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뭐든지 한다고 했죠...? (1)
* * *
“...도대체 얼마만큼의 기회가 있어야 저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반복해도.” “저는 여전히 틀린 선택만을 하네요.” “...미안해요.”
***
낯선... 아니, 익숙한 천장이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여긴...”
양호실인 건 알겠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되살아난 타락’의 숙주를 찾기 위해 지하실로 들어갔는데 그리고 나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가던 중.
불현듯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비앙카!”
차악—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커튼을 젖히자, 그곳에는 비앙카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비앙...카.”
무섭다.
너무 무서워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확인해야만 했다.
미친 듯이 떨리는 손으로 비앙카의 상의를 조심스럽게 들추자.
“하아...”
상처 하나 없는 비앙카의 매끈한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행이야...정말...정말로..”
눈앞에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비앙카의 배를 쓰다듬고 있자, 어디선가 귀여운 코골이가 들렸다.
“쿠우울....”
소리를 따라 옆 침대를 살펴보자 침까지 흘리며 자는 릴리스가 보였다.
“...성녀님.”
“흠냐...흠...두..개...먹어도...”
손등으로 침을 닦아주니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를 하는 릴리스.
저 바보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하광장에서 보았던 성녀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제 목숨 하나를 부지하자고 도움을 필요한 어린 양을 버릴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한 적 없습니다.’
나는 잠들어있는 릴리스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릴리스가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걸 망설였다면, 비앙카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앙카와 릴리스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내 침대에 돌아온 나는 오른쪽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오른손의 감각이 평상시랑 미묘하게 다르다.’
일단 가장 중요한 둘의 생사를 확인했으니, 다음에는 내 몸 상태를 되돌아볼 차례였다.
[이름 : 유진 칼리오페]
[직업 : 고유능력자]
[칭호 : 영웅의 자질을 가진 자]
[능력치]
근력 22 > 32 민첩 22 > 32 체력 25 > 35
지력 21 > 31 마력 23 > 33 행운 35 > 45
[고유능력]
[염동력 (Rank C > C+)]
중급 마법과 비슷한 정도의 위력을 내는 수준입니다.
[특성]
[침대 위의 왕자 (Rank B+)]
과연 침대 위에서 당신을 이길 자가 존재할까요? 서큐버스조차 당신의 정력에는 참지 못하고 지려버리고 말 겁니다.
이성과의 모든 행위에서 상당한 보정이 들어갑니다.
모든 성행위에 엄청난 보정이 들어갑니다.
당신과 성행위를 하는 모든 대상은 민감도가 ‘350’% 상승합니다.
이성의 성감대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세계수의 축복 (Rank B > B+)]
세계수의 축복으로 이루어진 씨앗입니다. 잘 키워낸다면 뭔가 좋은 일 있을지도?
모든 능력치가 적당히 상승합니다.
회복능력이 상당히 상승합니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습니다.
냉기저항이 극도로 상승합니다.
냉기계열의 친화력이 상당히 상승합니다.
[기어오는 공포 (Rank B)] NEW!
기어오는 공포의 일부를 섭취했습니다.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지만 세계수의 씨앗에 의해 굴복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언제 다시 송곳니를 보이질 모르니까요.
모든 능력치가 상당히 상승합니다.
재생능력이 극도로 상승합니다.
신체 변형이 가능합니다.
[조교사 (Rank EX)]
주인님의 것은 주인님의 것 육변기의 것도 주인님의 것!
일정 수준 이상 조교 된 히로인의 스킬을 ‘4’개를 최대 ‘77.2’% 위력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 가능한 스킬의 개수와 위력은 히로인의 조교도에 따라 변화합니다.
▶조교사로 생성된 스킬
[묶어라 (하급 특수 마법)] [‘루시아’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77.2%]
[찢어발겨라─늑대─송곳니 (상급 특수 마법)] [‘루시아’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77.2%]
[그림자 (파볼리에 혈족 마법)] [‘멜피사’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77.2%]
[신체 강화 (Rank A)] [‘비앙카’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77.2%] 상승치 11
죽을 고비를 넘은 만큼 급성장을 이루긴 했다.
‘모든 능력치의 10 상승이라..’
모든 능력치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뀐 지금이라면 1반의 상위권도 충분히 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세계수의 씨앗에 의해 굴복한 상태입니다.」
이건 순전히 운이 좋았다.
물론, 운이 좋았다는 것치고 상황 자체는 최악이었으니, 이번 경우는 악운이 좋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설마 세계수의 씨앗이 이런 효과를...’
세계수가 거목이 될 정도로 완전히 성장했을 때면 몰라도, 겨우 씨앗이 ‘기어오는 공포’를 이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마, ‘기어오는 공포’가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을 사용했고, 그 때문에 서열정리가 됐겠지.
반대로 말하자면 ‘기어오는 공포’에게 조금만 더 힘이 남아있다면...
나는 ‘기어오는 공포’에 통째로 잡아 먹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되살아난 타락은 어떻게 됐지?’
드르륵—
뒤따라 오는 의문에 내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확인하려던 순간 양호실의 문이 열렸다.
“유...진...군...?”
평상시랑 다르게 전혀 관리를 안 했는지 눈도 퉁퉁 불고 머리는 산발이 된 아이리스의 모습.
저런 모습조차 귀여워 보이는 건 내가 맛이 간 걸까.
“...아이리스.”
이름을 부르자 아이리스의 큼지막한 눈에 물기가 가득 고이더니 쪼르르 달려와 품에 쏙 안긴다.
“흐윽..끄윽...흐으윽...흑...”
무언가를 말하는 거 같지만, 훌쩍임이 너무 커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기에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한참 후, 조금 진정한 듯 아이리스가 코를 풀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나뻐요...제...제가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미안해요.”
“미..미안하면 다에요! 저..저한테 결혼하자고 해놓고 결혼하기도 전에 과부를 만들 셈이에요?”
“결혼하기 전이면 과부가 아니지 않..”
퍼억─
아이리스의 주먹이 제법 매섭게 찔러 들어온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미안해요.”
"...됐어요. 유진군이니까 또 모두를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겠죠. 저한테는 모두보다 유진군 한사람이 더 중요한데 말이죠..."
아이리스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다.
“...아이리스.”
“흥, 됐어요. 그보다 유진군 성녀님과 비앙카에 대해 말해줄 게 있어요.”
“위험한 겁니까?”
“아...아니에요... 치료는 완벽하게 끝냈어요.”
유진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아이리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뭐에요 진짜.’
자신의 앞에서 다른 여자를 저렇게 신경 쓰는 건 분명 화가 날 일인데, 진지한 옆모습을 보자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그럼... 어떤 이유 때문에...아니, 그보다 릴리스가 성녀님인 걸 어떻게...?”
“...저도 파르테논의 졸업생이라고요. 성녀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어요. ...게다가 저 머리카락 색도 흔한 건 아니잖아요.”
비록 성녀님의 정확한 생김새까지는 모르지만 빼어난 외모에 진한 분홍빛 머리카락을 지녔다는 것 정도는 들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헛기침한 아이리스가 눈초리를 샐쭉하게 뜨며 물었다.
“유진군, 도대체 여자가 몇 명이에요?”
“...”
갑작스러운 아이리스의 말문이 턱 막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말 그대로인데요.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여기 있는 세 명을 포함해서 육체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가 몇 명이냐고요.”
“....”
이상하게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웃고 있을 때가 가장 무서운 것 같았다.
지금도 상황만 봐도 그렇다.
아이리스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착하게 웃고 있지만, 쏟아지는 압박감만큼은 상급 마물 못지않다.
“꼭 말해야 하나요?”
“네, 꼭 말해야 해요.”
아이리스의 추궁에 양호 마망, 비앙카, 릴리스를 떠올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릴리스에게는 아직 펠라만 받았을 뿐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양호 마망에게 있어서는 확정 사항 같기에 포함했다.
‘결국, 맺을거기도 하고...’
릴리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지하광장에서의 일이 기억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는 릴리스에게 한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뭐든지 하겠다...’
곤히 잠든 릴리스를 살짝 바라본 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목숨 걸고 비앙카를 살려준 걸 생각하면 어떤 것이든 해줄 수 있지만...
‘과연 무슨 짓을...’
음란 성녀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두려웠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내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명...뭐 그...그럴 수 있죠....자..잠시만요 여기 안에 있는 사람만 세 명인데요?”
루시아와 비비안을 떠올리며 추가로 두 개를 더 폈다.
“..다..다섯명....그...그래요...유진군은...고위 귀족이니까요...후...후계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왼손을 들어 엠마와 멜피사, 트리스티아를 더했다.
“...여...여..덟명...하루에...한 명씩만 돌아도...일주일이...넘어...?”
이제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그저 입을 벌리고 놀라는 아이리스.
그 모습을 본 내가 콧잔등을 매만졌다.
‘가르시아, 레이카는 뺐는데 일단...’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 말하기는 어려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