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핑크 & 핑크 (2)
* * *
“...훗, 바보 같은 부교장을 간단히 속여 넘겼군요.”
교장실을 나온 릴리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 표정은 조금 전의 바보 같았던 릴리스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싸늘했다.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고 입학시키다니... 이래서야 계획을 달성하는 것도 간단하겠어요.”
이곳에 온 표면적인 이유는 지원요청 때문이지만 릴리스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후후훗... 이 릴리스! 반드시 이번 기회에 최고의 악당이 되어서 파르테논을 때려치우고 말겠어요!”
릴리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작전명 룰 브레이커
나쁜 짓을 하면 악당이 되고.
악당이 되면 성녀를 할 수 없고.
성녀가 아니게 되면 파르테논을 때려치울 수 있다.
라는 기적의 삼단 논법을 거친 릴리스의 작전이었다.
‘뭐, 저를 길러 준 건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이 릴리스. 평생을 파르테논에서 갇혀 살았어요! 이제는 자유를 만끽할 때가 됐다고요!’
본래라면 이런 지원요청에 성녀라는 어마어마한 위치에 있는 릴리스가 직접 올 필요가 없다.
하지만 릴리스의 필사적인 생떼와 보내주지 않으면 예배시간에 교인들 앞에서 바닥에 드러눕겠다는 협박을 통해 간신히 허락받을 수 있었다.
“자, 그럼... 첫 번째 악행을 시작할까요.”
악행을 떠올린 릴리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간식을 먹는다.... 밥맛이 떨어지기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 하지만 이 릴리스! 저지르고 말겠어요!’
릴리스는 용돈 주머니를 잃어버리지 않게 꽉 쥐고는 카르네아의 매점으로 향했다.
“후훗... 아직 입학하기도 전인데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스스로가 두렵군요.”
자화자찬하며 웃던 릴리스는 매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와아.”
눈을 반짝거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가...간식이 이렇게 많이! 뭐... 뭐를 먹어야하죠? 이것도 저것도 다 맛있어보이는데... 아, 아니에요! 릴리스 냉정해져요! 어차피 최고는 정해져 있잖아요!’
릴리스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간신히 냉정함을 되찾은 릴리스는 파르테논을 떠날 때부터 줄곧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간식을 주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흐흠, 민트초코를 하나...흐에엣!”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던 릴리스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였다.
구석에 작게 적혀 있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마치 여신의 인도가 있던 것처럼 릴리스의 눈에 띈 것이다.
“미...민트초코 닭꼬치? 다...닭꼬치에 민트초코를 바른다고요? 심지어 가격도 저렴...?”
릴리스가 충격으로 손을 덜덜 떨었다.
‘이, 이건 혁명이에요! 지금까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거죠! 이걸 만든 사람은 천재가 분명해요!’
맛있는 것에 맛있는 걸 더하면 훨씬 맛있어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후우... 이런 걸 엄청난 것을 놓치고 그냥 민트초코를 주문할 뻔하다니! 까닥하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볼 뻔했군요!’
무언가를 납득한 듯 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지만 카르네아는 만만치 않은 곳이군요! ...하지만 안타까워요! 상대가 이 릴리스인걸요! 운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만면에 미소를 띤 릴리스가 점원을 향해 손을 쫙 뻗으며 말했다.
“민트초코 닭꼬치 하나 부탁드려요!”
***
트리스탄의 오두막을 찾아가니, 익숙한 얼굴의 꼬맹이가 눈으로 오리를 만들고 있었디.
“안녕.”
“호에에에에! 유진이에요!”
오랜만에 마주친 이졸데는 여전히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는 이졸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약간 피곤하지만 괜찮은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트리스탄은 교수님은?”
“아빠는 잠깐 외출하신 거예요! 앗 저기 오고 있어요!”
이졸데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니 트리스탄은 급하게 달려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순간, 첫 만남 때처럼 다짜고짜 공격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쫄았지만...
다행스럽게도 트리스탄은 그냥 반갑다는 듯 등을 두드려줄 뿐이었다.
“잘 왔네. 유진. 안으로 들어오게.”
오두막의 내부는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이졸데가 깨어나서 일까 좀 더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자네가 오는 줄 알았으면 술이라도 사 오는 건데. 지금은 차밖에 없군.”
“괜찮습니다. 차로 충분합니다.”
“저는 코코아가 좋아요.”
은근슬쩍 자신의 취향을 어필하는 이졸데를 보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트리스탄이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인가.”
“...묻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어떤 걸 말인가?”
내가 차를 한입 홀짝이며 말했다.
“슬슬 반편성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아직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트리스탄이 이어 말했다.
“자네는 1반일세.”
“...”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말해 주니 조금 놀라웠다.
“일단 로레오스 교수님의 추천서가 있었고 나 역시 자네를 1반으로 올리는 데 동의했네. 뭐 이게 아니더라도 ‘늑대’토벌 같은 실적이 있으니 결국은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감사합니다.”
1반으로 올려달라는 부탁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거 같았다.
“참고로 자네의 담당 교수는 에이미 교수가 맡게 되었네.”
트리스탄이 아닌 건 좀 놀랐지만, 에이미 교수도 나쁘지 않다.
최상급 고유능력인 「언령」을 다루는 에이미 교수에게는 같은 고유능력자로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로레오스가 담당을 맞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매일 같이 특훈을 시키는 걸 봐서 나를 성장시키겠다는 열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열의가 담당을 맡을 정도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나보다.
“로레오스님이 담당이 아니라 서운한가 보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게 로레오스님이 자네의 담당을 맡지 않은 건, 지금 아카데미에 없기 때문이니까.”
“...?”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로레오스가 왜 없어?’
1학기야 로레오스가 활약할 부분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2학기 때에는 로레오스의 힘이 필수적이다.
사라져서는 안 되는 존재란 말이다.
“자네에게 어울리는 스승을 찾으러 간다더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자네의 담당을 포기했네. 그 정도의 열의를 가진 로레오스님도 하지 않는 걸 내가 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
트리스탄의 말을 듣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지만,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제발...’
부디 2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로레오스가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흠, 잡설이 길었군. 그래서 자네가 하고 싶은 부탁이 뭔가?”
“...1반으로 올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 말하는 건가?”
“비비안 베아트리스입니다.”
트리스탄이 기억나지 않는 듯 눈을 찌푸렸다.
“...비비안 베아트리스?”
“2학년 1반의 비앙카 베아트리스의 여동생입니다.”
그때야 트리스탄은 누구인지 기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누군지 알겠군. 그 아이도 로레오스님의 언급은 있었지만 이렇다 할 실적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네. 그래서 그 아이를 1반으로 올리고 싶은 건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비비안을 1반으로 올려야만 하는 이유를 대며 설득할 준비를 했지만.
“알았네.”
너무나 쉽게 통과 되었다.
“...그렇게 쉽게 되는 일입니까?
"아니, 자네랑은 다르게 특출난 실적이 없으니 설득이 쉽지는 않겠지.”
“그런데 그렇게 쉽게 말씀하셔도 되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트리스탄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지. 자네의 부탁이지 않나. 어떻게 해서든 되게 만들어야지.”
“...감사합니다.”
“인사는 필요 없네. 이 정도는 자네에게 진 빚의 이자도 안되니까. 그래서 더 부탁할 것은 없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 자네라면 언제든지 환영하니 부담가지지 말고 말하게.”
이졸데를 보며 작게 미소 짓는 트리스탄을 보자, 이졸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벌써 가려 하나? 좀 더 있다고 가지.”
“성유 제작자님께 인사를 드려야 해서요. 너무 늦기 전에 가보려고 합니다.”
“아아... 나도 그분의 얼굴을 한 번 뵙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절대로 나오지 말라는 탓에 그러지 못했군.”
내가 작게 웃었다.
양호 마망의 성격상 이졸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모유를 제공하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을 보고서 모유를 건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초콜릿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래. 꼭 가져올게.”
나는 마지막으로 이졸데의 머리를 쓰다듬고 양호실로 떠났다.
***
카르네아의 양호실 앞.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자, 잠시만요!”
또 뭔가를 하고 있었는지 양호실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스치는 달짝지근한 우유 냄새.
또래의 상큼함과는 달리 성숙한 여인에게서만 풍길 수 있는 향기였다.
“유...유진...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양호 마망이 달려들 듯 끌어안겼다.
방학 중에 고향을 다녀왔을 뿐인데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을 본 반응이다.
“이거 또 꿈 아니죠?진...진짜 유진 군 맞죠?”
나는 이전보다 더욱 부드러워진 양호 마망의 가슴의 감촉을 느끼며 말했다.
“...젖소?”
‘네, 다녀왔어요.’
....말이 헛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