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루시아는 울고 있다 (3)
* * *
눈을 떠보니 해가 화창하게 뜬 정오였다.
‘...몇 번이나 한 거지?’
정신을 잃어도 계속해서 부활하는 루시아를 상대하느라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듯 했다.
“...죄...죄송해요!...주...주인님...제가...미쳤나봐요..”
고개를 돌리자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있는 루시아가 보였다.
“설마...주인님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죄송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파들파들 떨고 있는 루시아가 안쓰러워 품에 끌어당긴 채 등을 쓰다듬었다.
“...주인님...정말...죄송...”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자 뻣뻣하게 굳어있던 루시아도 진정한 듯 안겨 온다.
그렇게 잠시 체온을 느끼고 있자 루시아가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저...주인님?...이 상황에서...말씀드리긴 그런데...”
“응, 뭔데?”
“그..어제...하셨던....약속...은...”
“....”
어제 했던 약속이라...
분명 데이트를 말하는 것일 거다.
‘...피곤한데.’
약속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어제의 정사로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아...아니에요...피곤하실텐데 죄송해요...”
내가 침묵하자 루시아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을 보자 몸이 좀 피곤한 게 대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빨리 준비해서 나가자.”
“네에! 주인님!”
환하게 웃은 루시아가 욕실로 들어가자 내가 바닥에 떨어진 옷 쪼가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옷이 없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욕실에 들어갔던 루시아가 다시 튀어나오며 말했다.
왜 루시아가 내 옷을 가졌는지에는 의문이 들었지만...
“자, 주인님도 같이 들어오세요! 제가 씻겨드릴게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기에는 루시아와 같이 목욕하는 게 중요했다.
***
“그럼 옷부터 사러 가요! 제가 사드릴게요!”
변장을 위해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물들인 루시아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나도 돈은...”
“아니요! 제가 주인님의 옷을 찢어버렸으니 부디! 사양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가죠!”
루시아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고급 의류점이었다.
“흐으으음!!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루시아.
“...너무 화려하지 않은가?”
“아니요! 너무 잘 어울려요! 자자, 이것도 입어보세요!”
“...지금 입은 게 마지막이라고 한 거 같은데...”
“진짜 마지막! 이번 게 진짜 마지막이니까! ...안돼나요?”
마지막이 벌써 몇 번째 반복됐지만, 루시아가 저런 표정을 지으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진짜 이게 마지막이다.’
속으로 다짐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루시아가 꽃망울이 터지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음음! 역시 이것도 잘 어울려요! 아, 어떻게 하죠. 전부 마음에 들어 고민이네요...”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처럼 한참을 고민하던 루시아가 손뼉을 짝 마주치며 웃었다.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마음에 들면 전부 사면 되는 거네요!”
“...이걸 전부 말이냐? 너무 많지 않나?”
“아뇨! 더 사야 해요! 세상에 주인님을 매력을 널리 알리기에는 이걸로도 부족...!”
말을 하던 도중 루시아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네요.”
루시아의 말에 이제 쇼핑은 끝인가 싶어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럼 이번에는 제 것을 사러 가죠!”
...이번에는 루시아의 차례였다.
“...이거 어때요? 귀엽게 보이나요?”
“...잘 어울린다.”
“헤헤... 그럼 이건요?”
“그것도 잘 어울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을 말하자 루시아가 볼을 부풀렸다.
“...으으음...주인님... 아까 전부터... 잘 어울린다고만 말하고 있어요.”
루시아가 서운한 듯 말하지만, 나로서는 냉정한 평가였다.
‘외모가 다 해 먹는데 어떻게 하라고...’
막말로 거적때기 하나 주워 입어도 패션으로 소화할 거 같은 루시아의 외모를 어쩌라는 건가.
“...네가 워낙 이쁘니 뭐든 잘 어울린다.”
“흐읏!...헤헤...주인님이...그렇다면...그럼 일단 입고 나와 볼게요!”
얼굴을 붉히며 탈의실로 달려 들어간 루시아.
“...저..주인님.”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저...조금...가슴이 조금...꽉...껴서...”
스륵—
커튼이 살짝 젖혀지며 루시아의 새하얀 등이 눈길을 빼앗았다.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동안의 경험이 쌓였는지 내게도 ‘각’ 보이기 시작했다.
‘...각이군.’
지금 루시아의 부탁을 받아드려 탈의실 안에 들어가면 분명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 도와주마.”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침을 꼴깍 삼킨 내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여직원이 루시아가 있는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서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나타나서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만 저의 가게에는 ‘여성 탈의실’만이 존재하는 관계로 도움이 필요하시면 직원을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듣는 상식적인 발언에 내가 고개를 숙였다.
***
“...결국, 그건 가슴이 꽉 껴서 못 샀네요... 주인님한테 이쁘다고 들었는데...”
한쪽 손에 짐을 가득 든 루시아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양손으로 짐을 나눠 들면 편할 텐데 끝까지 내 손을 잡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다음에 또 사러 가자.”
“헤헤... 네. 주인님.”
루시아가 방긋 웃으며 맞잡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그럼 이제 어디를..”
“어머나! 저런 곳에 골목길이!”
루시아가 처음 본 듯이 말했지만 분명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언급했던 그 골목이었다.
“주인님. 잠깐 저기에 뭐가 있는지 구경 갈까요?”
그렇게 말한 루시아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나를 이끌고 달려갔다.
“...헤에...주인님...여긴 아무도... 아무것도 없네요.”
“...그렇구나.”
루시아가 시선을 살짝 올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모르겠죠?”
루시아가 딱 달라붙는 옷의 가슴 부위를 살짝 잡아당기자.
....분홍빛 젖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흐앗!...읏!...으핫...!주...주..인님♥...흣♥”
“변태 같은 년. 그렇게 하고도 부족한 거냐!”
“...네에엣♥루...루시아는...변태년이에요..!♥ 흐읏..! 주인님이랑 더..더..하고싶어요!!♥”
***
“헤헤헤....”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푸른 하늘이 어둡게 덧칠해졌다.
“....주인님을 이렇게 독점할 수 있다니. 때로는 술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팔짱을 낀 루시아가 달라 붙어오며 말했다.
“....”
독점이야 어쨌든 술에 취하는 건 자제해줬으면 한다.
“후훗, 주인님 표정이 굳었어요.”
팔짱을 푼 루시아가 총총걸음으로 앞으로 달려간다.
“주인님. 오늘은 너무 행복해서... 정말 마법 같은 하루였어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루시아의 푸른 눈동자에는 달이 담겼다.
“...하지만 이제는 마법이 풀릴 시간이네요.”
나를 바라보는 루시아가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지어진다.
“저, 알고 있어요... 어째서 주인님이 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지.”
“...루시아.”
내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자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재촉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언제가 주인님이... 아니, 우리가 이 세계를 구하고 나면...”
한 걸음 다가와 나를 꽉 껴안은 루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는 꼭 제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세요.”
***
시간을 되돌려 루시아와 유진이 데이트를 떠나기 위해 여관을 나선 직후.
402호에서 진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마르잔이 걸어 나왔다.
“...”
루시아와 유진의 관계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루시아님의 부군으로 유진님을 정해두었다는 것도 그리고... 둘이 건전하지 않은 관계인 것도 루시아님께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하아...”
마르잔이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한창 사춘기인 마르젠은 지난밤 혹여나 무슨 소리라도 들릴까, 벽에 딱 귀를 댄 채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잠이라도 잘 껄..”
하지만 여관의 광고대로 방음 마법은 완벽한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내려가려던 마르잔이 문뜩 401호 앞에 멈춰섰다.
“...루시아님이랑....유진님은...외출하셨지?”
무언가 머릿속에 떠오른 마르잔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절대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루시아님의 호위로서 루시아님과 그 부군이 주무시는 곳에 위험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다!
절대로! 정사의 흔적이 궁금한 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변명을 마친 마르잔은 얇은 철사를 문구멍에 넣고 돌렸다.
—찰칵
“...읏!”
방 안에 들어가는 순간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지독한 밤꽃 냄새와 여인의 체향이 마르잔의 코를 파고들었다.
“...시..실례..하겠습니다...우와...”
침대는 온통 젖어 있었고 바닥에는 찢겨나간 옷이 가득했다.
마르잔의 침이 꼴깍 삼켰다.
‘...그...루...루시아님이...이토록...거칠게...!’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몇 배는 강력한 정사의 흔적에 마르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이...이건..어..어디까지나..조사니까...”
아무도 없지만 다시 한 번 변명한 마르잔이 대충 방안을 둘러보던 와중 침대 아래에서 익숙한 와인병을 하나 발견했다.
‘...이건...?’
병의 내용물을 확인한 마르잔이 눈을 찡그렸다.
술에 약한 루시아님이 자주 드시는.
...알코올 없는 와인의 병이었다.
“...마르잔?”
“...루...루시아님?!”
그때, 갑작스러운 루시아의 등장에 마르잔이 놀라 소리쳤다.
‘...루시아님은 유진님과 외출한 줄 알았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여기는..어쩐일로?”
자신도 모르게 등 뒤로 와인병을 감춘 마르잔이 말했다.
“...아직 조금 쌀쌀해서 주인님에게 걸어드릴 목도리를 가져가려고... 그러는 마르잔이야 말로 여기는 어떻게? 분명 열쇠를 잠가놨는데? ...설마 또 열고 들어온 거니?”
“...그...그게...죄송합니다!..혹시나...그...위험한게 숨어있을까봐..!”
“하아... 내가 분명 그 손버릇을 고치라고... 흐음...?”
잔소리하던 중 마르잔의 태도를 수상히 여긴 루시아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마르잔, 뭘 감추고 있지?”
“...아..아무것도...감추지..”
“마르잔은 거짓말이 서툴다니까. 자, 꺼내보렴.”
루시아의 추궁에 마르잔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별로 대단한 걸 숨긴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와인병인데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어서.”
루시아의 냉정한 목소리에 마르잔이 양손으로 와인병을 내밀었다.
“...이..이걸....”
“어머나.”
와인병을 본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입술에 검지를 올리고 말했다.
“...주인님에겐 비밀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