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빡대가리 성녀님은 발정기 (2)
* * *
인적이 드문 길은 한참 걷다 보니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후우.”
들판 너머로 쭉 펼쳐져 있는 비석들.
...이곳은 카르네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위로하기 위해 만든 묘지였다.
수많은 비석을 보자 과거 카르네아는 아카데미가 아닌, 전쟁터를 향할 병사를 길러내는 훈련소였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
걸음을 몇 발자국 옮기자 빛바랜 비석 사이에서 유난히 새것처럼 보이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에머리 실베스터】【윈프레드】【엘로이즈】
익숙한 이름을 보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 밀어놓았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피곤해? 안마라도 해줘?—공부? 거짓말하지 마.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144위야.
주먹을 꽉 쥔 나는 기억을 다시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목적을 착각하지 마라.’
지금 내가 이곳에 온 건 저들에게 사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죄는 이 세계에 해피 엔딩을 가지고 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되살아난 타락’의 숙주가 될 시체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이곳에 있는 시체가 숙주가 될 것을 알고 있다면 애초에 부활할 수 없게 시체를 전부 부숴버리면 되지 않냐 싶지만...
시체를 일정 수준 이상 망가트리면 새로운 숙주로 갈아타기 때문에 다리뼈나 팔뼈를 미묘한 위화감이 생길 정도로 바꾸는 게 최선이었다.
“...후우.”
가방에서 삽을 꺼낸 내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내 마력 감응력으로는 이 넓은 묘지에서 숙주를 찾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럼... 시작해볼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승률이 올라간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다.
***
“하아...”
마르잔은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성녀님의 상태가 이상하다.’
개강 후 처음 며칠간은 쉬는 시간마다 자리에 찾아와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떠들어대던 성녀님이 지금은 어딘가 혼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무슨 고민이 생긴 것 같네요.’
첫 만남 같았으면 분명 성녀님이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착각했겠지만, 이제는 마르잔도 잘 알고 있다.
...이 성녀님은 엄청난 바보라는 걸.
‘분명 소스를 찍어 먹는 건가 부어 먹는 건가 정도를 고민하고 있겠죠... 제정신이라면 찍어 먹는 게 당연한 것을...’
가볍게 고개를 저은 마르잔이 성녀를 향해 방긋 웃으며 물었다.
“릴리..?”
“아...마르잔...하아...”
말을 걸자 한숨을 깊게 내쉬는 성녀님.
“릴리, 무슨 고민 있으세요?”
“...티...났어요?”
“네, 요즘 계속 한숨을 쉬잖아요.”
“...으응...마르잔...”
눈을 질끔 감은 릴리스가 책상 위로 엎어진다.
마르잔은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둘이 고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미안해서.”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라는 말에 성녀님이 커다란 눈망울을 껌뻑거린다.
“치...친구요?”
“네, 친구요.... 혹시 릴리는 저랑 친구가 되는데 싫은가요?”
그러자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젓는 성녀님.
“아..아뇨! 친구에요! 그렇죠! 마르잔이랑 저는 친구예요!”
“다행이네요. 그럼 이 친구에게 털어놓으세요.”
“그...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럼...말 할게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릴리스가 입을 우물거렸다.
‘...귀엽네요.’
어차피 하찮은 고민일 게 뻔하지만 마르잔은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삼켰다.
“후우...그...”
한참을 뜸을 들이던 릴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사랑이란 뭘까요?”
...생각보다 엄청나게 진지한 고민이었다.
***
며칠 전.
릴리스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된 방을 보고 있었다.
“이상해요... 어째서 이렇게 된 거죠?”
분명 파르테논에서 똑같이 살았을 텐데 왜 이렇게 방이 난장판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이유야 간단했다.
파르테논에서는 릴리스가 방을 비울 때마다 메이드들이 정리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릴리스는 자신을 정리를 잘하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뭐! 저 릴리스! 정리 정도야 간단하죠! 빨리 정리하고 간식을 먹겠어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릴리스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를 해봤지만, 방은 더욱 엉망이 되어갔다.
“...어...어째서? 변화가 없는거죠? 아니... 오히려 더 더러워진 듯한 느낌이...흐앗!”
쿠웅—
옷더미에 발이 걸려 넘어진 릴리스의 시야에 보라색 표지의 책이 들어왔다.
“응..? 이게 뭐죠...?”
책의 표지를 보고 있자 불현듯 도서관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때 무작정 도망치는 바람에 들고 온 책이다.
릴리스의 이마에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린다.
“어...어쩌죠? 도...도둑질을 하고 말았어요...”
그냥 조금 골탕 먹일 생각이었지 도둑질 같은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도...돌려놓아야...”
하지만 도서관에 다시가기에는 '명탐정'이랑 만날까 두려웠다.
명탐정도 말하지 않았던가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고.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릴리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이를 떨었다.
“저...저는 이대로...가...감옥에 가는 걸까요...”
성녀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도둑질이나 하다니 여신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릴리스의 머리에 스쳤다.
“..그..그래요!....제가 직접...주인을...찾아주면 되는 거잖아요?”
책 겉면에는 이름 따윈 적혀있지 않았지만, 혹시 내부에는 혹시 힌트가 적혀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릴리스가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책장을 넘길수록 릴리스의 손이 점차 느려지더니 얼굴이 진한 분홍색으로 달아오른다.
“딸꾹...”
이윽고 조심스럽게 책을 품에 안은 릴리스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이,이,이런...책이..조,조,존,존재하다니...!!’
같은 아카데미라 해도 카르네아와는 달리 파르테논은 남녀의 구분이 확실하다.
거기에 성녀라는 위치상 릴리스는 남성들과 접촉 할 기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남성에게 내성이 부족한 릴리스에게 고수위의 음란 서적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유,육변기라던가...저,절정이라던가...잘은 모르겠지만..괴,괴,굉장했어요.’
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족한 릴리스에게 몇몇 단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단어를 볼 때마다 숨이 거칠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였다면 릴리스가 늦게나마 성에 대해 깨우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내 몸에 닿는 순간 아랫배가 애달프게 조여오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이건 사랑이었다.
이 묘사가 문제였다.
「사랑」
릴리스가 성에 대해는 무지해도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알고 있다.
수많은 동화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용사님이 결국 악당을 물리치고 공주님을 구해내는 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이..이게 진짜 사랑일까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묘사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몸에서 열기가 돌고, 다리 사이가 간질 거면서 아랫배에 애달프게 조여온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릴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떻게해요...저...사랑을 하나봐요...”
****
“사...사랑이란 뭘까요?”
“...”
마르잔이 말문이 막힌 사이 릴리스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호..혹시...마르잔은....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사...사랑...이요?”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진지한 주제에 마르잔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해봤을리 없죠.’
루시아님을 만나기 전에는 빈민가에서는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죽거나 죽이는 삶을 살았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사랑 같이 폭신폭신한 걸 할 여유는 없었다.
루시아님께 구원받은 뒤로도 마찬가지다.
빈민가 출신인 자신이 루시아님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예절과 기술을 익히는데 모든 시간을 쏟았다.
그런 마르잔에게 그나마 접점이 있던 남자라고 한다면...
─그 귀걸이 잘 어울리네.
유진 칼리오페님 뿐이다.
‘루...루시아님의 부군에게 이런 불경한 생각을...!’
귀까지 새빨개진 마르잔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니요...없는거 같아요.”
“...마르잔. 저는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 사, 사랑이요?”
릴리스이 말에 마르잔이 침을 꼴깍 삼켰다.
‘크..큰일이다.’
루시아님이 분명 제대로 감시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놈팡이가 성녀님을 꿰어 냈단 말인가.
“사...상대는 누군인가요?”
“음...명문가 출신에 머리가 검고 슬픈 눈을 가지고 있어요.”
책에 적혀있던 남자 주인공을 떠올린 성녀님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검은 머리요?’
마르잔이 침을 꼴깍 삼켰다.
카르네아에 검은 머리는 절대 흔하지 않다.
거기에 명문가 출신이라면...
‘서...설마?’
마르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한사람뿐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심정으로 마르잔이 물었다.
“...나...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음...그러니까...저보다...한살 위네요.”
확실했다.
릴리스는 유진님을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