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5 - 더는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2)
"... 유... 유진님을... 빼앗겼습니다."
그 순간 마르잔은 루시아의 몸에서 냉기가 실체화되어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 그 미친 암코양이가."
까드득-
루시아의 이빨이 거칠게 갈렸다.
누가 유진을 빼앗았는지는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루시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 이번에도 저에게서 주인님을 뺏어가려고요? 절대 그럴 순 없어요. 네... 그렇고 말고요... 차라리 그 암코양이를..."
귀신에 씐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리는 루시아의 모습.
그 분위기에 압도된 마르잔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 당장 주인님을 되찾아 와야겠어요. 마르잔, 그 암코양이가 주인님을 데리고 어디로 갔죠?"
대충 옷을 걸친 루시아가 마르잔을 째려보며 묻자.
"으...."
"마르잔....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마르잔은 대답하는 대신 입구를 양팔로 막으며 대답했다.
"아... 안됩니다. 루시아님 지금 가시면 안 돼요..."
"...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묻잖아요?"
당장이라도 심장을 꿰뚫을 것 같은 루시아의 싸늘한 시선에 마르잔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납득 할 만한 이유를 말하던가... 아니면 당장 비켜요."
"...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릴 수도 비킬 수도 없습니다."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질끈 감은 마르잔이 소리쳤다.
"그래요...?"
흠칫─!
그 순간, 유진과 관계 맺을 걸 들켰을 때 이상의 살기가 마르잔에게 쏟아졌다.
"마르잔. 저는 마르잔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요. .... 하지만 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주인님이에요. 설령 마르잔이라고 해도... 아니, 이 세상 그 누구라고 해도 저와 주인님을 갈라놓는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요."
마르잔의 이빨이 제멋대로 부딪치고,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다
"... 흐윽... 죄... 죄송... 합니다... 루시아.. 님..."
그러나 마르잔은 사죄할망정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루시아 주먹 쥔 손 아래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는 사이 그 암코양이는 주인님을 덮치고 있을지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머리의 혈관이 끊어지는 기분에 루시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다.
"... 비켜!!!"
손짓과 함께 공기가 터져나가며 마르잔의 몸이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포옹
마르잔이 벽에 직접 부딪히지 않도록 마력으로 감싸준 것은 이성을 반쯤 잃은 루시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그러니까 왜...."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쁘게 힘을 내쉬는 마르잔을 보자 루시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번 일은... 추후에 추궁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부를 때까지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시선을 돌렸다.
힘 조절은 했다지만, 맨몸으로 폭발을 받아냈다.
만에 하나 있을 부상을 대비해, 추궁 때까지 몸을 추스르라는 루시아의 작은 배려였다.
".... 안... 안... 됩니다... 루시아님.... 가시면..."
그러나 마르잔은 충격에 괴로워하며도 끝까지 루시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 왜! 마르잔! 왜 마르잔마저 저를 방해하는 건가요! 도대체 왜!! 왜.... 언제나... 저는 주인님과 이어지지 못하는 건가요..!!"
신뢰하던 친구가 자신을 가로막고 리아나를 돕는 상황에 루시아는 울부짖었다.
"... 유진님께서!!"
그리고 마르잔이 소리쳤다.
루시아님이 유진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말을 전하는 마르잔으로서도 죽을 만큼 괴로웠다.
"... 지금 찾아오시면... 두 번 다시는 루시아님을 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풀썩─
마르잔의 말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제자리에 주저앉은 루시아.
"... 왜... 왜... 주인님이..."
루시아는 완전히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멍하니 하늘이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 주인님은.. 이번에도... 제가... 아니라... 그.. 암코양이를... 선택하시는... 건가요...?"
그런 루시아의 모습에 마르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을 전하면 루시아님의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마르잔은 최선을 다해 숨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아님을 그냥 보낼 순 없었다.
만일 유진님의 입에서 루시아님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때는 정말 어찌할 도리도 없이 루시아님은 망가질 테니까.
"... 죄송합니다. 루시아님. 유진님도 진심은 아니었을 겁니다. 단지... 상대가 황녀인 만큼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한쪽 무릎을 굽힌 마르잔이 루시아를 위로하려던 그 순간.
퍼억─
갑작스럽게 일어난 루시아에게 밀려난 마르잔이 뒤로 자빠졌다.
"... 루... 시아님?"
"포기 안 해요..."
과거의 루시아였다면 마르잔의 예상대로 마음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유진이 자신이 아닌 리아나를 골랐다는 건.
루시아에게 있어 그 정도의 절망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포기 못 해요!"
현재의 루시아는 다르다.
지금의 루시아는 포기하지 않는다.
승자와 패자가 확정되었을지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서라도 반드시 유진을 다시 손에 넣을 것이다.
스으윽─
조금 전, 절망하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마르잔... 뭘 그렇게 느긋하게 앉아있는 건가요? 당장 출발할 준비를 하세요!"
"... 네?.. 루... 루시아님?... 어디를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달라진 루시아의 태도에 마르잔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어디긴요. 당연히 우르엘라의 본가입니다."
"거... 거기는 갑자기 왜... 서... 설마 전쟁이라도 치루 실 셈이십니까!"
"전쟁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 암코양이가 약해진 지금이라면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안됩니다! 루시아님!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시기에 군대를 일으키면..."
당황하며 떠들어대는 마르잔의 입술에 루시아의 손가락이 닿았다.
"진정해요. 농담이니까. 뭐, 암코양이를 처리하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짓을 저지르면 주인님은 분명 제게 실망하실걸요."
"그럼 우르엘라가에는 왜 돌아가시는 겁니까?"
"... 질문이 많네요. 마르잔. 늦게 오면 혼자서 돌아갈 거니까 빨리 준비해서 오세요."
"아.. 네.. 넵!"
뛰어가는 마르잔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아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좋아요. 리아나 루멘하르크.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우르엘라에게는 우르엘라의 방식이 있다는 걸 보여주죠."
또각─!
루시아의 구둣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멜피사가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아, 그녀에게 보고를 듣기 위해서 찾아가고 있었다.
'... 하아... 내가... 루시아한테는 너무하기는 했지...'
길을 걸으며 나는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했다.
루시아도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는 법.
내가 했던 말 때문에 실망했는지 루시아가 마르잔과 함께 우르엘라 가문으로 돌아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고 싶었지만 멜피사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럴 순 없었다.
'일단 멜피사에게 보고를 듣고 나서 마차를 예약...'
한숨을 내쉬며 걷다 보니 멀리서 머리통만 한 수박 두 개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 언니..."
자세히 보니 수박이 아니라 비비안의 가슴이었다.
비비안이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며 흔들거리는 가슴.
'... 착각인가?'
눈의 착각인지 아니면 아직도 성장기인지 비비안의 가슴은 볼 때마다 커지는 느낌이었다.
"비비안."
"흐엣! 헷! 흑! 아!"
조금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부르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놀라는 비비안.
"왜 그렇게 놀라 뭐 잘못했어?"
"아... 아니요.... 자... 잘못한 건 아닌데... 흐엑...!... 유... 유진님..!.. 가... 갑자기... 소... 손을... 잡으면...!!"
손을 잡자 비비안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이제는 누구와 스캔들이 난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다.
내가 지금까지 행실을 조심했던 건 리아나를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리아나 루멘하르크 : 조교도 95%]
그러니 리아나를 굴복시킨 지금은 어떤 추문이 돌아도 상관없다.
'... 설마 리아나가 하룻밤 만에 조교 될 줄은 몰랐지.'
리아나의 뒷구멍을 공략한 날을 떠올리자 나도 헛웃음이 흘렀다.
'끄으읏...!! ♥.. 하.. 햐께여..!! ♥♥... 할테니까아아!!... ♥.... 히끄그...!! ♥... 흐에.. ♥. 헥.. 그러니까... 제바아알...!!. ♥♥'
설마하니 그 자존심 높던 리아나가 그런 짓까지 할 줄이야.
조교도를 100% 달성하지 못한 건 아까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 그래도... 다... 다른 사람한테... 드... 들키면..."
"괜찮다니까. 아니면 비비안은 나랑 손잡기 싫은 거야?"
"아... 아니에요!!... 소... 손 잡고... 싶어요!"
깍지낀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쥐는 비비안.
그러더니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아... 아프셨죠."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이 시간에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아... 요... 요즘... 언니가 아직도 안돌오는게... 걱정이 돼서..."
"... 뭐? 아직도 비앙카가 아직도 안 돌아왔어?"
비비안의 말에 내가 눈을 크게 떴다.
비앙카가 베를리오즈와 함께 훈련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미 일주일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니.
'로레오스의 소개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로레오스에 대해 잘 모르는 비비안으로서는 당연히 걱정할 만도 하다.
"... 비앙카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로레오스 교수님께 여쭤볼게."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비비안이 눈을 조심스럽게 올려 뜨며 물었다.
"... 그... 그런데 유진님은 어디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