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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24화 (224/354)

〈 224화 〉 일단 하고 생각하죠 (4)

* * *

“이 정도면 됐나.”

나는 두둑한 배낭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 설마 오우거라도 조교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암컷 오우거를 조교 하는 모습이라도 떠올렸는지 우엑하며 가볍게 헛구역질하는 트리스티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녀의 끔찍한 상상력에 나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면 저 많은 물건을 어디다 쓰려고?”

트리스티아의 의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배낭 안에는 평범한 사람에게 쓴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농도의 미약과 조교 용품들이 가득했으니까.

“물론 도련님을 신뢰하고 있지만... 저거 일반인한테 썼다가는 큰일 나는 거 알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흐음... 그럼 어디다 쓰려는 걸까?”

“...굳이 들어서 좋을 게 없어.”

트리스티아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라 리아나와 관련된 일이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가능성은 충분했고, 그럴 경우에는 아예 정보가 없는 편이 빠져나가기 편하다.

“하아... 우리 도련님은 비밀이 참 많아. 서운한걸.”

“비밀이 많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로서는 딱히 큰 의미 없이 던진 말.

하지만 트리스티아는 상당히 놀랐는지 눈이 크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눈치 못 챘을 거로 생각했나.’

‘아카조교사’의 세계에서 트리스티아는 공략 불가 캐릭터였다.

처음에는 성인용품점의 주인인 트리스티아를 공략하면 조교 물품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밸런스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깊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이 있었다.

메인 스토리와 관계없는 아무 귀족 여성들을 한두 명 정도 조교 하고 나면 조교에 필요한 물품쯤은 마음껏 살 정도의 돈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꼼수는 막지 않았으면서 트리스티아를 공략 불가 캐릭터로 만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트리스티아가 레즈비언인 것도 관계있겠지만...’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트리스티아가 레즈비언이었다는 것도 공략 불가 설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합 커플에 난입해서 NTL까지 가능한 ‘아카조교사’에서 트리스티아만 특별 취급받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한 이런 공략 불가 판정을 받은 건 트리스티아를 제외하고 리아나 루멘하르크 뿐이었다.

‘결국, 트리스티아도 리아나만큼 공략할 수 없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거겠지.’

이런 의심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지만, 확신하게 된 건 이번에 보여준 5세대 딜도 때문이었다.

물건 자체는 장난스럽기 짝이 없었다.

허나, 그 안에 담긴 마도구 제작 기술은 명백하게 이 세계의 수준을 몇 단계 초월했다.

‘성인용품점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트리스티아가 성인용품이 아닌 무기를 만들었다면...

분명, 제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자 트리스티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이래서 도련님이 좋다니까. 알면서도 캐묻지 않으니까.”

“굳이 캐물을 필요가 있나? 말하고 싶으면 말하겠지.”

“후훗... 그걸 사람들은 배려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그 말과 동시에 한 발자국 다가와 내 옷깃을 정리해주며 올려다보는 트리스티아.

“....?”

“도련님.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충고해줄게."

:...갑자기 무슨 충고를.”

쪼옥—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옷깃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는 트리스티아.

대응할 틈도 없이 입안으로 트리스티아의 혀가 파고들며 마치 교미하는 뱀처럼 내 혀를 휘감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타액을 교환한 끝에 트리스티아가 나를 놓아주며 말했다.

“...하아. 도련님한테 충분할 정도로 사랑을 주면 된다고 했지만, 여자의 집착은 무섭거든...”

내 귓불을 가볍게 깨문 트리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

같은 시간.

카르네아의 양호실.

루시아, 비앙카, 비비안, 아이리스, 릴리스 그리고 마르잔까지.

카르네아에 소속된 유진의 하렘 구성원 대다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래서.”

팔짱을 낀 비앙카가 뚱한 표정으로 루시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모인 건데?”

“저도 마음 같아서는 제 방에서 모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봉인소동 때문에 기숙사는 안전 점검 중이거든요. 그렇다고 임시 숙소에 모이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고요. 양호실이 딱 적당해 보여서요.”

비앙카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아니, 누가 그걸 물었어? 모인 이유가 뭐냐고.”

“반 리아나 루멘하르크 연합군을 결성하기 위해서요.”

“리아나 루멘하르크면...황...황녀님이요?”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비비안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네. 비비안. 곧 주인님은 리아나를 품을 테니까 그에 따른 대책이 필요해요.”

“하, 하다 하다 유진 그 새끼는 황녀랑도 떡을 치네.”

비앙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유진이면 그럴 만도 하다는 표정이었다.

“...됐다. 말을 말자. 여기서 나만 제정신이지. 그래서 그 새끼가 황녀랑 관계를 맺는데 어쩌라고? 잘했다고 박수라도 쳐줘?”

“말했잖아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뭔 섹스하는데 대책이야. 까놓고 말해서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유진이랑 섹스 안 한 사람이 있기는 해?”

딱히 누굴 저격한 말은 아니었지만, 시작부터 시선을 땅에 고정하고 있던 마르잔의 몸이 흠칫 떨렸다.

“단순히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는데?”

“그 파렴치한 암고양이 년은 분명 감사 할 줄을 모르고 주인님을 독점할 거에요.”

예상이 아니라 확신을 하는 루시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알아요. 전.”

순간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지독한 살기가 담긴 말.

“저...그러면 애초에 선생님이랑 황녀님이랑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침묵을 깬 건 조심스럽게 손을 든 릴리스였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주인님이 황녀와 관계를 맺는 건 확정 사항이라고 봐야 해요.”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확정 사항이라니? 왜? 황녀님은 유진이랑 떡 안치면 죽기라도 한데?”

“....”

“...뭐야?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진짜 죽어?”

비앙카의 말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주인님에게 황녀가 조교당하지 않으면요.”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저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아까 만큼 살기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이를 까득 가는 루시아.

그 모습에 비앙카도 반박하는 대신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하아....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대책이 있으니까 모이라고 한 거 아니야?”

비앙카의 질문에 루시아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주인님을 결혼시키는 겁니다.”

“...겨...결혼?”

“네. 주인님은 책임감이 강한 분이니까요.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형식뿐인 결혼이라 할지라도 황녀가 손을 쓰지 못할 겁니다.”

“그...그럼...누...누가...유진님이랑 결혼을...하나요?”

비비안의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아가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당연하겠지만 제가 적임자가 아니겠어요? 제가 결혼하면 이곳에 있는 여러분은 첩으로는 받아줄게요.”

“...뭐?”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비앙카.

“잠깐 기다려. 유진이를 황녀한테 뺏기지 않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는 건 백번 양보해서 이해했어. 근데 왜 하필 결혼 상대가 너인데?”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왜 제가 아니죠?”

“...뭐?”

“권력, 무력, 재력, 그리고 외모와 몸매까지 뭐하나 제가 부족한 게 있나요?”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말하는 루시아.

과거의 비앙카였다면 이 타이밍에서 발작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젠...아니야.’

어째서인지 몸매는 변화가 없지만 2차 성징을 겪으면서 인간으로 한 단계 성장한 비앙카다.

이 정도는 받아넘길 수 있다.

콧김을 내뿜은 비앙카가 부들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 미..미안한데 나는 트...특별한 거야.”

받아넘길 수 있다고 했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주위를 쭉 둘러본 비앙카가 말을 이었다.

“봐...봐바! 죄...죄다...가...가슴이랑...엉덩이가 큰데 나는...나는 작잖아...!! 나..나는...유진이한테 특별한 몸매라고!”

말하면서도 뭔가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기분이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재력이야 그래, 잘란 우르엘라 가문이니 그렇다 쳐! 하지만 권력은 성녀님도 있고, 무력은 비비안한테 있어! 몸매도 그래! 저 선생님은 애도 없는데 젖이 나온다며! 너는 젖 나오냐아아아아!!!”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말을 쏟아내는 비앙카.

“애초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면 첫 번째를 쟁취할 생각 해야지 무슨 첩으로 받아주니 마니! 웃기지 말라고 해! 안 그래 선생님!”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아이리스가 당황하며 말했다.

“...저...저...저...말이에요?”

“그래! 양호 선생님 말이야! 선생님은 나이도 있으니까 결혼하고 싶을 거 아니야!”

“가...갑자기 나...나이가...왜..... 그...그래도...저는 평민인데다가...”

“사랑하는데 평민이 뭔 상관이야아아! 중요한 건 내가 유진의 첫 번째가 되고 싶은가 아니냐고!”

비앙카의 열기에 휩쓸려 아이리스가 대답하려던 그 순간.

“저...저 릴리스는...! 선생님의 첫 번째가 되고 싶어요!”

번쩍 일어난 성녀님이 대답을 빼앗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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