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이제 제 차례 맞죠? (5)
* * *
“그래서 주인님! 저는 어디서 조교 당하는 걸까요? 제 방안? 구 교사? 그것도 아니면.... 지금 여기서?”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리아나의 말에 나는 오랜만에 ‘침대 위의 황제’를 사용해 연기했다.
“재촉하지 마라. 준비가 필요하니까.”
“흐음... 주인님께서는 준비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 같은데 저는 지금 이대로라도 충분히 멋있다고 생각하는...”
“쯧, 내 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네 준비를 말하는 거지.”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아나의 몸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훑었다.
“설마... 그 꼴로 나를 맞이할 셈이냐?”
솔직히 내가 한 말이지만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침대 위의 왕자가 시키는 대로 말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리아나는 도대체 어디를 흠을 잡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
그건 리아나도 마찬가지였는지 말을 들은 순간부터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발에 핏기가 사라진다.
‘이거 아무래도 좆된거 같다...’
제국의 태양이자, 루멘하르크 황가의 외동딸인 리아나가 태어나 한 번이라도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즉, 이건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모욕.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 하고 반하는 건 러브코미디에서나 나오는 클리셰지 절대로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다.
‘...내가 돌았지.’
조교가 된 후라면 몰라도 조교 전에 이런 말을 한 게 잘못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내가 입을 벌린 순간.
리아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주인님.”
리나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평상시랑 다르게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설마 클리셰가 먹힌 건가?’
잠깐 머릿속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곧바로 털어냈다.
“당연히 이래서는 안 되는 걸…. 몸가짐을 똑바로 한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1시간 주겠다. 그 안에 준비해서 내 방으로 오도록.”
리아나의 대답에 나는 ‘침대 위의 황제’가 시킨 대로 대사를 읊었다.
“네, 주인님. 그때 뵙겠습니다.”
우아하게 허리를 숙인 리아나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물러나듯 내 앞에서 사라졌다.
“.....”
그렇게 잠시 후.
리아나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냐.”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리아나를 상대해야 한다니...
최악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고민할 때가 아니지.”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른다.
일단은 행동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틀 동안 사정을 한 번밖에 하지 않아 정력은 충분하다는 것과 이때 대비해서 트리스티아의 상점에 조교 용품들을 쓸어왔다는 것.
....이 둘을 잘 이용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준비하자.”
결심을 마친 나는 전력으로 달려서 다시 기숙사 안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아래에 넣어왔던 상자를 꺼냈다.
딸깍—
상자를 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해골이 그려진 유리병에 담긴 분홍빛 액체였다.
미약이라고는 하지만 해골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미약이라기보다는 독약에 가깝다.
일반인에게 사용한다면 한 방울만으로 곧바로 폐인 직행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상대는 리아나 루멘하르크.
이 한 병을 통째로 먹여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아카조교사 때는 실패했으니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아카조교사’ 플레이 중에 리아나를 조교 하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중에는 미약을 먹여서 덮친다는 작전도 있었지만, 리아나는 아무렇지 않게 미약이 섞인 음료를 들이켜고는 나를 끔살시켰다.
‘...제발 이번에는 효과가 있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향초를 꺼냈다.
이 향초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본성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는 녀석이다.
기본 효과 자체는 그리 높다고 할 수 없지만, 미약과는 곱연산으로 적용되는 녀석이라 일단 사 왔다.
“...다섯 개 정도면 되려나?”
그렇게 향초에 불을 붙이려던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과연 리아나의 본성을 끌어내는데 옳은 짓인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본성은 마음보다는 성욕 같은 기본적 욕구를 의미하는 거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잠시 향초를 들고 망설이던 나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해보자.”
아무리 위험할지라도 리아나를 조교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전부 사용하는 게 맞다.
칙─
성냥을 켠 나는 마치 마왕에게 도전하는 용사처럼 진지한 얼굴로 향초에 불을 붙였다.
**
유진과 헤어진 뒤, 리아나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을 들어 냄새를 맡는 리아나.
“...읏!”
그 순간, 뭔가를 느낀 듯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유진의 앞에서는 어떻게든 표정관리를 했지만 혼자 남은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실수...했네.”
리아나는 현실을 부정하듯 다시 한번 냄새를 맡아보지만 역시나 달콤한 살 내음 속에 희미하지만 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가 실수를 하다니...”
리아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물론, 땀 냄새는 유진이 말하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한 만큼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유진이라면 냄새를 맡았더라도 흥분감을 더해 줄 향신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의 사정이고 리아나의 사정은 다르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막대한 마력 덕에 항상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던 리아나였고, 최적에 상태에는 체온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이번 혼수상태에서 흘린 땀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흘린 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하필이면 유진에게 들키다니..
‘설마... 그 꼴로 나를 맞이할 셈이냐?’
자신을 경멸하던 눈빛으로 바라보던 유진을 떠오르자 리아나가 다시 한번 수치심의 파도가 밀려온다.
“...유진...칼리오페.”
유진의 이름을 속삭인 리아나가 교복을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땀 냄새 정도는 기억도 나지 않게 해주겠어요.”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태어나 처음으로 진심으로 누군가를 홀리기로 결심했다.
***
얼핏 봐서는 평소와 달라진 점이 없는 방.
하지만 알고 보면 가구의 배치하나, 소품 하나까지 전부 리아나의 조교를 위해서 준비했다.
이 최적의 배치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한 시간 안에 끝난 게 기적에 가까웠다.
“...이 정도면 됐나.”
내가 방안을 둘러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똑, ─똑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라.”
허락을 내림과 동시에 ‘침대 위의 황제’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리아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절대로 당황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시였다.
─철컥
하지만....
문이 열리고 리아나를 보는 순간.
그런 다짐은 태양 앞에 반딧불이처럼 빛을 바랬다.
“후후훗...”
그만큼 지금 리아나의 모습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와 드레스,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금발, 새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지금의 리아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나조차 넋을 잃을 것 같았다.
“어떤가요. 주인님? 어울려요?”
드레스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묻는 리아나의 모습은 어째서 리아나가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지 한순간에 이해하게 해주었다.
“...나쁘지...않구나.”
“후후훗. 좋게 봐주시니 감사드려요.”
칭찬이라고도 하기 모호한 한마디에 꽃망울이 터지듯 미소짓는 리아나.
그 모습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와, 주인님의 방은 처음이네요. 혹시 향초도 절 위해서 피운 건가요?”
안으로 들어온 리아나가 즐겁게 웃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자, 나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위압감을 흩뿌리며 말했다.
“...내게 길들여지기 위해서 온 거냐? 아니면 단순히 놀러 온 거냐? 길드려지기 위해서 왔다면 그만 앉아라.”
“죄송해요♪ 너무 신을 냈네요.”
주눅이 들지 않고 내 앞에 앉는 리아나.
나는 품속에서 미약을 꺼내 잔에 따른 뒤, 리아나에게 건넸다.
“마셔라.”
“네, 주인님.”
리아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잔에 담긴 미약을 전부 마셨다.
색깔만 보더라도 평범한 음료가 아닌 건 알고 있을 테지만, 자신이 마신 것이 무엇인지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만큼 리아나도 길들여질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거겠지.’
리아나가 기대하고 있을 걸 생각하자 가슴이 꽉 조여온다.
만에 하나라도 길들이는 데 오늘 실패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나는 악효가 퍼질때 쯤 리아나에게 명령했다.
“벗어라. 암캐년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