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태양과 달의 연회 (6)
* * *
“황녀 전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머나, 내 이야기를?...부끄럽게. 후훗.”
입으로는 부끄럽다고 하면서 리아나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다.
“유진이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지 몰랐네. 그래서 정확히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황녀전하께서 태자전하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흐음...”
내 말을 들은 리아나가 약간 실망한 눈치를 보냈다.
“하아... 미안한데 나는 그런데 별로 흥미 없....”
“전하께서 흥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말 한 번 끊은 것 가지고 죽을까 봐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황녀께서는 오히려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째서?”
“태자 전하의 대답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황태자가 그저 겁을 먹고 싸움을 피한 것이라면 어떻게든 그의 생각을 뒤집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오답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물러난 일.
그렇다면 그의 신념은 존중받아야 했다.
“흐음, 그래서 결론은?”
“태자 전하로는 할 수 없습니다.”
“뭐를 할 수 없다는 걸까?”
“황녀 전하를 막는 일.”
대답을 들은 리아나는 잠깐 멈칫한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제가 황녀 전하를 막겠습니다.”
“...후후훗. 유진이 나를 막아준다고?”
리아나의 가면이 조금 벗겨진다.
“어떻게?”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흥분과 기대가 가득한 열띤 리아나의 얼굴.
“힘도 권력도 모든 것이 나보다 부족한 유진이 어떻게 날 막을 건데?”
황녀의 말대로다.
나는 뭐 하나 황녀보다 나은 것이 없다.
권력이야 상대가 황녀이고, 무력은 개미와 코끼리 수준의 격차가 존재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막겠습니다.”
“후후훗, 그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리아나가 자연스럽게 장식장에 다가간다.
피잉─
그리고 눈치챘을 땐 이미 장식장에 매달려있던 단검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때? 보이지도 않았지?”
“...네.”
“아아~. 이래선 안 되겠네. 나는 유진이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너무 약해잖아.”
리아나 중지를 좌우로 까닥거리며 말했다.
“나를 막으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강해져야지.”
만면에 미소를 띤 황녀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그러니까 내가 강해질 기회를 줄게. ...나오렴.”
리아나가 명령한 순간 리아나의 그림자가 용암처럼 부글거리더니, 이내 솟구쳤다.
“...”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건 나와 같이 새까만 눈동자에 검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였다.
파볼리에 멜피사
—도련님께서도 알고계시겠지만 키아라님은... 살해당하셨습니다.
파볼리에의 성을 가진 마지막 인물.
—예, 방계의 수장 파볼리에 메츠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내 어머니를 죽인 파볼리에 메츠의 딸이기도 했다.
이미 설정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알프레도에게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들은 탓일까.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동요하고 말았다.
“자자! 둘이 인사해. 마지막 남은 가족인데 친하게 지내야지.”
“처음 뵙겠습니다.”
“...말을 편히 하시지요. 공자님.”
나와 멜피사의 반응을 본 리아나가 즐겁게 웃는다.
“응응, 이렇게 가족끼리 만나니 나까지 기쁘네! 유진도 그렇지?”
본래라면 원수와 다름없는 사이인 나에게 기쁘냐고 묻는 황녀.
비록 동요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가 이 세계에 전생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거기에 어머니가 살해당할 당시에 멜피사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멜피사에게 내가 증오를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네, 황녀 전하. 전하의 은혜에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흐음.”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황녀는 먹잇감을 바꿨다.
“멜피사는 대답이 없네?”
“...아닙니다. 저도 기쁩니다... 황녀전하.”
표정과는 달리 창자를 끊어내는 듯 고통스럽게 말하는 멜피사.
“응! 잘됐네. 그럼 멜피사. 유진에게 파볼리에의 ‘혈족 마법’을 알려줘.”
“...! 전하!”
멜피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쳤다.
“왜에?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안돼. 꼭 알려줘야 해. 그거라도 있어야 유진이 강해지지.”
“하지만...!”
“흐음? 멜피사... 내 말을 안 들을 셈이야?”
“...읏...아닙니다. 명을...따르겠습니다.”
“응, 그래. 그래. 그래야지.”
내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황녀가 쭉쭉 일을 진행해나간다.
“기한은 그래... 음. 유진이 황실에 있는 동안이라고 할까?”
이런 곳에서조차 영악하기 짝이 없는 황녀다.
일정 날짜를 정해 놓은 게 아니라 ‘황성에 있는 동안’으로 마감을 정해 놓음으로써 내가 황실에서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릴 생각인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이건 정말 쓸모없는 걱정이겠지만. 만에 하나. 개학 때까지 유진이 ‘혈족 마법’을 습득하지 못하면...”
어린 악마처럼 웃으며 리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둘 다 벌 줄 거야.”
***
리아나와 대화를 나누고 삼 일이 지났다.
그동안 어떤 진전이 있었냐면...
“공자님...”
“...네.”
멜피사가 나를 부르자 얼굴이 화끈거린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파볼리에의 혈족 마법 ‘그림자’
나는 ‘그림자’의 가장 기초 단계인 자신의 그림자를 움직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씨발.’
어떻게 염동력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마력을 쥐꼬리만큼 이동시키기는 했지만 그게 끝이다.
나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애초엔 난 ‘고유능력자’지 ‘마법사’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조교사’의 특성 때문이다.
“...공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때 멜피사가 굳은 얼굴을 한 채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도 첫날은 괜찮았는데, 둘째 날이 되니 사람이 조금 망가지더니,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맛이 갔다.
그만큼 멜피사가 황녀의 벌을 두려워한다는 방증이었다.
...뭐, 나도 무슨 벌이 떨어질까 두렵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황녀가 내게 가진 호의를 믿고 있을 뿐이다.
‘...죽이진 않을 거다.’
지금 황녀는 내가 자신의 대적자가 되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분명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는 황녀도 손을 대진 않을 거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내가 대답하지 않자 뭔가 오해한 멜피사가 무릎을 꿇고 내게 손을 싹싹 빌어댄다.
“...저 따위가 이런 말로 사죄드려봤자 의미 없는 것은 압니다! 그래도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평생. 정말 평생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공자님...! 제발...! 저는 살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다.
솔직히 멜피사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가문이 완전히 멸문될 정도의 큰 전쟁에서 어린애 한 명이 뭐 어쩌겠는가.
어머니를 죽이는데 멜피사가 직접 참여한 것도 아니고 연좌제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나에게도 죄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쨌거나 멜피사는 외가 쪽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핏줄 아닌가.
“괜찮으니까 일어나세요. 진짜 저도 잘해보고 싶은데 능력이 안 돼서...”
자신의 무능을 입으로 밝히니 창피하기 짝이 없다.
“...부디 말씀 편하게 하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녀 전하께 공자님은 마나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들었습니다!”
“...제가요?”
리아나가 뭔 헛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마나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구슬 찾기 시험 때 황녀 전하보다 먼저 찾으셨다고 말입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공자님.”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
뭐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순도 100%짜리 우연이다.
‘...하필 행운이 그때 발동해서.’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멜피사가 다시 싹싹 빈다.
“...죄...죄송합니다! 공자님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히 저 따위가 조언하다니 건방졌습니다! 부디 용서를...”
멜피사의 목소리는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데 여전히 얼굴은 무표정하기 짝이 없다.
나는 주제를 바꿀 겸 멜피사에게 물었다.
“저... 멜피사씨..”
“저 따위에게 호칭이라니...황송합니다. 부디 멜피사로 편히 불러주십시오.”
“...하아.. 그럼 멜피사.”
“네, 공자님.”
“멜피사는 표정이 별로 없네요.”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멜피사에게는 다르게 들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어릴 적부터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받아서. 시.. 시정하겠습니다.”
새끼손가락을 입꼬리에 걸고 올리는 멜피사.
“아, 이게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래로 내리기까지 한다.
“...”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으니 멜피사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공자님... 이걸로는...마음에 안드십니까? 그... 그럼 때리시겠습니까?”
“...?”
“몸.. 몸에 장애가 남지 않을 정도라면... 아니,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치명적이지 않을 정도의 장애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날 뭐로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미친놈으로 보이나?’
나름대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러자 겉옷을 벗은 멜피사가 손가락으로 가슴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여기는 폐가 있는 곳입니다! 강하게 치시면 타격과 질식의 고통을 동시에 줄 수 있습니다. 여, 여기는 자궁 있는 곳인데 아! 어차피 아이를 낳은 생각도 아니니 자궁이라면 망가트리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자! 주먹으로 때리시죠!”
자궁 위치를 설명하며 망가트리라는 멜피사의 말에 머리가 어지럽다.
“...그런거 아닙니다. 정말 원한 같은 거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미녀 암살자처럼 생겨서는 하는 짓은 바보 병신이 따로 없다.
“그...그럼 어째서 그림자를 배우시지 않는 겁니까.”
“계속 말하지 않습니까... 그냥 재능이 없는 겁니다.”
벌써 몇 번째 이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같은 방계랑은 다르게 공자님께서는 본가의 피가 흐르니 기초 마법만 사용할 줄 알아도 금방 배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초 마법조차 ‘조교사’가 없으면 사용하지 못하는 게 바로 나다.
“...흡! 또.. 거.. 건방지게 지적해서 죄송합니다. 공자님...뭐든지 할테니 부디...용서를.”
멜피사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말한다.
벌써 몇 번째 일지 모르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멜피사.”
“네, 넵! 공자님. 자궁이 별로라면 손가락이라도 자를까요? 두...두개까지라면 어떻게든...”
...미친년.
가르시아나 마이샤도 그렇고 어찌 정상적인 여자가 하나도 없다.
이쯤 되면 내 핏줄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생길 지경이다.
‘...가능하면 이 방법은 안쓰고 싶었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르네아의 개학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금방 배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 * *