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4 - 더는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1)
늦은 밤, 칼리오페 가문의 응접실.
그곳에서 칼리오페의 친족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현재 가문에 없는 유진과 에다드 칼리오페를 제외하고 에르덴의 소집에 응한 건 세 명.
레이카 칼리오페, 케일 칼리오페, 그리고 가르시아 마이샤였다.
"...."
가주의 요청이니 회의에 참석하긴 했어도 갑작스러운 소집에 가르시아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늦은 시간에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걸 아는 에르덴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감사 인사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흥."
형식적으로나마 가주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사실에 만족했는지 가르시아도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입을 열었다.
"... 도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말씀대로 이 늦은 시간에 모이시자고 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황실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황실이라는 말에 에르덴이 들고 있는 편지에 시선이 모였지만 아직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다.
칼리오페 쯤 되는 대가문이라면 황실의 서신을 받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에르덴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 황제께서 서거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요?"
에르덴의 말에 가르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현 황제께서 병상에 누운 지가 벌써 몇 년째라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의 서거가 충격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렇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사실은 제국에 공표되고 황좌는 황태자 라인그람 루멘하르크가 이을 것입니다."
황제가 돌아갔다는 충격적인 말과는 달리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반응도 그리 뜨겁지 않다.
사실상 황태자가 제국을 대리통치를 한 지 한참 되었고, 황좌의 유일한 경쟁 상대인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황좌에 욕심이 없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 거기에 최근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황녀가 반란군과도 관련 있다는...'
가르시아가 머리카락을 빙글 꼬며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에르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와 별개로 황태자로부터 제게 한 가지 부탁이 있었습니다. 친족 회의를 연 것도 이 이유 때문입니다."
"... 그게 무엇인지요?"
가르시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칼리오페 가문의 가주는 에르덴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가르시아가 칼리오페 가문에 심어두었던 세력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아직 힘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웬만한 일이라면 에르덴 혼자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이런 늦은 시간에 친족 회의로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건...
저 부탁이 칼리오페의 가주조차 함부로 결정할 수 없을 만큼 가문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 징집을 통해 칼리오페의 군사 규모를 키워달라는 것입니다."
"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에르덴의 말을 듣는 순간 가르시아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칼리오페 가문은 황가를 모실지언정 지배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폐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들 아직 즉위하기도 전인 황태자의 명령을 따라 군대를 늘린다고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입니다."
"... 그렇기에 명령이 아닌 부탁입니다."
"부탁이라 하면 더욱 웃긴 일이지요. 이미 칼리오페 가문은 대가문들 사이에서도 최대급 군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데 여기서 군대를 더 키우라니요? 황태자께서는 병사 한 명에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지요? 아님, 칼리오페 가문을 파산시킬 생각입니까?"
"...."
"가주님. 곧 겨울이 다가옵니다. 한시라도 빨리 곡식을 추수해 곳간을 채워야 한단 말입니다. 근데 이런 시기에 징집을 한다니요!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이어서 레이카가 말을 이었다.
"저도 어머니 생각에 동의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고 언제나 땔감이 부족합니다. 그런 와중에 새롭게 병사들을 징집하려면 새로운 무기와 방어구가 필요할 텐데, 그러한 방어구를 만들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철과 땔감이 사용될까요?"
"맞습니다. 그리고 시기 또한 참으로 묘하군요!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제국 중앙에 반란세력이 나타난 이 시점에 황태자님과 친분이 깊은 가주님에게 군사를 늘리라고 하다니요? 설마 황태자님께서는 북부의 군대를 황태자의 사조직으로 이용하시려는 생각이 아닙니까?
가르시아와 레이카의 반박은 하나하나가 옳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박이기도 했다.
짧게 한숨을 쉰 에르덴이 말을 이었다.
"서신에서는 징집으로 인한 북부의 피해를 보상할 만큼의 충분한 금화와 식량, 그리고 땔감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번에 징집한 병사들은 어디까지나 북부의 방어선을 보충하는 것이지 황실의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황가가 언제부터 방어선을 신경 썼다고 하십니까? 그리고 북부의 방어선은 이미 견고합니다. 여기서 방어선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싶다면 황가에서 지원을 와야 하지 북부인의 피가 더 흐를 필요는 없습니다."
가르시아의 말에 에르덴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단순히 자신에 대한 반발심으로 저런 말을 내뱉는 거라면 가주의 권위로 찍어누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순수하게 칼리오페의 가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저런 말을 했다면...
그 말이 듣기 싫다고 입을 다물게 하면 그건 에르덴이 결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 폭군과 다름없어진다.
"... 너무 우리끼리만 이야기 한 것 같군요. 케일, 말해보거라 네 생각은 어떠하지?"
잠시 생각을 정리할 겸 에르덴이 케일을 바라보며 말하자 눈을 감고 있던 케일이 대답했다.
"... 황태자가 약속한 지원의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주님의 생각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라버니!"
"케일!"
예상치 못한 케일의 배신에 가르시아와 마이샤가 소리쳤고, 에르덴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케일을 상대하는 것이 가르시아나 마이샤를 상대하는 것보다 편할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인데 설마 이쪽 편을 들다니.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최근 잠시나마 장벽이 뚫렸을 정도로 마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직 초가을인 지금도 이런데 겨울에는 굶주린 마물의 침공이 더욱 활발해지면 어떻겠습니까?"
"... 그래서 황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그렇습니다. 장벽수비대 측에서도 계속해서 증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보낼 병사가 부족합니다. 결국, 징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자 측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조한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어머니, 이건 황실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황실을 이용할 기회입니다."
케일의 말에 에르덴이 속으로 반성했다.
'...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유진이 달라진 것처럼 케일 또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최근 케일과 닮은 누군가가 알몸으로 눈가리개와 정조대를 찬 채 귀족 영애를 태우고 밤 산책을 한다는 보고가 들어와 약간 의심의 눈초리가 향했는데...
'케일이 그럴 리가 없지.'
지금 케일의 모습을 보니 단순한 헛소문일 것 같았다.
"... 어머니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케일이 너무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아니고?"
"말씀드렸다시피 황태자의 서신과는 상관없이 징집은 필요한..."
"그러니까 그 병사들은 북부가 아닌 중앙에서..."
"그렇게 되면 군대의 통솔권이 흐트러집니다. 만에 하나 그 틈으로..."
"통솔권은 당연히 칼리오페에서 가져야...!!"
"어디까지나 이상일 뿐 현실은....!!!"
"그렇다고 해서 북부인이 피를 흘려야 하는....!!!"
에르덴이 잠시 케일에 대해 감동하던 사이 회의가 점차 거칠어 지고 있었다.
끼어들 틈도 없이 열심히 싸우는 셋의 모습을 보며 에르덴은 품 안에 넣어둔 다른 한 장의 편지를 떠올렸다.
'정말로 말해도 되는가...'
[언젠가 황태자님께 서신이 올 겁니다. 그때 만일 상황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제 이름을 사용하십시오.]
에르덴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의 혈통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가르시아는 자신을 증오하는 것 이상으로 유진이를 증오한다.
그래도 에르덴은 가주라는 지위가 있기에 가르시아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지만...
만일 이 제안에 유진이 찬동한다는 걸 안다면 지금 편을 들어주고 있는 케일마저 돌아설지 모른다.
'.... 그래도 유진이니까.'
지금까지 유진의 말을 들어서 나쁜 적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유진이 덕에 가주 자리에 올랐고, 지지부진했던 로즈 아멜리아와의 관계도 단숨에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고작 꽃 한 송이와 편지 한 통이 그녀를 바꿀 줄이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은 에르덴이 책상을 내리쳤다.
쿵─!
"..."
"..."
"..."
순간적으로 침묵이 흐르고 시선이 모이자 에르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말씀드리는 게 늦었지만, 이 제안은 유진이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유진을 신뢰했기에 말은 했지만 통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이것 때문에 반발이 심해지고 케일이 돌아선다고 해도 에르덴은 유진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스스로 한 것이고, 에르덴에게 있어 유진은 도움이 되고 말고를 떠나 어디까지나 귀엽고 착한 막내이니까.
"... 생각해보니 가주님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황실의 지원을 받아서 칼리오페의 힘을 키울 기회인데 이러한 조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장 징집하죠."
"맞아요.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한들 칼리오페 가문도 제국의 일원인 건 사실이니까요. 새로운 황제 폐하께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죠. 징집하죠."
"...."
유진의 이름을 꺼낸 지 1초.
칼리오페의 친족 회의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