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야외에서 개처럼) 따먹히고 싶어요 (1)
* * *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에 나는카르네아에 돌아왔다.
클라리스와 엘라리스는 떠나 보내기 아쉬워하는 티를 냈지만, 그래도 붙잡기보다는 인연이 된다면 또 보자는 말과 함께 시원하게 보내주었다.
“그럼, 둘 다. 푹 쉬어요.”
“네에.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아암....음?...벌써 집이네요...하암...유진군...바래다 줘서...고마워요. 나중에 봐요...”
릴리스는 하품을 길게 내쉬는 아이리스를 부축해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자, 선생님 정신 차려요. 자기 전에 씻고 자야죠.”
“후아암....그래도...릴리스...저..너무....졸려서...눈이...계속...감겨요...”
“그래도 안 돼요! 저 릴리스가 도와 줄 테니 어서 일어나요.”
마치 아이리스와 릴리스의 역할이 반대로 된 것만 같았다.
이전부터 둘이 친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분홍 머리의 비밀이 밝혀진 이후로는 거의 친자매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멀긴 해도 피가 섞여 있기도 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둘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는 상태창을 불렀다.
[특성이 진화했습니다!] [침대 위의 왕자 (Rank B+)] > [침대 위의 황제 (Rank A+)]더 이상 당신을 침대 위에서 이길 존재는 없습니다! 서큐버스의 여왕에게 키스를 받고도 살아남은 정력입니다! 어떤 여자라고 할지라도 한 번 당신을 맛보면 포로가 되어버릴 겁니다!이성과의 모든 행위에서 엄청난 보정이 들어갑니다!모든 성행위에 초월적인 보정이 들어갑니다!당신과 성행위를 하는 모든 대상은 민감도가 ‘500’%까지 상승합니다.이성의 성감대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었는데도 설명을 읽을 때마다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간다.
아무 생각 없이 아이리스의 고향에 다녀온 것 치고는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얻어냈다.
음란 핑크의 비밀을 알아냈고, 리리스에게 선물도 받았고, 무엇보다 ‘침대 위의 왕자’가 진화했다.
사실 앞에 있는 두 개가 없이, ‘침대 위의 왕자’가 성장한 것만으로 이번 연휴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교사’와 더불어 '침대 위의 왕자'는 내 밥줄 같은 특성이 아닌가.
‘이게 없었더라면 죽어도 몇 번을 죽었지...’
특별히 애착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애착과는 별개로 ‘침대 위의 왕자’는 내가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할 때 단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특성.
그러니 어떻게 해야 성장하는지, 애초에 성장 가능한 특성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예상치 못한 성장이 더욱 기쁘게 다가왔다.
‘도대체 얼마나 사기 특성이 되려고...’
랭크가 B+ 이었을 때도 사실상 S랭크의 효율을 보여주던 녀석이다.
A+ 랭크가 된 ‘침대 위의 왕자’ 아니, ‘침대 위의 황제’는 얼마나 굉장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일단 설명부터가 평범하지 않았다.
성행위에 있어서 초월적인 보정이 들어간다니...
‘아카조교사’의 세계관에서 초월적이라는 수식어는 매우 드물게 붙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특성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되네.”
벌써부터 ‘침대 위의 황제’를 사용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읏!”
그때, 앞에서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목소리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몰라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비앙카?”
내가 상태창을 치우고 비앙카를 불러봤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풀숲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보랏빛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으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숨은 걸 보니 지금 비앙카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삐진 건가?’
황금연휴 내내 양호 마망의 고향에만 있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래 보여도 비앙카는 질투가 많은 성격이다.
평상시에 질투할 때는 놀리는 맛이 있기는 했지만, 한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을 만나자마자 괴롭힐 정도로 내 성격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기분을 풀어줘야지.’
나는 제복의 넥타이를 가볍게 풀며 수풀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저러고도 아직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마치 머리만 감추면 숨었다고 생각하는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거기서 뭐 해요? 이미 들켰으니 나오세요.”
“나...비앙카 아니야! 그러니까 오...오지마!!”
“비앙카라고는 안 말했는데요.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나오세요. 아니면, 제가 갈까요?”
“오...오지말라고!! 가..가까이오면 가만 안둬!!”
유진이 다가오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비앙카가 위협하듯 말했다.
‘...최...최악이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빨리 숨는다고 숨었는데 도대체 왜 들켰는지 모르겠다.
비앙카는 최선을 다해 손으로 머리를 빗어보지만, 풀숲에 엉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은 정리가 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왜 하필 지금...!’
사실 비앙카의 문제는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어디라 콕 집어 말할 필요도 없이 온몸이 다 엉망이었다.
오늘은 연휴의 마지막 날이고 비앙카도 유진이 돌아올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날짜에 맞춰 수행을 끝내고 카르네아로 돌아온 거 아닌가.
‘그렇다고 하필 지금 마주칠 필요는 없잖아!’
이 넓은 카르네아에서 우연히 딱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세상이 자신을 가지고 놀리는 것 같다.
항상 꾸민 모습만을 보여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최소한 샤워라도 하고 난 뒤에 만나야 할 거 아닌가!
그러기만 했어도 비앙카는 유진의 품 안에서 마음껏 기뻐했을 것이다.
물론, 유진이 짐작했던 대로 연휴 내내 다른 여자랑 붙어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한참이나 유진을 만날 수 없었다는 안타까움이 훨씬 컸다.
만약 침대 위에서 유진을 만났다면 그동안은 창피해서 부리지 못한 애교를 보여 줄 생각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아니야.’
지금 이 상태로는 애교 부리기는커녕 얼굴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다.
냄새를 맡기 위해 겨드랑이에 코를 가져다 대던 비앙카가 멈칫했다.
'분명 땀 냄새가 날 거야...'
굳이 맡아 보지 않아도 벌써 며칠이나 씻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래, 일단 도망치자...’
여자는 커녕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준비도 안 된 상황이다.
비앙카의 자존심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결코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봐봐요. 비앙카 맞네요.”
“꺄아아아아아악!”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비앙카가 벌떡 일어나며 욕설을 내뱉었다.
“개...개새끼야!! 오...오지말라니까 왜 말을 안들어!!”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비앙카.
‘...저래서 오지 말라고 했네.’
모습을 보아하니 바로 알겠다.
삐진 게 아니라 창피해서 그런 거였다.
하지만 비앙카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분명 때가 꼬질꼬질하지만 내 눈에는 비앙카가 여전히 귀엽게만 보인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되물었다.
“만나자마자 서운하게 왜 그래요. 저를 피한 비앙카의 잘못이에요.”
“피...피하는 걸 알면 그냥 좀 모르는 척해!!”
유진의 능글맞은 태도에 비앙카가 빽 소리를 질렀다.
***
오랜만에 만난 비앙카와 잠깐 꽁냥거린 뒤, 기숙사에 돌아갔다.
비앙카도 데려오려고 했지만 씻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극구 반대를 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왔다.
“주인님!”
“유...유진님...다녀오셨어요.”
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루시아와 비비안이 나를 반겨주었다.
“응, 다녀왔어.”
내가 둘을 동시에 껴안으며 체온을 만끽하고 있자 비비안이 평상시보다 루시아의 눈치를 더 보는게 느껴졌다.
“비비안,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유진님이 안 계신 동안 루시아님이 저를 너무 잘 챙겨주셔서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했어요. 저...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래도 내가 없는 사이에 비비안이 루시아에게 뭔가를 당한 모양이다.
'....예상해보자면'
아마도 초청제에서의 약속을 선수 친 게 들켜 잔소리를 들은 게 아닐까.
그러자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루시아가 세상 착하게 웃으며 물었다.
“...주인님. 초청제에서는 비비안과 다니기로 했다면서요. 저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놨는데. 아쉽네요.”
“히익...죄...죄송해요.”
“아뇨, 비비안이 죄송할 게 뭐 있나요. 비비안이 설마 선수를 칠 줄 몰랐던 제 잘못이죠. 안 그래요 비비안?”
“....”
딱 저렇게 갈궜나 보다.
나는 내가 없는 동안 고생했을 비비안에게 안타까움을 듬뿍 담은 시선을 한 번 주었다.
“주인님. 그런데 주인님의 가족분들은 정말 안 오시나요?”
“안 말했으니까. 안 올 거야.”
루시아의 질문에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엠마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 초정제에 대한 정보를 모두 차단하게 시켰다.
예전에 연회장에서 루시아와 칼리오페 모녀가 기 싸움하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그 모습을 본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초청제에 부를 리 없지 않은가.
‘...제국의 유명인사가 가득 할 초청제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어디선가 환청처럼 들리는 오라버니 소리에 나는 고개를 절래 저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