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뭐든지 한다고 했죠...? (2)
* * *
“...하아.”
나는 그림자 속에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흘렸다.
전부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하는 루시아를 진정시키고, 나를 볼 때마다 펑펑 울어대는 비앙카을 달래주며, 살짝 흑화하려던 비비안을 정상으로 되돌리는데 일주일 가까이 소비했다.
정신적으로 제법 지쳤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럼 이제.’
내가 고개를 들어 ‘성검’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정보를 루시아와 공유해왔지만, 성검의 존재는 루시아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만약 성검의 존재를 밝힌다면, 루시아는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뒤처리에 바빠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1회차의 나’라는 존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이레귤러다.
이전처럼 망겜이니까 하고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성검과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선 채 손을 뻗었다.
스르륵─
그러자 의지에 따라 팔이 길게 늘어났다.
‘기어오는 공포’를 섭취한 후 얻어낸 신체 변화의 능력.
아직 전투에서 사용할 만큼 재빨리 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체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건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파지직
손이 가까이 다가오자 성검은 거부하듯 검은 번개를 튀긴다.
단순히 모습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번개가 튈 때마다 피부가 타들어갔지만 무시하고 성검을 움켜쥐었다.
두근─
성검과 닿은 순간, 루시아와 감각 동화를 했을 때처럼.
아니, 그때의 몇 배가 넘는 감정이 쏟아졌다.
절망, 좌절, 후회, 책임, 분노, 회한, 슬픔...
그리고사랑.
‘...누구를?’
부정적인 감정이 나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지키지 못했기에 절망했고, 내가 실패했기에 후회했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달랐다.
그곳에는 마녀가 있었다, 광견이 있었다, 악녀가 있었다, 노예가 있었다.
...그리고 황녀가 있었다.
황녀를 떠올리는 순간 파도가 되어 쏟아지는 감정들.
‘...!’
감정에 잡아 먹히기 전에 내가 손을 떼려고 했지만, 손이 명령을 듣지 않는다.
샤아악─!
나는 주저 없이 염동력으로 칼날을 만들어 팔을 잘라냈다.
“...끄윽...”
상당히 고통스럽고, 단면이 꿈틀거리며 회복하는 게 보기에 역겨웠지만, 애초에 이런 경우까지 예상하고 팔을 늘린 것이다.
잠시 후, 팔이 재생한 걸 확인한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황녀가?’
다른 사람이라면은 몰라도 내가 황녀를 사랑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리아나 루멘하르크의 외모는 그 루시아와 비등할 정도로 출중하다.
나조차 긴장을 풀면 잠깐 반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성검이 내게 전해준 감정은 그런 얄팍한 애정 따위가 아니었다.
비앙카가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황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던질 수도 있을 정도의 감정이었단 말이다.
잠시 황녀와의 관계를 고민하던 내가 한숨을 흘렸다.
‘모르겠다.’
잠깐 감정을 엿본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릴 정도로 황녀를 사랑했던 이유를 모르겠다.
‘...늦었네.'
시간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저으며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곤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
시험 기간이 코 앞이다.
계회대로라면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되살아난 타락’의 공략 준비를 들어가야 했기에 당연히 시험 기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공략이 끝난 탓에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선생님!!”
쉬는시간이 되자 복도 끝에서부터 손을 붕붕 흔들며 아는 척을 해오는 릴리스.
학생들에 가려서 제대로 보인 건 아니고, 제자리에서 폴짝 뛸 때만 머리만 살짝 보였다.
“...”
나는 그런 릴리스를 못 본 척 몸을 돌려 반대쪽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릴리스에게 미안했지만, 지금은 누구와 추문이 돌면 절대로 안 되는 상황이다.
아무리 릴리스가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존재 자체가 음란한 성녀님과 함께했다가는 반드시 그럴 상황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서...선생님..!..기...기다려...으핫!”
***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오늘 하루만 선생님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릴리스를 피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기는 절대로 못 찾겠지.’
“선생님!!”
오늘 하루 동안 너무 시달린 것 같았다.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선생님?”
“...!”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야릿한 손놀림에 내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성....릴리?”
나도 모르게 성녀님이라 부를 뻔한 말을 집어삼키고 가명을 부르자 릴리스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저 릴리 화이트 플랑이에요!”
“여긴...남자 화장실인데.”
“알고 있어요!”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니 말문이 턱 막힌다.
“릴리... 보통은 여자는 남자 화장실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알아요! 그래도 선생님이 자꾸 피하시니까! 어쩔 수 없어요!”
“....”
릴리스라면 내가 피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티가 났나 보다.
“오해입니다. 제가 릴리를 왜 피하겠습니까.”
“정말요? 정말 피한 거 아닌가요?”
“당연합니다. 지금 이렇게 릴리와 만난 게 얼마나 기쁜 줄 모를 겁니다.”
“아하! 제가 착각했군요! 그럼 선생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정말 납득한 건지 아니면 납득한 척하면서 은근히 멕이는 건지 모르겠는 릴리스의 말투.
“릴리, 그거 말인데...”
내가 약간 거절의 낌새를 내비치자 릴리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생님... 뭐든지 한다고 했는데...”
“...그거..”
“물론...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든지 한다고 했는데...”
릴리스의 삐진 얼굴을 보자 양심이 쿡쿡 찔렸다.
어찌 됐건 릴리스는 비앙카의 생명의 은인이란 말이다.
“...언제가 좋을지 궁금해서요.”
“아핫! 그랬군요! 저는 혹시 선생님이 거절할까 봐 놀랐어요!”
“...그럴리가요. 약속했는데요.”
“네! 그렇죠 약속이니까요! 그럼, 오늘 밤 12시.”
릴리스의 야릇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선생님과 처음 만난 곳에서 봬요.”
***
릴리스와 약속한 시각 10분 전.
문 앞에선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릴리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요구할지 두려웠다.
드르륵─
시간에 맞춰 안으로 들어가자 진한 분홍빛 머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성녀님...”
“선생님! 저 릴리스! 기다리고 있었어요!”
활짝 핀 벚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릴리스.
릴리스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은 내가 물었다.
“그래서 어떤 부탁을 하려고요?”
“아! 선생님 잠시만요. 말씀드리기 전에 정조대부터 풀게요!”
“...?”
릴리스의 말에 머릿속에 의문이 마구 솟아난다.
분명 정신을 차린 다음 날 정조대의 열쇠는 전해줬는데...
“정조대... 안 풀고 있었습니까?”
“네! 선생님께서 미칠 듯한 쾌락을 느끼게 해주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
찰칵—
정조대가 풀리자 털 하나 없는 새하얀 백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투명한 애액이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떨어지며 달콤한 복숭아 향이 올라왔다.
“헤헤...벗어버렸어요...”
보지를 스스로 훤하게 드러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살짝 달아오른 얼굴만 보면 순진한 처녀의 모습을 한 릴리스.
‘...아니, 처녀가 맞기는 하지.’
정조대를 차기 전에는 관계를 맺은 적 없다고 선언했고, 그다음에는 계속 정조대를 차고 있었으니까.
“흐읏... 보지에 찬공기가 닿아서 기분 좋아요...”
하지만 저게 어떻게 처녀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란 말인가.
속으로 한숨을 삼킨 내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성녀님.”
“릴리스.”
눈을 똑바로 마주치면서 말하는 릴리스.
“릴리스라고 불러주세요.”
이럴 때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건 실례인 것은 알지만...
‘행동까지 닮았어.’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리스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요. 릴리스.”
“헤헤...네 선생님.”
이름 부르는 것만으로도 릴리스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숙인다.
처녀와 치녀를 마구 넘나드는 릴리스의 태도에 나도 릴리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래서 릴리스. 저한테 하고 싶은 부탁은 어떤 건가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손뼉을 친 릴리스가 허리를 숙이며 가방을 뒤적거린다.
“...음...어디있지?”
치마가 올라가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릴리스의 엉덩이가 살랑살랑 거리는 게 계속 보고 있다가는 이성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아! 찾았어요!”
내가 심호흡하며 성욕을 가라앉히고 있자 릴리스가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선생님은 여기서 나오는 조교사처럼 제 처녀를 가져가 주세요!”
[암컷 조교사]
관계를 맺는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릴리스가 건네 준 책의 제목이 너무 불길했다.
“잠깐 읽어봐도 괜찮아요?”
“네! 선생님 얼마든지요!”
스륵─
“....음...”
잠시 훑어봤는데 강간으로 시작된 첫 경험으로 시작해 알몸 산책, 야외 방뇨까지 내용이 하드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딴 책을 쓰는...’
짜증을 숨기며 표지를 확인하자 구석에 저자 BB라고 적혀있었다.
‘...비비안!’
‘나의 일기’를 마지막으로 집필 활동은 그만둔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썼단 말인가.
배신감에 주먹을 꽉 쥐자 릴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생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제가 아무리 울고불고 애원해도 절대로! 멈추지 말아 주세요!”
“릴리스... 진심이에요? 여기 있는 건...”
“네, 절대로 절대로에요! 제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절대로 그만두시면 안 돼요!”
“그래도, 너무 힘들면 그만두려는 암호 같은...”
“안돼요!”
내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릴리스.
“첫 경험은 한 번 뿐인데... 세이프 워드 같은 걸 설정해두면 저도 모르게 말할지 모른다고요! 그럼 너무 아깝잖아요! 저는 책에서처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경험을 원해요!”
“...”
혹시 릴리스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돌려서 말했는데 세이프 워드라는 정식명칭까지 알고 있다.
“그럼... 릴리스 정말 책에 나온 대로 해요?”
“네! 똑같이 해주세요!"
릴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작은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달린 신성력 보관통이 마구 흔들린다.
“...릴리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요. 정말 괜찮아요? 일단 시작하면 릴리스가 바라는 대로 안 멈출 거에요.”
“네! 물론이...”
콰앙—!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릴리스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치마를 들어 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릴리스가 뿜어내는 페로몬에 이성이 거의 한계였다.
“...서..선생...님?”
이렇게 급작스럽게 시작할 줄은 몰랐는지 릴리스가 당황한 듯 나를 불렀지만.
푸욱─
나는 릴리스의 허리를 붙잡고 단숨에 끝까지 자지를 처박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