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야외에서 개처럼) 따먹히고 싶어요 (4)
* * *
약속 시각 10분 전, 나는 안경에 눌린 콧잔등을 매만졌다.
딱히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쓴 건 아니고 가벼운 인식저해 효과가 걸린 마도구였다.
나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좋네...”
카르네아 아카데미는 학생 수에 비해서 부지가 지나치게 넓다.
이것도 여유로워서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좀 휑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초청제가 시작된 카르네아에는 여느 아카데미와 다름없이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연하면 당연한 일이다.
학생 한 명이 부모님만 불러도 인원수가 3배로 뛰니까.
거기에 형제자매와 고용인까지 더 하면 적어도 평상시보다 몇 배는 많은 인원이 카르네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고 있자 문뜩 웃음이 지어졌다.
게임 속에서 초청제는 별다른 사건도 없고, 아이템도 주지 않는 터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족끼리 즐겁게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초청제가 무사히 열려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묘한 감상에 젖어 들고 있자 손가락으로 등을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별로 놀라진 않았다.
아까부터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고, 조금씩 다가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인식저하 효과가 있는 안경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봤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비비안이니까.’
압도적인 마법 재능을 가진 비비안에겐 이 정도 수준의 마도구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아마 백 개쯤 걸치고 있더라도 비비안은 아무런 문제 없이 나를 알아볼 것이다.
내가 시선의 주인이 비비안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던 건 비비안이 말을 걸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5분 정도면 제법 용기 냈네.’
예전에 했을 때는 20분 가까이 우물쭈물했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왔어요. 비비...”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뒤를 돌아본 나는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
“...유진님...어..어떤가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누구세요?’라는 말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나쁜 의미로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비비안이 상처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만큼 비비안의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먼저 라일락을 닮은 비비안의 머리카락 색이 진한 갈색으로 바뀌었다.
아니, 색만 바뀐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 바뀐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의 비비안은 평소의 모습과 완전 딴판이었다.
눈을 커튼처럼 가리던 앞머리는 귀 뒤로 넘겨 얼굴을 전부 드러냈다.
미소녀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귀여웠던 얼굴은 약간 진한 듯한 화장으로 퇴폐미 넘치는 미녀가 되어 있었고, 규격 외의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 늘 펑퍼짐한 카디건을 걸치던 옷차림은 딱 달라붙는 셔츠와 검은색 반바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부 잊게 할 만큼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가슴이...없어?’
비비안의 가슴이 사라졌다.
붕대 같은 거로 감춘 건 아니었다.
비비안의 가슴은 그딴 걸로 눌러질 만한 물건이 아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유진님...무슨 일 있으세요..?”
세계의 보물이 사라진 걸 확인한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갈 뻔했지만, 겉모습과 달리 평소와 똑같은 비비안의 목소리에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아무 일도 없다.”
비앙카가 거유가 됐다는 것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내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있자, 비비안이 먼저 팔짱을 껴오며 말했다.
“그...그럼 가요! 저... 저게 재미있어 보여요!”
***
“...유...유진님 아이스크림 드시지 않을래요?”
“그래, 네가 먹고 싶다면. 무슨 맛 먹을래?”
“으..그..그러니까...바닐라요.”
“알았어. 여기요. 바닐라 맛 두 개 주세요.”
“아...”
유진의 주문을 들은 비비안은 작게 탄식을 삼켰다.
사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기보다는 다른 맛을 골라서 서로 바꿔 먹는 걸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유진이 같은 맛을 골라 버린 것이다.
이런 앙큼하면서도 어리숙한 작전은 당연히 비비안이 직접 생각한 건 아니었고, 비앙카가 데이트라면 다들 이렇게 한다며 알려주었다.
‘....이러면 은근슬쩍 간접키스를 할 수 있지!’
‘처...천재적이에요! 언니!...그...근데...언니는 해..해봤어요?’
‘읏...!...다..당연하지!! 한 10번쯤 했나? 이..이건 동생이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라고!’
자신도 해보지 않은 걸 데이트 조언이라고 던져주는 비앙카나 그걸 그대로 믿는 비비안이나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베아트리스 자매였다.
“자, 여기 아이스크림.”
“...가..감사합니다. 유진님.”
유진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은 비비안이 한 입 베어 물자 입안 가득 바닐라 향이 퍼졌다.
‘...달콤해.’
비비안에게 오늘 하루가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물론 즐거웠다고 대답할 것이다.
유진과 손을 잡고 걷는다면 그곳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복판이라도 즐거울 테니까.
하지만 비비안에게 축제 자체를 즐기고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낚시도 하고, 경품도 받고, 매점을 돌아다니며 여러 음식을 먹어봤지만,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비비안은 이런 축제를 돌아다니기보다는 도서관에서 소설을 읽는 게 좋았고, 침대 위에 누워 과자를 먹는 게 좋았고, 조금 부끄럽지만 야한 책을 쓰는 게 좋았다.
‘...그래도.’
그런데도 오늘 유진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건 비비안도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여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동기가 있어 변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유진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
하지만 오늘 하루를 축제 속에서 지내보니 알겠다.
‘...저는 잘못된 인간인가 봐요.’
아무리 노력해봐도 즐길 수가 없었다.
유진과 함께해서 즐거웠지만, 어차피 함께한다면 그냥 방 안에서 뒹굴거리는 게 더 즐거웠다.
비비안에게 있어서 축제는 사람이 많고 쉽게 피곤해지는 장소에 불과했다.
‘...이러면 안 되죠.’
머리를 채우는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비비안이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쓰다듬고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뭐 할까요? 유진님!”
계속 미소를 짓느라 얼굴 근육이 떨릴 지경이었지만 이럴 때까지 유진에게 우울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런 비비안을 바라본 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비안.”
“네! 유진님.”
“...이제 그만 돌아가자.”
“왜...왜요?...호..혹시...제가...무슨 실수라도?”
“...네가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있으니까.”
비비안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들켰다?’
어디서부터 잘못 한 걸까.
최선을 다해 즐기는 흉내를 내었다.
아무리 멍청하고 둔한 자신이라도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진님이 보시기에는 내가 하는 짓은 삼류 연극에 불과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어 비비안의 입에서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아..아니에요...저...정말..즐기고...”
“비비안, 내게 거짓말하지 마라.”
유진님의 날카로운 눈빛에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네가 즐겁지 않은 장소에 있을 필요가 없다.”
유진이 비비안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옮기자.
“...즐기려고 해봤어요!”
비비안은 처음으로 유진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저도 즐기려고 해봤다고요!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유진님. 저...저는 달라요...! 이런게 재미없어요! 아뇨, 힘들어요! 알아요! 저도 제가 이상한 거!”
말을 뱉는 비비안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다.
먼저 데이트에 초대해놓고 그걸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화를 내다니 정이 떨어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 번 터져 나온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저...저는 특별히 잘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상 할 뿐이라고요! 언니처럼 진심을 전하지도 못하고 루시아님처럼 즐겁게 해드리지 못해요. 저는 잘하는 것도 하나 없는 바보 같은 년이라고요!”
“...그게 어쨌다는 거냐?”
비비안이 쏟아 뱉은 절규에 유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비안. 네가 진심으로 달라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도와주마. 하지만 네가 누구를 흉내를 내기 위해서라면 달라질 필요 없다.”
“...하...하지만...유진님은 활발한 여자들은 좋아하잖아요...”
“누가 그랬지?”
“네?”
“내가 평범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누가 그랬냐고.”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비비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서 가슴 속에 쌓아두고 있을 뿐.
짧은 한숨을 내쉰 유진이 말을 이었다.
“비비안.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이유로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그럼. 어떤 이유로.”
“매력적이니까. 평소의 너처럼 말이다.”
“...네?”
“네가 매력적이라 말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비교 할 필요도 흉내를 낼 필요도 없다. 너는 너라는 것만으로도 내게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유진의 말을 들은 비비안이 눈을 크게 뜨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달라지고 싶다...?
아니었다.
비비안이 진심으로 바라는 건 달라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흉내를 낼 필요 없이 그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유진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유진님..”
“그러니 이런 연극이 아니라. 네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을 말해라.”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
고개를 숙인 비비안이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진님께는..재미없겠지만...가끔은 같이 도서관에 가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침대에서 둘이서 과자를 먹고 싶어요. 아니, 유진님이 먹여주면 좋겠어요.”
“알겠다. 네가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준비하마.”
“...야한 소설도 같이 써주세요.”
“...그건 노력해보마.”
유진의 떨떠름한 대답에 비비안이 푸흡, 하고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웃은 느낌이었다.
“...감사해요. 유진님.”
“그래. 그럼,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건 없고?”
“지금요...?”
유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던 비비안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있어요.”
“말해봐라.”
까치발을 들어 유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비비안이 야릇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님에게 따먹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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