는 교인입니까?"
"음... 아마도 아닐거에요."
"그, .. 그럼 지금 성녀님께서는 교인도 아닌 사람을 성녀님의 반려로 삼겠다고 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녀님!!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자각하시지요! 당신은 성녀입니다!!"
세이라가 책상을 내리치자 말하자 릴리스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신께서 세 명의 제자와 함께 길을 거니니 그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더라."
"그... 그건 경전의..."
"네, 맞아요. 경전에서도 적혀있다시피 만물의 창조주이신 여신께서도 그 피조물과 함께 있는 것에 즐거워하셨어요! 한데 한낱 성녀에 불과한 제가 지위로서 사람을 차별할 수 있겠나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여신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에요!"
릴리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당당히 선언했다.
"성녀님..."
"... 세이라 수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릴리스도 이제 다 컸다고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릴리스는 세이라의 손을 감쌌다.
"이 길이 쉽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저 릴리스는 그분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리고 세이라 수녀님도 그걸 축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주실 수 있나요?"
무언가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잘근 씹던 세이라는 이내 포기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성녀님의 의지가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세이라 수녀님."
"... 됐어요. ... 그리고 세이라 언니라고 부르세요... 릴리스."
세이라의 말에 릴리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품에 안겼다.
"응! 세이라 언니!"
"정말... 언제까지나 애일 줄 알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 가지고... 그런데 어른이 돼서도 안기는 걸 좋아하면 어떻게 하니?"
"그치만 오랜만에 언니랑 만났는걸..."
"정말 보고 싶었으면 한 번 찾아오지 그랬어."
"그러고 싶었는데 이번 방학 때는 시간이 없었고, 지난번 방학 때는 고아원을 가서 아 고아원에서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는..."
그렇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릴리스가 문뜩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아! 세이라 언니, 릴리스는 이제 선생님에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그럼, 다음에 파르테논에서 봐요!"
그 순간, 세이라가 황급히 자리를 뜨려던 릴리스를 불렀다.
"리... 릴리스.... 잠시만...."
그리고는 관심 없다는 듯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서..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어... 어떤 사람이니?"
"후후후. 세이라 언니. 궁금해요?"
"아... 아니..! 꼭 궁금하다기 보다는 그냥 릴리스를 제대로 사... 사..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몰라서..."
"선생님은..."
유진을 떠올린 릴리스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린다.
카르네아의 지하수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사람.
폭동에서 누구 하나 죽지 나오지 않도록 제 몸을 희생하던 사람.
그리고...
언제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대단하신 분이니까! 언니가 오더라도 저와 다른 분들처럼 평등하게 사랑해주실 거에요!!"
"뭐...? 다른 분.? 평등? 설마 릴리스 그 남자는 릴리스만 사랑하는 게 아니니?"
"... 아."
그 순간 말실수를 깨달은 릴리스가 서서히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릴리스 제대로 설명하세요!!"
세이라가 달려드는 순간.
릴리스가 방 밖으로 튀어나감과 동시에 능력을 사용해 그녀를 방안에 가뒀다.
"그... 그럼... 세이라 언니! 다음에 봐!"
"릴리스!! 이거 당장 안 풀어!!! 릴리스!!!"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세이라의 외침을 들으며 릴리스는 유진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