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이제 제 차례 맞죠? (4)
* * *
“어라~?♬”
싸늘하다.
분명 봄날의 햇살 같은 따듯한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내 체감온도는 한겨울의 눈보라라도 맞은 듯 급격하게 떨어졌다.
“여기서 유진이를 만나다니 우연이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리아나가 보였다.
‘...리아나가 어떻게 여기에?’
멀리서 손을 마구 흔들던 리아나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달콤한 살내음.
부드러움과 탄력이 공존하는 대용량 모유 디스펜서의 감촉.
후각과 촉각의 환상의 콜라보가 내 이성을 앗아간다.
“음~! 진짜 유진이 맞네! 이것도 꿈이면 어쩌나 했나!”
방긋 미소짓는 리아나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꽉 껴안을 뻔했지만, 입술을 강하게 깨무는 것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다.
“...리아나...루멘하르크.”
그리고 당황한 걸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무감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흐음~”
리아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80점 정도일까나~ 황녀 전하라고 부르지 않은 건 칭찬하지만 그래도 풀네임보다는 애정을 담아서 리아나라고 불러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 어려운 요청도 아니기에 나는 숨을 짧게 내쉬며 다시 말했다.
“리아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리아나의 움직임이 멈춘다.
“....어?”
그리고 조금 늦게 달아오르는 리아나의 얼굴.
그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곧바로 털어낸다.
‘착각하지 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고작 이름 한 번 불렀다고 리아나가 부끄러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건 연기다.
어디까지나 나를 홀리기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
그렇게 스스로 되새기며 제멋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에헤헤. 이상하네~. 이젠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름으로만 불리니까 조금 창피하네...♪”
리아나의 기습 발언에 숨 쉬는 법을 까먹을 뻔했다.
‘...부끄러워하는 리아나라니.’
더 보고 있다가는 설사 연기라 해도 속아 넘어갈 것 같았기에 나는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리아나. 어떻게 여기에?”
“으음? ....어떻게라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 카르네아의 학생이 카르네아의 부지를 걷는 게 이상한가?”
진심으로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아나.
하지만 나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상대는 리아나 루멘하르크다.’
외모에 홀려있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다시 한번 리아나에게 물었다.
“...구 교사에서 어떻게 나온 건가요?”
“으음..? 그건 더 이상한 질문이네. 그냥 걸어 나왔는데?”
리아나의 대답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그냥 걸어 나왔다고?’
의식을 잃은 리아나를 구 교사에서 치료하는 동안, 나는 루시아와 비비안의 힘을 빌려 구 교사 전체에 결계를 쳐놓았다.
별로 마음이 끌리는 일은 아니었지만, 리아나는 아직 손을 잡았을 뿐, 내게 조교 된 건 아니다.
그렇기에 리아나가 완벽하게 조교 될 때까지는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내가 설치해놓은 결계는 두 종류.’
하나는 리아나를 구 교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결계.
다른 하나는 리아나가 구 교사 밖으로 나가면 내게 알려주는 결계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밖으로 나가야지만 작동되는 결계라니...
작동조건이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첫 번째 결계는 파괴될 걸 예상하고 설치한 녀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수도 없이 내게 데드엔딩을 보여주었던 리아나 루멘하르크다.
설령 맹약을 어겨 힘을 잃었더라도 결계 정도는 파괴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으니까.
‘...문제는 리아나가 두 번째 결계조차 간단히 빠져나왔다는 거지.’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단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힘이 너무 강대하기에 섬세한 조절이 힘들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힘을 잃은 지금의 리아나는 결계를 부수는 대신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의 정교함을 되찾은 모양이다.
내 굳은 표정을 본 리아나는 한쪽 팔로 가슴을 받히며 말했다.
“아~, 혹시 결계 때문에 그래? 걱정하지 마! 안 부셨으니까. 유진이가 열심히 설치해놓은 걸 부수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빠져나왔지.”
“....원래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습니까?”
“아니! 근데 갑자기 될 것 같아서 해보니까 되더라고.”
리아나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다.
‘...뭐 이런 사기캐가 다 있냐.’
EX급 캐릭터는 너프 당해도 SSS급이라는 건가.
B급 캐릭터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게 왜? 아! 혹시... 내가 나오면 안 되는 거였나?”
“아닙니다. 별로 상관없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결계는 리아나가 몰래 빠져나와서 사고를 칠까 봐 만들어놓은 안전장치에 불과하다.
물론 효과는 없었지만...
이렇게 만났다면 별 상관없을 것이다.
“후후훗, 그럼 다행이네. 그보다 유진... 아니, 주인님...”
갑작스럽게 호칭을 바꿈과 동시에 말꼬리를 살짝 늘리는 리아나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주인님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한데? 그것도 여자를 끼고서?”
리아나의 시선을 받은 마르잔이 다리를 벌벌 떨었다.
“....”
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마르잔에겐 리아나를 마주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교육해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데이트? ...나한테 그렇게 열정적으로 구애해놓고 다른 여자랑 데이트라니 이건 좋은 점수를 못 주겠는데?”
“데이트가 아니다.”
리아나가 먼저 호칭을 바꾼 이상 나도 말투를 바꿨다.
“...흐음...데이트가 아니라면...”
리아나의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비췄다.
“혹시 저를 데리러 온 건가요?”
갑작스러운 존댓말과 함께 팔짱을 끼며 악마처럼 속삭이는 리아나.
“...저를 길들여주시려고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유...유진님...!”
설마 리아나 편을 들 줄 몰랐는지 마르잔은 꿀꿀 꺼리는 것도 잊은 채 나를 부른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리아나가 내 손을 잡은 것도 내가 리아나를 길들여주겠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정확히 언제 길들여준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했다가는 리아나가 어떤 반응을 보이질 모른다.
“그렇게 됐으니 돌아가라 마르잔.”
“...하지만...”
루시아의 명령을 떠올리는 듯 마르잔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됐으니까 돌아가라! 그리고 루시아에게는 내가 찾아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전해라. 만일 찾아오면 두 번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혹시나 루시아가 참지 못하고 루시아가 찾아와 리아나와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럴 바에는 마음이 아프더라도 지금 강하게 내치는 게 맞다.
“...알겠습니다. 전하겠습니다.”
입술을 꽉 깨문 마르잔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루시아의 기숙사를 향해 달려간다.
‘...하아.’
튀어나오는 한숨을 가까스로 집어삼킨다.
벌써 뒤처리할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다.
‘...그래도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두통 때문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고 있자,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리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갈까요.”
나를 올려다보는 리아나의 얼굴에서는....
“...저의 주인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미소가 비집고 나왔다.
***
스륵─ 스르륵─
홀로 남은 방안에서 루시아의 옷이 하나씩 흘러내린다.
이윽고 나신이 된 루시아가 전신거울 앞에 서서 몸을 확인했다.
“...”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과 아무리 찾아봐도 흠을 찾을 수 없는 몸매.
태어날 때부터 아름답게 태어났지만, 루시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10년 전 그날부터 철저하게 관리해 온 것이다.
“...나쁘지 않네요.”
살짝 입꼬리를 올린 루시아는 서랍 안에서 은색 병을 꺼냈다.
은색 병 안에 담긴 건, 세계수 근처에서 자란 달맞이꽃을 농축시켜 만든 향유다.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몇십 배는 비싼 가격 때문에 고위 귀족들도 쉽사리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루시아는 주저 없이 향유를 몸에 발랐다.
스윽─ 스윽─
잠시 후, 수도 한복판에서 있는 저택 한 채가 몸에 발려 사라졌지만, 루시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군요.”
거울 앞에 앉은 루시아는 입술에 연지를 바르는 것을 시작으로 화장을 시작했다.
원래도 완벽한 외모라 화장을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상관없다.
....정말 오랜만에 가지는 유진과의 관계.
이 정도면 됐겠지 따위는 루시아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
오로지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잠시 후, 화장을 마친 루시아가 다시 한번 외모를 점검하고 있을 때.
똑─ 똑─
기다리고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루시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문 앞에 선다.
그리고...
처음 유진의 방에 들어갔을 때처럼 알몸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루시아.
철컥─
그리고 문이 열리자 루시아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상태로 말했다.
“....어서오세요. 주인님....”
“...루...루시아님.”
“....?”
하지만 귓가에 들린 목소리는 기다리던 주인님의 것이 아닌 마르잔의 것이었다.
“...마르잔?”
고개를 든 루시아가 눈을 깜빡거린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 주인님을 모시고 오지만 절대 방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마르잔이 여기에서 나타나는가?
아니, 그보다 주인님은 어디 계신 거지?
아직 분노보다는 의문이 가득한 루시아에게 마르잔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유...유진님을...빼앗겼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