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빡대가리 성녀님은 발정기 (1)
* * *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날.
카르네아에서의 새로운 1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겐 꿈과 희망이 가득한 시간이겠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지 않다.
...이번 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최종보스’의 세력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벌써 숨이 턱턱 막히네...’
지금까지도 그랬는데 왜 이제와서 난리냐고 한다면 가르시아와 마이샤는 애초에 결이 다르니 제외하고.
늑대나 촉수 같은 녀석들은 간접적으로는 영향을 받았을지 몰라도 ‘최종보스’의 세력에는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4장의 보스「되살아난 타락」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하나하나가 재앙급인 녀석들이 나타난단 말이다.
‘....누가 좀 살려줘라.’
나는 대부분의 메인 이벤트를 꼼수를 사용해 클리어했다.
1장의 경우 로레오스의 도움으로, 2장의 경우 이제는 3학년이 된 수석과 차석을 협박해서, 3장의 경우 트리스티아의 미약을 사용해서 말이다.
...하지만 4장에서는 누구의 도움을 구할 수가 없다.
심지어 루시아조차 말이다.
4장의 보스 ‘되살아난 타락’은 그 이름에 걸맞게 ‘타락’이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주변 인물들의 정신을 순식간에 타락시켜 동료를 공격하게 만드는 이 기술은 공략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략이 불리해지는 개 같은 능력이다.
‘...결국, 나와 성녀 둘이서 되살아난 타락을 막아야 하는데...’
성녀의 고유 능력인 ‘정화’는 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타락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가는 게 맞다.
아니, 그보다 성녀가 없다면 되살아난 타락은 공략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되살아난 타락’의 약점을 감싸고 있는 안개는 반드시 ‘정화’를 통해 약화시켜야 딜이 들어갔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직 시간 여유가 좀 있는 편이라는 건가...’
‘되살아난 타락’은 중간고사가 끝나는 시점에 부활한다.
이제 막 학기가 시작했으니 아직 몇 달의 여유가 있긴 하다.
그 사이에 나는 성녀를 조교하고, 촉수를 정화해 몸에 기생시킨 다음, '되살아난 타락’이 나타나는 자리에 함정을 잔뜩 깔아 놓아 부활하자마자 첫 번째 페이즈를 스킵하는....
정말 빌어먹게 간단한 계획을 성공하면 공략 가능성은 존재했다.
...그래, 계획대로 된다면 말이다.
드르륵—
생각하기가 무섭게 계획이 실패한다면 분명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황녀 전하께서 등장했다.
“안~녕! 다들 잘 지냈어?♬”
제국의 황녀가 하는 인사라기에는 너무나 친근하기 짝이 없는 모습.
하지만 대부분의 1반 학생들은 그런 리아나의 모습이 익숙한지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편하게 인사했다.
“리아나! 보고 싶었어!”
“응응, 리아나는 잘 지냈어?”
“헬리나! 유피! 나야 뭐, 황실에서 지루하게 있었지~.”
평범한 학생처럼 달려가 둘을 껴안는 리아나.
저것만 보면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황녀님의 뛰어난 인품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무섭네.’
가면 뒤에 숨겨 있는 본성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자 황녀가 나를 바라보고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아, 꼭 지루했던 건 아니네. 유진이가 황성에 놀러 와서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
“유...유진? 설마... 유진 칼리오페를 말하는 거야?”
“...어머나, 말하면 안되는 걸 말해 버렸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 줘?”
개학 첫날부터 나를 엿 먹이려는 건지 100% 고의가 확실한 말실수를 한 리아나.
“무...물론이지. 절대로 비밀로 할게.”
헬리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대로 내버려 두면 무조건 떠벌리고 다닐 거다.
‘하아...’
큰 그림을 본다면 지금 황녀와 친밀도가 높은 모습을 보여줘서 나쁠 것은 없다지만, 절대로 저 정도는 아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리아나의 발언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녀에게 다가갔다.
“어머, 유진아? 무슨 일이야?”
“....황녀 전하. 부디 오해를 살만한 언행은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으음? 뭐가 오해라는 건지 잘 모르겠네?”
눈을 깜빡거리며 시치미를 떼는 리아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거 말입니다.”
“아아~ 그거?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낸건 사실이잖아?”
“...저희 둘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리아나가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으로 입술을 훑었다.
“....유진은 그걸 한여름 밤의 꿈으로 치부할 생각이구나.”
“꺄아아악!”
그 모습을 보고 뭔가를 단단히 오해한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비명을 지르는 헬리나와 여학생 무리.
마음 같아서는 도대체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내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자.
황녀가 허리를 살짝 숙인채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흐음, 이런 농담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나도 상처받는데~.”
“...황녀 전하.”
“후후훗. 알았어! 알았어! 그건 그렇고 대단하네! 5반에서 바로 1반으로까지 올라오다니 상상도 못 했어!...그것도 2명이나 말이야.”
리아나의 시선을 따라가자 고개를 푹 숙이고 혼자서 우물쭈물하는 비비안이 보인다.
“...분명 저 애 이름이 비비안 베아트리스였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리아나는 비비안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비비안 안녕♪”
“..호..화...황녀..전...낫!”
비비안이 입을 감싸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니 당황해서 혀라도 씹은 모양이다.
‘좀 미안하네...’
내가 미리 언급이라도 해야 했는데...
갑자기 1반으로 배정된 거로도 부족해 황녀까지 말을 거니 심약한 비비안의 성격상 견디기 힘들 거다.
“하하핫♪ 그렇게 안 놀라도 되는데. 같은 반이 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일 년 잘해보자. 비비안.”
“네...넷! 잘...부...탁드립니다..”
황녀께서 이름을 불러주는 게 황송한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비비안.
그런 반응이 신선한지 리아나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비비안은 유진이랑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네. 어때 유진이랑 좀 친해?”
“...유..유진...니.”
살짝 나를 바라본 비비안이 버릇처럼 님자를 쓰려고 하자 내가 필사적으로 부정의 시선을 보냈다.
“...유..유진이랑은...그...그냥...반...친구예요...”
다행스럽게도 시선이 통한 모양이다.
“흐음...그래?”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긴 리아나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웃었다.
“그런데 비비안! 멀리서 볼 때는 옷에 가려져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엄청난 걸 가지고 있네?”
“흐엣...!..화..황녀 전하!”
거리낌 없이 비비안의 거대한 가슴에 손을 대고 주무르는 리아나.
“아, 미안해~. 나도 모르게 손이 가버렸네.”
“고...괘..괜찮습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자, 비비안 너도 만져!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굉장할걸?”
황녀가 자신의 가슴을 살짝 들어 올리자, 눈을 크게 뜬 비비안이 고개를 마구 흔든다.
“...아..아니에요...!어..어떻게 감히...”
“자, 자. 괜찮으니까! 어서!”
리아나가 비비안의 손을 잡고 가슴으로 끌어당기는 순간.
드르륵—
“....”
루시아의 등장과 함께 순간적으로 반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학생들이 한 명씩 루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루시아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네, 헬레나님. 헬레나님도 평안하셨는지요.”
반 아이들이 황녀에게 보여주는 감정이 친애였다면, 루시아에게는 경외였다.
딱히 누가 더 잘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의 위치가 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황녀를 발견한 루시아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황녀 전하...”
“루시아~ 안녕.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 안 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제국의 귀족으로서 황실의 핏줄에 예를 갖출 뿐입니다.”
“에이, 그래도 여긴 카르네아잖아. 루시아가 그렇게 굴면 다른 애들도 불편할걸?”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어쩜 제국의 태양과 달이 함께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네요.”
“정말이에요. 두 분의 발끝만큼이라도 닮으면 좋겠어요.”
...나만 그런 것 같았다.
1반 정도 되면 대부분 받들어지며 자라서 그런지 머릿속이 꽃밭인 모양이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마친 루시아가 나를 잠깐 노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간다.
“...루시아님과 유진님이 싸웠다는 소문이 정말인가 봐요.”
“일 학년 때도 두 분이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건 유명했지만 설마 공적인 자리에서 그럴 줄이야...”
그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건 오히려 좋았다.
루시아와의 관계를 잘 숨길수록 큰 그림은 더 잘 그려질 테니까.
“에잇! 모두 조용히 하는 겁니닷...!”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에이미 교수의 목소리.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주위를 살펴보니 에이미 교수의 더듬이 같은 머리카락만이 교탁 위로 삐죽 튀어나왔다.
“에이미 교수님, 교탁에 가려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끄럽씁니닷...! 아직 성장기라 그런 겁니닷...!”
「떠올라라!」
언령을 사용해 공중에 떠오른 에이미 교수가 팔짱을 끼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이 위대한 에이미 교수가 담당이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라는 겁니닷...!”
다른 교수가 그랬으면 권위주의적이라 생각할 만한 대사도 에이미 교수가 말하니 그저 귀여운 투정처럼 보인다.
“그럼, 출석을 부르는 겁니닷...!”
에이미 교수의 혀짧은 목소리와 함께 나의 2학년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