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베아트리스가의 일상 (1)
* * *
‘...짜증나.’
비앙카는 화풀이라도 하는 듯 애꿎은 스테이크를 쿡쿡 찔러 댔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유진의 얼굴이 더 생각났다.
‘그 변태 새끼가 뭐라고...’
가문이 굉장하고, 얼굴이 좀 괜찮게 생겼고, 안 그런 척하면서 조금씩 배려해주는 점이랑 야한 걸 잘한다는 거 말고는 장점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나 지금 뭐라는 거야!’
분명 욕을 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유진의 칭찬뿐이었다.
‘이, 이러면 내가 꼭 그 새끼를 신경 쓰는 거 같잖아! ...아아!! 몰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사기꾼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기분이라 생각하는 걸 그만두었다.
‘...밥이나 먹자.’
진정되지 않은 마음의 탓일까.
쿵—!
“...아.”
스테이크를 향해 강하게 내려찍은 포크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쨍끄랑—
날아간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고 비비안이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히이이익! 죄...죄송해요!”
저런 비비안의 반응을 보니 입안이 씁쓸했다.
분명 복수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도 비비안은 믿지 못하는지 여전히 날 두려워 했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비비안이 큰 결심을 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언니..어디가세요..시..식사는....”
“입맛 없어. 너나 먹어.”
방으로 돌아온 비앙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이 바보.”
또 비비안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닌데.
비비안이 신경 써서 말해줬는데 좀 좋게 대답해줘도 좋으려만...
왜 나는 항상 이런 식인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는데.’
언제부터 비비안과의 관계가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며 비앙카는 이불을 푹 눌러썼다.
***
콰왕—!
어린 비앙카의 주먹에 맞은 거목이 서서히 뒤로 넘어간다.
쿠우웅—!
이내 나무가 완전히 쓰러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르자,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역시 비앙카 아가씨입니다. 천재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군요!”
“그럼요! 저 나이에 벌써 고유능력을 각성하고 이렇게까지 다루다니. 베아트리스가의 부흥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또래들보다 한참 먼저 각성한 고유능력에 주위에서도 마구 띄어주었으니 어린 나는 스스로를 천재라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언닛!”
쓰러진 나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자 비비안이 혀짧은 발음으로 나를 불렀다.
“비비안!”
내가 한걸음에 달려가 비비안을 꼭 껴안았다.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 자수정 같은 똘망똘망한 눈에 앙증맞은 코와 입을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이었다.
“으읏...숨...마켜..! 어...언니 이...거!”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같이 땀을 닦을 수건을 가져다주다니 이 얼마나 기특한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비비안의 말랑말랑한 볼에 뺨을 비볐다.
“...비비안!..비비안!...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으으...언니...땀냄새..”
땀 냄새가 난다고 말하면서도 밀쳐내기는커녕 오히려 뺨을 비벼오는 비비안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걸 꼽자면 당연히 비비안일 것이다.
‘...비비안.’
비앙카의 마음속 한편에는 언제나 비비안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베아트리스 가문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명분 앞에서 부모님... 아니, 가문의 모든 지원과 관심은 비앙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비비안은 언제나 비앙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나라도.’
나만이라도 이 작고 어린 동생을 지켜주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내 능력은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뭔가 예전보다... 조금 둔해진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슬럼프라도 온 걸까요? 아니면...”
나를 향했던 어른들의 기대와 감탄의 시선은 순식간에 실망과 의심으로 변해갔다.
“...”
꽉 쥔 주먹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보다 나를 바라보는 저들의 눈빛이 더 괴로웠다.
방에 돌아온 나는 의자에 앉아 피범벅이 된 붕대를 풀었다.
“...윽.”
붕대가 상처에 눌어붙어 뗄 때마다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아”
엉망진창이 된 손을 바라보자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부드러웠던 손은 매일 같이 이어진 훈련 때문에 거칠고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변했다.
‘...내일부턴 훈련량을 더 늘리자.’
벌써 지금까지 몇 번이고 훈련량을 늘렸어도 여전히 실력은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저 때는 아직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 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내 재능은 천재는커녕 잘 쳐 줘봐야 영재 수준.
나는 그저 우연히 ‘고유능력’을 일찍 발휘한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처음에는 내 발끝도 쫓아오지 못했던 또래들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무리 노력해도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욱 최악인 건 따로 있었다.
—짜악
“...비앙카...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지?”
어머니의 폭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뺨이 조금 얼얼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기에는 나는 이미 고통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너는 반드시 베아트리스 가를 부흥 시켜야 한다. 그...그러지 않으면 베아트리스가...아..!아아..아아!”
....하지만 내가 뒤처질수록 망가지는 어머니의 모습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그...그래...비앙카...내겐...너 밖에 없다. 너밖에...”
나를 끌어안은 채로 흐느끼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무언가 닳아가고 있었다.
‘...지친다.’
끝이 없는 경주를 지속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이 짓을 반복해야 하는 끝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끝나기는 하는 걸까.
점점 황폐해져 가는 내 마음에 유일한 위로가 되는 건 비비안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왜 안 왔지?’
훈련이 끝날 땐 언제나 비비안이 수건을 가져다주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저... 어머니 비비안은?”
“...비비안? 모르겠다. 어차피 방에 있지 않겠느냐. 그런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다음주에 있을....”
...그런 것?
비비안에게 그런 것이라니.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앙카? 내 말을 듣고 있니?”
“...네. 어머니. 그럼 다시 훈련하러 가볼게요.”
“그..그래...훈련은 중요하지. 열심히 하렴.”
나는 어머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훈련장이 아닌 비비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비비안? 안에 있어?”
노크를 해보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또 이불을 안 덮고 자는 게 아닐까 싶어 방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게 뭐야?’
우웅— 웅—!
동시에 몇 개나 구현된 마법들.
그 한가운데에서 비비안이 연주를 지휘하듯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비비안?”
이름을 부르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이게 과연 내가 알던 어린 비비안이 맞단 말인가.
“아! 언니!”
하지만 비비안이 내 쪽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순간 그런 의심은 사라졌다.
“봐봐! 책에 쓰여 있는 대로 했더니 성공했어!”
언제처럼 내게 다가와 안기는 비비안.
나는 마주 안아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마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중영창?’
다중영창은커녕 수십 년을 공부해도 이중영창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가 넘쳐난다.
그런데 그걸 비비안은 고작 책에서 본 것만으로 성공했단 말인가?
한순간에 알아챘다.
‘천재다.’
비비안은 나 같은 반쪽이 아니라 진짜 천재라는 걸.
그와 동시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났다.
‘...안돼.’
안된다.
절대로 어머니께 이걸 들켜서는 안 된다.
나처럼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도 이토록 괴로운 경험을 하는데 어머니가 비비안의 재능을 본다면 과연 무슨 짓을 할까?
분명 비비안은 망가지고 말 것이다.
나는 절대로 그걸 지켜볼 수는 없었다.
‘내가 지켜야 해.’
언니로서 비비안만큼은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할 수 없었다.
“...언니? 화났어...? 혹시 내가...마중 안나가서? 미...미안..집중하다보니까...시간가는 줄 몰랐어...”
내 표정이 굳은 탓일까, 비비안이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비비안을 꽉 껴안으며 대답했다.
“아니. 화 안 났어. 내가 비비안한테 화를 낼 리가 없잖아. 그냥 조금 놀라서 그런 거야.”
“헤헤...응. 언니. 언니한테 보여주려고 연습했어!”
순순하게 웃는 비비안을 보자 나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표정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비안. 앞으로 마법 사용하는 건 금지야.”
“...에? 왜? 왜 금지야?”
“마법을 사용하는 걸 들키면 비비안은 언니처럼 바빠질지 몰라. 그러면 비비안은 이제 언니랑 못 노는데 그러고 싶어?”
나랑 놀 수 없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 비비안.
“으응....아니! 언니랑 놀래!”
“그럼 이제 마법은 안 쓰는 거야? 언니랑 약속할 수 있지?”
“응! 약속할게!”
손가락에 손가락을 마주 걸며 비비안이 약속한다.
“잘했어. 비비안.”
내가 비비안을 칭찬하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문뜩 깨달았다.
...어느새 비비안의 눈높이가 나와 비슷해졌다는 걸.
“...비비안 키 컸어?”
“그래? 잘 모르겠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뭘 묻는 거야...’
이런 쓸데없는 걸 묻다니.
최근 들어 키 성장이 정체된 상태라 조금 신경 쓰인 듯했다.
‘...어차피 나도 곧 클 텐데.’
헛웃음을 흘린 내가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비비안 이리 오렴.”
“...헤헤...언니.”
품 안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체온에 나는 맹세했다.
비비안이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더욱 노력하자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